지난 5월에 결혼한 우리 부부는 남편의 지인을 통해서 조금 독특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예전에 남편과 함께 민주노동당에서 일했던 친구가 자신과 곧 결혼할 사이판의 남자친구를 가이드로 소개해 주었다.
그 분은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함께 사이판에 이민을 간 후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지금은 가족의 사업을 물려받아 사이판에 정착한 교민이다. 덕분에 우리는 짜여진 일정에 맞춰 관광코스를 돌아다니는 여행 대신 낮에는 숨겨진 관광지를 찾아다니고, 저녁에는 셋이 함께 참이슬을 주고받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사이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정치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그 분은 스스로를 미국 자본주의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연애 초에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여자친구와 한두 번 싸운 게 아니란다. 우리 부부와의 대화 역시 얼마나 원활하게 될지 짐짓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파병문제, 북한문제, 민족문제 등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오고갔지만 단 하나 그 분의 말에 공감한 적이 있었다.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의무를 다하면 국가 역시 국민의 권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일종의 계약관계가 자신의 국가관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기 보다 무수한 의무를 다하는 국민들의 권익에 별로 관심이 없는 우리나라 정부에 항상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때 고개를 끄덕였던 그 분의 이야기가 며칠 전 고 김선일 씨 살해 소식을 듣고 대번 떠올랐다. 갖은 의혹을 제쳐두고라도 국민 한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을 보름 넘게 묵인했다는 외교통상부. 이미 김선일 씨가 사망한 시간이 지난 후에 "희망이 보인다"며 NSC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누었던 노무현 대통령.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5천만 우리 국민의 목숨이 결국 이렇게 다루어질 뿐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더 참담한 것은 이 심각한 사건을 "내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의 태만함이다. 이 태만함은 국민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 데 전혀 익숙하지 않도록 만든 기존의 정치관행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내 생명을 보호해 주지도 못하고 그럴 의지도 없는 정부가 과연 정부로서 더 이상 가치가 있을까. 대통령 선거 때 행사한 한 표가 배신으로 돌아온 이 상황에서 정부를 더욱 강력히 규탄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면에서 지금 수백 여 개 사회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이라크 파병철회 투쟁이 그다지 절박해 보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이 마당에 이라크를 응징해야 한다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의 주장이야 더 이상 같은 국민의 입장에서 들어줄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파병철회 투쟁이 노무현 정부에 파병 철회를 '간청'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 '사정'하는 행위는 아니지 않는가.
일례로 지난 26일 저녁 광화문 집회에서 사회자는 참가자들에게 "대통령님, 제발 파병하지 말아주세요!", "대통령님, 더 이상 우리 국민을 죽이지 말아주세요!"라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소위 "더 많은 시민과 함께 하는 싸움"을 위해 구호를 곱게 외치고, 님을 위한 행진곡 대신 아침이슬을 부른다고 해서 이슬람 사원에 돼지 피를 뿌리자는 인간들이 파병철회 투쟁에 동참할 리는 없지 않은가.
고 김선일 씨 살해와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 정부의 외교적 무능력을 개선하고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파병을 철회하겠다는 대답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계속 파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나는 대통령을 "제대로" 탄핵하는 싸움을 해도 시원찮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들은 사실 제2, 제3의 김선일 씨 사건이 일어나도 노무현 정부에게 어떤 성실한 노력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애당초 그는 국민의 무고한 희생을 방치, 강요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파병 철회를 원하는 이 나라 절반의 국민을 무시하고 결국 또 다른 무고한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한 결코 국민의 정부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라크 파병, 막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지,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좀더 깊이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김원정 /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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