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빈곤하라

[빛나는 여성노동을 위하여](1) - 여성노동자의 이름으로 짊어진 '가난'


'개 값' 같은 삶

"우리 받는 돈, 그거 개 값이어여, 개 값. 있는 사람들은 한자리에서도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씩 먹고 그라지만, 나 평생 살아도 정장 한 번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옷도 맨 날 얻어만 입었습니다”

고려대에서 10년 째 청소용역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방전식 씨는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평생을 죽어라 일했지만, 표현하듯 그의 노동은 항상 ‘개 값’ 취급을 받았다. 제대로 된 정장 한 벌 입어보지 못한 기억에 그는 눈물을 쏟았다.

올해 63살인 그는 95년 38만 원을 받고, 고대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그가 일을 막 시작했을 시절에는 3개월에 한번 보너스도 나오고, 퇴직금도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최저임금 수준인 64만 원 남짓을 받으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비정규직인 그는 퇴직금은 물론이고, 사회보험 혜택도 제대로 적용받지 못한다. 그나마 3년 전까지는 남편과 함께 청소 일을 했지만, 이제는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그렇듯 그는 집에서도 쉴 틈이 없다. 실질적 가장인 그는 밖에서는 청소 노동으로 돈을 벌고, 집에서는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한다.

방전식 씨는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남편의 먹거리를 준비해 놓은 뒤 집을 나선다. 성북구 길음동에 사는 그는 고려대 까지 아침마다 걷는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차비 800원을 아낀 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다리품을 팔게 된다. 6시가 되면 그는 청소를 시작한다. 그가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곳은 고대 과학도서관 5층. 다른 노동자 한 명과 함께 500평 규모의 이곳을 전담한다. 학생들이 몰려드는 9시 전 까지 오전 일을 끝내고 나면, 녹초가 되어 버린다.

“힘든 것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항상 온몸이 아프지만, 보험이 되기를 합니까, 목이 마르다고 누가 음료수를 하나 사줍니까. 그냥 힘들어도 꾹 참고 합니다. 그러다 아프면 내 돈 내고 병원에 가고, 목마르면 내 돈 내고 우유라도 하나 사먹고 또 일을 합니다. 어떡하겠습니까. 이거라도 안하면 먹고 살게 없는데, 별 수 있겠습니까”

함께 살지는 않지만, 방전식 씨에게는 4명의 자녀들이 있다. 그 중 퀵서비스를 하던 둘째 아들은 작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떴고, 현재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지만, 그의 생활에 도움 줄 처지는 되지 못한다.

“12년 동안 한겨레신문사에서 인쇄 일을 하던 큰 아들은 6년 전에 구조조정으로 실직을 했습니다. 퇴직금 1,200만원 받고 나왔는데, 뭐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퇴직금으로 받은 1,200만원과 전세금 빼서 생고기 집인가 뭔가를 차린다고 했다가 다 털어버렸어요. 현재는 오토바이 하나 사서 퀵 서비스 하고 삽니다. 지들 먹을 것도 없는 애들한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난에서 가난으로

방전식 씨는 전라남도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덕에 학교 다닐 꿈도 꾸지 못했고, 일찌감치 그의 부모님들은 “돈도 없으니, 학교 그만 다니고 일이나 해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장작도 캐고, 농사일도 도우며 책보다 낫을 손에 쥐고 살았다. 그 덕에 그는 왼쪽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가난한 농촌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22살이 되던 해에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그는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또 다른 도시빈민의 삶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연탄을 지고, 모래를 나르고, 노점상도 했다. 그러나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산동네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했습니다. 배운 게 없어서 그런지 할 수 있는 일도 없더군요. 연탄지고, 모래를 나르고, 노점일도 했습니다. 오징어다리 10원, 20원에 팔고, 나중에는 떡볶이, 오뎅도 팔았습니다. 결혼해서 남편은 노동일 다녔지만, 제대로 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건강했으니까,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된 삶보다 앞으로의 삶과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10년 째 현재의 직장에서 버티고 있지만, 언제 ‘그만 나와라’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비정규직이잖아요. 매년 용역업체가 바뀔 때 마다 불안합니다. 위에서는 내 나이가 완전히 찼다고 합니다. 해고를 해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거죠. 이거라도 해서 벌어먹고 사는데, 해고되면 어떻게 할지 막막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노점상 뿐”


방전식 씨가 일하는 고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제기동 경동시장 부근. 올해 58살인 홍정자 씨의 오래된 일터가 있다. 홍정자 씨는 이곳에서 18년 째 상추, 콩나물, 고추 등을 팔며 노점상을 해오고 있다. 그는 오전 7시에 집을 나서 저녁 9시 쯤 장사를 끝낸다. 하루 수입은 5-6만원, 한 달 수입은 보통 120만원 안팎이다. 비공식부문, 아니 불법노점을 하고 있는 홍정자 씨에게 역시 4대 보험은 먼 나라 이야기이다.

중학교 때 배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홍정자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뇌출혈로 쓰러진 뒤 몸 일부분에 마비가 왔다. 그 뒤로 그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왼쪽 팔과 다리가 불편하다. 홍정자 씨는 결혼 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세가 기울자 노점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 후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이도 나이고, 몸까지 불편한 그가 공식부문에서 일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오랫동안 경동시장 부근에서 살아온 터라 지인들의 도움으로 야채 노점을 시작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 노점상을 시작했을 때는 하루 1-2만원 벌이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노점상이 이제는 생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 온 종일 일했고, 현재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홍정자 씨는 “이제는 18년 세월의 노하우 덕분에 5-6만원 벌이는 할 수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홍정자 씨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의 얼굴에 깊게 패어진 주름은 그가 살아온 고단한 삶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가난’을 짊어지고

지하철 7호선에서 2년 째 일하고 있는 김은숙(가명) 씨는 방전식 씨와 마찬가지로 청소용역 노동자다. 단지 일하는 곳이 방전식 씨는 학교, 김은숙 씨는 지하철이라는 것 외에는 두 여성 노동자의 삶은 닮아 있었다. 김은숙 씨 역시 하루에 9시간 정도를 일하고, 임금으로 70만원 남짓을 받는다. 그 또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다운 대접(?)을 받고 있었다.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 열악한 작업환경, 가정과 일터를 넘어 이어지는 끝없는 노동. 방전식 씨와 김은숙 씨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닮아 있었고, 두 여성의 어깨위에는 나란히 ‘가난’이 놓여 있었다.

올해 50살인 김은숙 씨는 젊은 시절 대공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는 20대 초반에 한국타이어에서 4년간 타이어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만 해도 비정규직은 없었어요. 몸 고달픈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지금처럼 매일같이 고용불안에 시달리지는 않았고, 관리장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어요. 퇴직금도 있었고, 부족하긴 했지만 보험도 적용받았어요.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뭔지도 잘 몰랐는데, 청소용역 노동일을 하면서 이렇게 비참한 것이란 걸 알았어요”

그가 처음으로 청소용역 노동자로 근무한 곳은 인천국제공항이었다. 김은숙 씨는 01년 인천공항이 개항하면서, 그곳에 입사했다. 용역과 비정규직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던 그는 “당연히 정규직인줄로 알았고, 들어가면 오래 다닐 수 있고, 퇴직금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돈을 벌어 그는 아이들의 남은 교육도 시키고, 퇴직금을 받으면 노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천국제공항의 사정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그런데 거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더라구요. 관리자들이 자기네들 맘에 들면 잘해주고, 그게 아니면 엉뚱한 곳으로 전보배치를 시켰습니다. 주간조인 사람을 야간조로 보내고, 야간조 할 사람을 주간으로 보냈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했고, 그 모습을 보는 저도 힘들었습니다. 여기가 왜 이런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용역체계더군요”

김은숙 씨는 비정규직에 대해 말 그대로 이를 갈았다. 평생을 일했지만, 가난한 자신의 삶에 대해 숱하게 회의했고, 죽으려고 한 적까지 있었다. 그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정부에서 짓밟아버리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꼭 죽이려고 한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노동부 장관은 비정규직 늘려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죠. 젊은 사람들 비정규직 만들어 우리처럼 정신적으로 병이 들게 만들면, 세상이 모두 병이 들죠. 말도 안되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주당 노동시간 144시간, 8시간 노동에 1만 6천원


국내 유일의 간병인노조 지부장을 맡고 있는 정강자 씨는 여러 매체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유명인(?)이다. 올해 54살인 정강자 지부장은 서울대에서 10년째 간병노동을 하고 있다. 간병노동자들의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이미 알려진 바 있다. 대부분의 간병인들은 일요일 오후 2시 부터 근무를 시작해 토요일 오후 2시에 근무를 마치게 된다. 결국 주 6일을 24시간씩 144시간을 근무하는 셈이고, 이는 노동자 평균 노동시간의 3배가 넘는 시간이다. 그러나 살인적인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12시간을 근무하고 간병인들이 받는 간병료는 3만 5천 원 내외. 24시간 간병시 5만 원. 이는 식대, 교통비 모두 포함된 액수로 일 8시간으로 환산하면 16,666 원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처음에 일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온 몸이 다 아팠습니다. 간병업무라는 것이 밤에도 중증환자를 돌봐야 해서 거의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휴식시간도 따로 없었고, 보호자들이 온다고 해도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임금과 노동조건이 아무리 열악해도 이를 악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강자 씨는 간병노동자로 일하기 전까지 전업주부였다. 남편이 기업의 상무까지 지내는 등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남편이 정치활동을 하다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그는 생계를 위해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결혼 전 그는 간호보조업무를 하는 등 전문직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40살을 넘어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란 어려웠다. 다행히도 젊은 시절 간호업무를 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간병노동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간병인노조 전임자로 일하고 있다. 정강자 씨의 희망은 간병노동자들이 좀 더 나은 노동조건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간병노동자 뿐만 아니라 현재의 간병료는 환자가 전담하기에도 부담이 되는 금액이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는 간병인 노동조건과 환자들의 간병 서비스 개선을 위해 간병이 건강보험 체계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망, 가난과 설움 안고 무덤으로


방전식, 홍정자, 김은숙, 정강자. 4인 4색의 삶을 살아온 이들 여성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다. 배우든, 못 배우든, 있던, 없던 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점상, 청소, 간병이었다. 그들의 노동은 힘들고, 고되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은 항상 ‘개 값’ 취급을 받는다. 평생을 일해도 가난하고, 그 가난에 허우적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담겨있었다.

여성노동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여성들이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들의 노동은 남성노동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노동자는 언제나 산업 예비군이었고, 그들의 노동은 항상 평가절하 되어왔다.

김은숙 씨는 말했다.

“현재 일이 힘들다는 것 접어두고요. 이 비정규직이라는 것 좀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소원이예요, 소원. 우리는 아니더라도, 우리 후손들만이라도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정규직은 정말 싫습니다. 이토록 힘들게 살았기에, 후손들에게 만큼은 유산으로 비정규직을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엄마들 모이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 비정규직 늘리는 법 개정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모두가 공분했습니다. 모두가 그 법 막다가 길바닥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법만은 통과시키면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늙은 우리가 무덤에 들고 가더라도 절대로 물려줄 수 없습니다”

방전식 씨는 말했다.

“대를 이은 가난은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인정받고, 대우받는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애미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희들은 잘 살도록 노력해라’고 말했지만, 자식들도 직장이 하나도 없잖아요. 나 마저도 여기서 해고되면,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라도 해서 두 식구 먹고 살고 있는데, 이러다 남편이나 제가 쓰러지면, 자식들한테 부담이 될 텐데. 부모한테 받은 거 하나 없이 평생 맨주먹으로 노동을 하고도 이렇게 사는 게 억울했지만, 자식 낳아 키워보니 부모 원망할 수도 없어요. 가난이 지긋지긋 하고, 억울한 게 많습니다. ‘복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갑다’고 체념합니다. 순간순간 죽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요. 왜 이렇게 사는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소망했다. 이들의 몸뚱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가난의 흔적들, 이들이 살아온 ‘개 값’ 같은 삶, 이어 지지 않기를. "우리가 무덤에 들고 가더라도 절대로 물려줄 수 없습니다”

[특별기획 : 빛나는 여성노동을 위하여]

1회: [르포] 요람에서 무덤까지 빈곤하라
2회: [기고] 불안정노동의 맥락에서 바라본 여성노동
3회: 노동이지만 노동이 아닌 것들-재생산 노동, 모성, 가족임금모델
4회: 3C노동을 아십니까?
5회: 아파도 아플 수 없는 여성들
6회: 노동운동에서도 소외된 여성노동
7회: 여성 노동운동의 전망과 과제(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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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 노점상 , 지하철 , 청소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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