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대의 정치를 따돌리다

[기획 : 촛불에 미치다] 촛불이 열어젖힌 직접민주주의

지난 5일 촛불집회에 모습을 드러낸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관광하듯 나오지 말라"는 시민들의 뭇매를 맞았다. 지난 26일에는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 시민들에 등 떠밀려 국민토성 위에 오른 채 "사진 찍으러 나왔냐"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 "당장 돌아가라"며 항의하는 군중들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갇히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일 촛불집회에 나온 음악학원 교사 한 모 씨(36세)는 "촛불집회에 나온 정치인들은 빠져나갈 여지를 갖고 있다. 우리들은 절박해서 나오지만, 자기들은 살 수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대학생 최재훈(22세) 씨는 "민주당이 촛불집회에 나오는 것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여당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것 같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깨동무를 하고 '아침이슬'을 부르고 있는 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와 의원들.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분노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뉴라이트에 그치지 않았다. 촛불 시민들은 기존의 모든 정치 세력을 거부하며 그들만의 '거리의 정치'를 만들어냈다. 의회에서 설 자리를 잃은 야당은 거리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진보정권 10년에 이 정도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나. 촛불은 어쩌면 5년 내내 계속될 지도 모른다"고 했던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말은 절반만 맞춘 셈이다.

이보다 더 무능할 수는 없다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극한으로 치닫게 된 것은 야당의 자업자득이다. 지난 4월 18일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 뒤, 17대 국회 내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136석의 의석을 갖고도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 18대 국회에서 재협상을 조건으로 등원 거부를 선언하고도 제1야당인 민주당 내 등원론은 정국 상황에 따라 냉온탕을 오갔다. 5, 6월 촛불집회가 절정을 치닫던 시기에도 민주당은 '촛불집회 참여'를 당론으로 결정짓지 못하고 좌고우면했다.

민심을 읽는 데도 어두웠다. 촛불집회 이슈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서 의료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교육 자율화, 대운하, 공영방송 장악 반대 등으로 확산되던 시기,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러나 가축법 개정마저도 온전히 관철시키지 못한 채 '개원 후 협상'으로 후퇴하고 전격 등원을 결정했다.

우상호 민주당 전 의원은 "판단 오류로 촛불집회에 전면적으로 결합할 시점을 놓쳤고, 등원 문제도 시민사회단체와 협의 하에 움직였어야 했다"고 자성하면서도 "광우병대책회의가 민주당을 적극 견인하기는커녕 밖으로 내쳤다. 경찰에 맞고 국민에 맞으며 원외 투쟁에 치중하기엔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민주당의 지지율은 게걸음을 걷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이 촛불집회에서 경찰에 짓밟히고 소화기 분말을 뒤집어쓰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어도 18일 CBS가 리얼미터에 의뢰, 발표한 18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은 20%에 머물렀다. 같은 날 서울신문-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서는 14.7%에 그쳤다. 이 여론조사에서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31.6%에 달했다.

  빗속에서 촛불을 든 민주노동당 지도부.

그나마 민주당이 장외에서 배수진을 칠 때는 촛불 정국의 흐름이 정쟁화될 수 있었지만, 국회가 정상화되면서부터는 통로가 아예 막혀버렸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이달 말 협상 타결을 목표로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여야 간 정치 게임 속에서 촛불 탄압 중단과 어청수 경찰청장 퇴진 요구 등은 공중분해됐다. 대의 정치는 잠깐의 촛불 외도를 정리하고 다시 '그들만의 리그'에서 불붙고 있다.

진보정당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촛불 정국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각각 '강달프' 강기갑 의원과 '칼라TV'로 이름을 드날리고 지지율도 평균 두 배 이상 끌어올렸으나 여전히 대안 정치세력이 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이정희 민주노동당 원내부대표는 "아직은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며 "민주노동당이 소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국민 인식이다. 정책적 능력으로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진보신당이 촛불 정국에서 진보정당으로서 고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며 "기존에 대중적 기반을 갖고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정치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대중을 따라다니기만 했다"고 지적했다. 원내 정당에 대해서도 "시민들이 2개월이 넘도록 경찰 탄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데, 원내에서 의원직 총사퇴와 같은 극한적인 전술을 쳤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촛불집회에서 시민들과 노상토론을 벌이고 있는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 [출처: 진보신당]

'거리의 정치'는 어디로

야권은 촛불의 진로에 대해 각자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개혁 세력은 민주 대 반(反)민주 전선 구축으로, 진보 세력은 급진적 이슈로 투쟁 범위를 넓혀 지지층을 끌어 모으려는 전략이다. 우상호 전 의원은 "자발적으로 촛불이 타오르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 제정당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로 저항세력을 단일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회찬 대표는 "진보정당이 촛불집회에서 쇠고기 문제 외에 비정규직 문제 등 다양한 이슈를 결합시키면서 (저항의) 본질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택은 촛불을 든 시민들의 손에 달렸다. 시민들은 '거리의 정치'를 창조하면서 기존 정치권에 심판을 내렸고, 촛불이 이어지는 한 '정당 정치'에 대해 '거리 정치'가 갖는 힘은 계속될 것이다. 정당 정치와 거리 정치의 접점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은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 데 있다.

19일 촛불집회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주부 김미현(43세)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원래 정당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그에 따라가는 입장이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주도하고 정당이 시민들을 따르는 상황이잖아요. 정치인도 한 사람의 국민이라고 생각해요. 감투를 갖고 있다고 해서 배타적으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거짓이 진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 같이 시민으로 모여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