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유럽의 여름, 뉴욕의 가을에서 전 지구적 저항으로

[월가점거운동 분석] 월가점거운동 전개과정, 의미와 전망

[편집자 주] 13일 오큐파이 국제 행동의 날 1주년을 맞아 지구적인 냄비시위가 세계를 들썩였다. 세계 30여 개 국 2백여 개 도시에서 부채와 긴축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맞서 냄비를 치며 99%의 연대를 외쳤다. 한국에서도 가계부채탕감운동이 “99%의 새로운 반격”을 말하며 금융자본 규제를 위한 다양한 시위를 예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영수(진보전략회의)씨는 오큐파이 운동의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오큐파이 운동의 형성과정과 둘러싼 쟁점을 분석하고, 이후 전망과 논의지점을 제시했다. 진보전략 창간 기획호 9월호에 실린 그의 글을 통해 지난 1년 간 세계 반자본운동에 뚜렷한 흐름을 형성한 월가점거운동을 조망해 본다.


주코티 공원(Zuccotti Park) 점거로 상징되는 월가점거운동(OWS: Occupy Wall Street)은 2011년 뉴욕의 월가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 더 나아가 전 지구적 경제위기에 맞서 투쟁하는 전세계 민중/사회운동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의 저항’이란 월가점령운동의 핵심 슬로건은 전 지구적 경제위기와 그로 인해 미국 민중들이 겪는 고통의 주범을 명확하게 적시하는 계급적 본능으로 유례없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월가점령운동은 약 2개월간의 주코티 공원 점거(9.17~11.15) 운동을 시발로, 짧은 시간에 전국적 확산(미국 내 1,000여 개 도시)과 국제적 확산(10.15 국제행동의 날)을 거의 동시적으로 이뤄냈고, 11월 오클랜드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급진화의 경로를 밟아서 진화해 갔다.

미국 전국적으로 7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대량 체포에도 불구하고,1) 월가점령운동은 연말 소강기까지 지속적으로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를 무기로 월가로 상징되는 1%의 지배권력과 뉴욕시/경찰의 공권력에 맞서 완강하게 투쟁했다.

아랍의 봄에서 유럽의 여름, 미국의 가을로 이어지는 투쟁의 물결 속에서, <타임>이 2011년 말 올해의 인물로 익명의 다중인 시위자(protesters)로 지명한 데서 드러나듯이, 월가점령운동은 비록 실질적 동원규모가 2003~04년의 반전운동이나 2006년의 이민자 대행진만큼 대규모 동원은 아니었지만, 미국정치와 사회에 훨씬 더 강력하고 포괄적인 영향을 미쳤다.


배경과 맥락

2011년 가을 월가를 주적으로 설정한 월가점거운동은 거의 지난 반세기 동안 누적된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최근의 연이은 경제위기로 인한 생존/생활의 악화현상을 매개로 폭발한 전 지구적 대공황을 기본적 배경으로 한다. 이런 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특히 파산 은행/기업에 대한 천문학적 금액의 구제금융은 곧 99퍼센트 납세자 대중의 재산의 1퍼센트 은행과 거대자본으로의 직접적 이전을 의미하며, 이에 대해 폭발한 대중의 분노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더불어 국제적으로 2011년 전반의 아랍의 봄2), 유럽의 여름3) 등 전 지구적 수준에서 경제위기와 정치적 모순에 맞선 투쟁, 국내적으로 2011년 2~5월 주정부의 예산삭감 및 노동권 박탈에 맞선 위스콘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과 점거운동(이른바 ‘위스콘신 봉기’), 더 직접적으로 뉴욕시의 예산삭감에 맞서 소규모 점거운동을 벌인 ‘블룸버그빌 운동’ 등의 투쟁은 월가점거운동의 전사라고 할 수 있다.

1) 미국발 경제위기: 연이은 경제위기와 기업범죄

월가점령운동의 직접적 배경은 2008년 이후 미국의 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생존권 악화 및 불평등 심화이다. 1%로 지칭되는 지배집단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대변했기 때문에, 월가점거운동은 그 규모보다 훨씬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2000년 신경제 버블, 2008년 리만 브라더스 파산에 이은 하우징버블과 서브프라임 위기 등 연이은 경제위기로 인한 다수 민중의 생활과 생존이 위협받았고, 신자유주의 지배 하에서 지속적으로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와 계급적 불평등이 누적되었고, 이에 대한 대중의 불만 역시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2) 2011년 주요투쟁: 아랍의 봄과 유럽의 운동, 위스콘신 봉기

월가점령운동은 무엇보다도 미국 내외의 여러 투쟁과의 교감과 영향 속에서 전개됐다. 운동의 최초 제안자 중의 하나인 <애드버스터스>는 이집트혁명 시 타흐리르 광장점거에서 영감을 받았고, 역시 아랍혁명에 영향을 받았던 에스파냐의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 운동의 폭발적 전개도 월가점거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국내적으로는 월가점거운동은 위스콘신 주지사 조지 워커의 주정부 예산삭감 법안에 반대하는 위스콘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4) 뉴욕시장 블룸버그의 예산삭감에 맞섰던 블룸버그빌 운동(Bloombergville Movement)5)에 시간적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3) 미국 운동사적 맥락: 구좌파와 신좌파를 넘어

20세기에 미국 운동의 고양은 구좌파가 주도한 1930~40년대(공산당CPUSA의 약진과 새로운 산별노조운동 CIO)과 50년대 흑인민권운동에서 출발하여 1968~70년에 정점에 이른 1960년대 신좌파운동에서 역사적으로 구현된 바 있으며 월가점거운동은 새로운 정점을 가져올 잠재력을 갖는다.

더불어 1999년 시애틀 전투를 기화로 한 2000년대 반세계화운동,6) 9/11 이후 2003~04년의 반전운동, 2006년 5월 1일 정점에 이르렀던 이주민 투쟁 등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에서 터져나온 최근의 주요한 대중투쟁과 직접 맥을 닿고 있으며, 특히 운동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으로서 반세계화/대항세계화운동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7)

점거운동의 전개과정과 주요한 양상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타흐리르 광장을 재현하고 싶은가
9월 17일 맨해튼 남쪽으로 달려가서 텐트를 치고 식당을 만들고
평화의 바리케이드를 쳐서 월스트리트를 점거하자!
- <애드버스터스> 7월 13일



1) 월가점거운동의 전개과정

월가점거운동은 9월 17일 주코티 공원의 점거에서 11월 15일 경찰의 강제철거까지의 국면과 그 이후의 국면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주코티 공원 점거시기는 1) 9월의 형성국면, 2) 9월말 ~ 10월초의 확산국면, 3)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까지의 대치국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포스트 주코티 공원 시기는 11월 말의 저항국면과 12월 이후의 소강기로 나누어진다.8)

지리적으로 점거운동은 전국적으로 모든 주요 대도시만이 아니라, 중소도시 등 미국 내에서만 1,000여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또한 당초 에스파냐의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의 제안으로 잡혔던 10월 15일 전 지구적 행동의 날(Global Day of Action)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날 전 지구상에서 82개국 951개 도시에서 동시적 행동이 벌어졌고, 이 날의 투쟁은 이미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월가점거운동의 기치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투쟁의 양상과 확산의 측면에서 뉴욕이 전국적 상징이자 동부해안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면 11월 2일 46년 만에 지역 총파업과 항만봉쇄를 성사시킨 오클랜드의 점거운동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잇는 서부 해안 점거운동의 상징이자 중심이었다. 미국의 점거운동은 월가가 위치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동서해안의 양대 도시의 캠프를 중심으로 전국의 주요도시는 물론 대부분의 중소도시, 심지어 투쟁이나 시위가 거의 없었던 시골마을까지 1천여 곳에서 캠프가 설치됐다.

△ 발단: <애드버스터스>(Adbusters)의 제안9)

2011년 7월 13일, 캐나다 밴쿠버의 반소비주의 잡지인 <애드버스터스>에 월가점거를 제안하는 글이 실렸고, 그에 따라 뉴욕의 활동가들이 8월초부터 9월까지 두어 차례 총회를 열어 9월 17일 행동에 대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총회에서는 급식, 학생, 홍보, 인터넷 활동, 문화예술, 전술 등의 위원회가 구성되어 9월 17일을 준비했다.

특히 전술위원회는 9월 17일 시위의 성사와 총회를 열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는데 당초 체이스 맨해튼 플라자가 유력했지만 당일 경찰의 바리케이드 봉쇄로 진입이 불가능해지자 후보지 중에서 주코티 공원을 선정하여 그날 오후 3시 총회를 열고 점거에 들어갔다.

△ 주코티 코뮌의 형성과 월가점거운동의 정형화

9월 17일 오후 3시에 시작된 총회가 밤늦게 끝나고, 뚜렷한 계획없이 200~300명의 텐트노숙으로 시작된 점거운동은 1주일을 경과하면서 구조화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7시에 열리는 총회를 중심으로, 대외적으로 가두투쟁의 일정, 대내적으로 텐트촌 운영을 위한 자발적인 내부조직화(의료, 민중도서관, 식당 등)가 이뤄지면서, 2천여 명의 상주자를 수용하는 주코티 코뮌이 모습을 갖추었다.

점거 시작 1주일인 9월 24일(토) 뉴욕경찰(NYPD) 부경정 앤서니 볼로냐의 여성시위대 최루액 난사사건이 발생하는데, 유니온 스퀘어에서 뉴욕경찰의 게릴라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대량체포(80명)는 월가점령운동을 전국적으로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 투쟁을 통해 월가점거운동의 열성적 핵심 활동가층이 형성되고, 주코티 코뮌은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 브루클린 다리 대량체포 사건 역시 점거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뉴욕경찰은 인도용 다리가 막히자 차량용 다리로 진출한 700명을 전격 체포했다. 경찰의 무차별적 과잉대응에 대한 분노는 점거운동을 대내외적으로 공고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했다.

△ 연대의 확장과 조직운동과의 결합

10월 5일 폴리 스퀘어 노학연대 집회는 학생과 노동조합이 조직적으로 결합한 연대투쟁이었다. 학생운동의 경우, 학자금 대출로 인한 부채누적, 예산삭감, 등록금 인상, 민영화 등 학생들이 당면한 문제를 들고 월가점거운동에 결합하였고, 이 투쟁의 성과로 뉴욕시 학생총회(NYC All-Student Assembly)를 결성했다.

노동조합의 경우, 주로 뉴욕에 소재한 교원노조(UFT), 서비스노조(SEIU), 운송노조(TWU) 등의 지부들이 월가점거운동을 지지했다. 이런 월가점거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연대는 소더비 경매사 소속 팀스터 노조 814지부의 투쟁과 연대(소더비 잠입투쟁, 경매 방해, 11/9 소더비 앞 피케팅으로 조합원과 학생 200여명 연행당함)에서 가시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노총(AFL-CIO)의 집행위원회도 월가점거운동을 지지했고, 캠프촌 내 노동활동그룹(Labor Work Group)이 결성되어, 여기에 40개 노조 소속 100명의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노동조합과 월가점령운동의 매개고리의 역할을 했다.

△ 1차 대치 : 10월 14일 1차 퇴거시도

10월 14일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의 전격적인 주코티 공원 방문 이후, 뉴욕경찰은 고압세척을 핑계로 텐트촌의 퇴거를 요구했다. 이에 점거운동진영은 온-오프 라인에서 공원이 이른바 공중위생에서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철야 청소를 조직하여 대응했다. 그 결과 뉴욕시와 경찰의 1차 퇴거시도는 실패했다.

△ 10월 15일 국제공동행동: 국제적 확산

원래 에스파냐의 M-15운동이 제안한 국제 공동투쟁의 날이었던 10월 15일은 미국 중심부에서 월가점거운동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급속한 확산국면에 들어갔다. 에스파냐와 그리스를 주축으로 하는 유럽적 투쟁의 차원을 넘어서, 유럽의 여름과 월가의 가을을 연결하는 축으로 확장하면서, 이 날의 국제공동 행동에 82개 나라 951개 도시에서 다양한 규모의 시위와 행진이 벌어졌다.10)

미국의 경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많은 도시에서 동시적으로 투쟁이 전개된 반면, 유럽의 여름을 이끌었던 포르투갈의 리스본,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이탈리아의 로마 등 주요 도시에서는 수십만 명의 대중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전개됐다.

전체적 규모를 정확히 집계하기는 힘들지만 2002년 2월 15일 이라크 전쟁반대 행동의 날에 비견되는 숫자의 도시에서 투쟁이 벌어졌다. 이는 전 지구적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1퍼센트와 99퍼센트라는 계급적 의제를 매개로 한 국제적 공동투쟁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15_October_2011_global_protests]

△ 11월 2일 오클랜드 지역총파업

10월에 들어 점거운동이 전국적 현상이 되면서, 주요 대도시의 시당국과 경찰은 상호 공조 아래 점거촌의 철거-해산을 적극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특히 10월 25일 서부해안의 중심인 오클랜드 점거운동(Occupy Oakland)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공격이 감행됐고, 이 과정에서 이라크참전 제대군인 스콧 올슨이 경찰 최루탄에 치명적 부상을 당했다.

이같은 경찰폭력에 대응하여 오클랜드 점거운동은 총회를 통해 11월 2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오클랜드 시 역사상 46년 만에 벌어진 지역 총파업에 점거운동 활동가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분규 중인 항만노조의 조합원들과 결합하여 오후 한때 항만봉쇄에 성공하기도 했다.

오클랜드 지역총파업은 10월 5일 뉴욕의 노학연대투쟁의 서부 해안 버전이며, 그 전투성과 급진성에서는 월가점거운동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 뉴욕의 월가점거운동이 부문의 측면에서 학생운동 및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공간적 측면에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운동과의 결합을 시도했고, 오클랜드 지역총파업은 그 규모는 다소 제한적이었음에도 월가점거운동의 확장된 외연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현실로 전화시킨 중요한 사례이다.

△ 11월 15일 주코티 공원 퇴거

10월의 1차 퇴거시도에 실해한 뉴욕시와 경찰은 이후 치밀한 준비를 통해 11월 15일 자정을 기해 전격적인 퇴거작전을 감행했고 점거운동 활동가들의 비폭력 저항에도 불구하고 물리력을 앞세워 새벽까지 텐트촌을 완전히 철거했다.

△ 11월 17일 주코티 공원 퇴거 이후의 국면: 기지없는 점거운동의 딜레마

월가 60번지의 아스트룸이 주코티 코뮌의 제2기지로서 다양한 작업그룹에 속한 많은 활동가들의 회의 공간이었지만, 제1기지로서의 주코티 공원의 퇴거는 월가 점거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일부 교회에서 점거자를 위한 숙소를 제공하긴 했지만, 주코티 코뮌 활동가들을 수용할 텐트촌의 대체공간은 확보되지 않았다. 또한 더욱 심해지는 뉴욕의 겨울날씨 속에서 안정적인 기지 없는 점거운동은 그 동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2012년 1월 법원의 판결로 공원출입 봉쇄가 해제되자 주간 동안 공원에 상주하면서 활동을 일부 수행할 수 있었지만, 야간에는 공원에서 물러나야 했고, 몇 차례의 재점거 시도는 압도적 경찰력에 막혀 실패했다.

2012년 3월 점거운동 6개월 기념일에 맞춰 주코티 공원의 재점거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다시 한번 실패했다. 또한 5월 1일 메이데이에 맞서 점거운동을 재활성화하려는 호소와 시도가 있었지만, 조직 노동운동의 동원력 부재로 인해 관습적인 노동절 집회 및 행진을 넘어 월가점거운동 시즌 II의 가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2) 쇠퇴의 원인

탄생이후 거의 1년이 다 되가는 현시점에서 물론 월가점거운동이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2011년 11월 15일 주코티 공원 퇴거와 그로 인한 물리적 점거기반의 상실 이후, OWS의 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2012년 상반기 OWS를 소생시키려는 일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투쟁/운동으로서 OWS의 쇠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쇠퇴의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주체적 요인과 객관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객관적 요인의 핵심은 경찰/공권력의 지속적인 물리적 공격이다. 악명 높은 뉴욕과 오클랜드경찰을 비롯해 미국의 공권력은 온갖 법적 제한조치와 탈법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 점거운동의 상징이자 투쟁의 기지인 캠프촌을 공격했고, 합법적인 시위행위도 그것이 폭발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가차없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11) 9월 24일 최루가스 난사사건과 10월 5일 브루클린다리 대량체포 사건 등 과도한 폭력이 의도와는 달리 OWS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한 면도 적지 않지만, 공원을 둘러싼 바리케이드, 압도적인 경찰력 배치12) 등 궁극적으로 경찰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진압전술에 맞서 OWS는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요인은 언론의 지속적 공세였다. 운동 초기에 무시와 외면으로 일관하다가 경찰폭력과 OWS의 폭발적 확산이 이뤄지자 보도를 확대했지만, OWS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OWS에 대한 왜곡보도, 특히 11월 이후 주코티 캠프 내의 일부 사건들, 비점거시의 수준보다 훨씬 경미한 사건들을 확대, 과장하여 주코티 캠프를 무질서와 폭력, 강간과 마약의 소굴로 이미지 메이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OWS 저널과 소셜미디어 등 자체의 대항언론을 갖추었음에도 제도언론의 대대적 물량 공세 앞에 OWS는 취약했고, 이른바 OWS의 대변인들 또는 언론미디어 담당 활동가들의 과잉 미디어 민감도는 OWS의 행동반경을 제한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체적 측면에서는 물리적 공간을 상실한 상태에서 주변의 아트리움, 일부 교회가 제공한 공간 등 물리적 공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운동과 투쟁의 지속을 담보한 물리적, 공간적 기지가 되지는 못했다. 일반적으로 웹상의 버추얼 운동이 갖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론상 소셜미디어나 웹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주코티 캠프의 직접민주주의를 지속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는 이론적 가능성일 뿐, 이를 물리적 공간의 부재와 외부로부터 공세 속에서 지속가능한 현실적 모델은 되지 못했다.

또 하나 지적되어야 할 것은 과연 총회모델의 시공간적 지속가능성 문제이다. 11월을 경과하면서 총회모델에 대한 의문이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합의모델의 효율성 문제를 지적했고, 지리한 토론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탈한 결과 궁극적 합의는 사실상 잔존한 소수의 결정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경찰의 퇴거작전이 진행되는 급박한 전술적 대응이 필요한 순간에는 총회는 존재의미를 상실했다.


주요한 특징과 조직구조

먼저 주코티 공원이 해방구가 된 근본적 이유는 20세기 운동사에서 전통적 주력이었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절대적, 상대적 취약성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공장점거, 대학점거가 과거의 역사인 미국 운동지형에서 물리적 공간의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웹상에서 의사소통에 기반한 개별 활동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공원, 광장 등과 같은 공적 공간(public space)이다.

사적으로 소유되는 공간의 점거가 점거자의 사법적, 경제적 파산으로 직결되는 미국의 사법체제 하에서, 공적 공간으로서 주코티 공원13)의 점거는 전술적 판단에 의한 선택의 우연적 측면 외에도 대중의 불만과 행동, 가두진출을 담보할 가시적 공간으로서 불가피한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1) 주요한 특징

월가점거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가두시위와 집회를 중심으로 한 직접행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지로서 점거코뮌의 조직과 운영의 양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점거운동은 투쟁과 조직의 구조를 공고화하면서, 최소한 3개월 이상 월가로 상징되는 1퍼센트의 지배블록에 대한 저항을 지속할 수 있었다.

월가점거운동의 기본적 특징은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문제를 전면에서 내걸어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를 사회적-계급적 이슈를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기생적 금융자본에 대한 비판을 대중적 행동으로 전화시켰다. 그 동안 월가와 금융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비판은 많았지만, NGO들의 비판이나 단일 이슈 캠페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월가점거운동은 그 문제를 대중투쟁의 의제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고, 문제는 현재의 막연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어떻게 더 진전시킬 것인가였다.

다음으로 공적 공간의 점거를 통해 투쟁의 지속성을 담보했다는 점이다. 시위대가 상징적 행동을 통해 월가를 압박했더라도 1회적 투쟁이나 짧은 시간의 점거에 머물렀다면 월가점거운동의 영향력은 일시적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주코티 공원을 포함한 점거와 텐트코뮌의 형성을 통해 투쟁의 물리적 기지를 확보하면서 보다 조직적 토대 위에서 지속적 투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점거운동 성공의 열쇠였다.

점거운동은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 즉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코뮌의 운영에서 직접참여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양 측면에서 민주주의 문제를 확장하고 내면화했다. 주코티 공원의 총회민주주의가 미래의 대안이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가는 논쟁의 사안이지만, 참여, 연대와 자율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를 투쟁의 조직적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은 점거운동의 부정할 수 없는 자산이며 이후 모든 운동과 투쟁은 이 주제를 피해갈 수 없다.

더불어 동원과 조직의 기제로 작동은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역할은 이번 투쟁의 중심적 기제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등 온라인 소셜네트워크가 물리적 공간의 오프라인 소셜네트워크로 결합되었다는 사실이다. 매일 열리는 총회는 웹상에서 생중계되었고, 물리적 총회참여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지속적 토론과 동원을 통해 OWS와 결합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제공했다.

2) 조직과 구조 - 주코티 해방구 텐트촌의 운영

월가에 대한 저항의 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 외에 구체적 계획을 없었던 초동 주체들이 일단 점거가 시작했고, 텐트코뮌으로 저항의 물리적 토대가 구성되자 점거운동은 놀라운 자기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총회를 통해 코뮌의 유지와 투쟁에 필요한 다양한 자발적 조직들이 작업그룹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그 결과 10월 중순에 이르면 주코티 코뮌은 주중에 1,500명, 주말에 3,000명의 식사를 제공하고, 3100㎡(약 940평)의 공원을 꽉 메울 정도의 수백개 텐트가 들어차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와 같은 자율적/자주적 조직화의 경험은 대부분의 주체에게 새로운 것이고, 미국운동사에서 유례없는 성과였다.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세워진 다양한 코뮌/공동체의 역사 이후, 20세기 후반 신좌파운동 시기의 히피코뮌 이후, 주코티 공원 점거를 통해 투쟁의 코뮌이 다시 미국 사회에, 아니 제국의 중심부에 다시 등장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총회와 바퀴살 평의회

OWC의 상징이 뉴욕이라면, 그 중추는 주코티 코뮌이고 코뮌의 핵심은 바로 9월 17일부터 시작된 총회(General Assembly)다. 총회는 OWC와 관련된 모든 이슈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기관으로서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를 체현했다.

매일 오후 7시에 시작되는 총회는 모든 참여자에게 열린 공간이며 다양한 작업그룹의 활동이 보고되고 공유되는 자리이자 OWC의 계획과 활동에 관한 결정이 합의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특히 뉴욕경찰의 음향시설 사용금지로 앰프를 사용할 수 없어서 사용된 수단인 인간 마이크(human mic)14)는 총회의 핵심적 특징이었고, 총회를 통한 의사소통과 결정의 매개를 상징한다. 더불어 회의의 효율성을 위해 채택된 장치들, 수신호와 다양한 창의적 회의진행 규칙 등은 불특정 다수 간의 의사소통 양식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점거운동이 2개월을 넘기면서 총회에 대한 초기의 관심과 활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작업그룹들의 모든 활동을 총괄할 수 없게 되자, 10월 중순 이후 작업그룹의 수평적 대표체로서 바퀴살 평의회(Spokes Council)가 제안되어 운영되었다. 그 결과 총회와 바퀴살 평의회의 이원구조가 출현하면서 총회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위계적이고 비관료적인 상설적 조직/기관으로서 총회는 유의미한 시도였고 기존의 운동이 관성적으로 수용한 대의제 체계를 넘는 상상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해결책은 아니라도 미래 운동의 조직형태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 다양한 작업그룹(Working Groups)

총회와 더불어 OWC를 특징짓는 것은 다양한 작업그룹들이었다. 점거초기 활동의 필요와 코뮌의 일상유지를 위해 결성된 홍보, 교육, 언론, 조정, 안전 등의 작업그룹은 총회의 하부구조로서 주코티 코뮌과 OWC의 실천조직이었다.

그러나 OWC가 확장되고 텐트촌이 양적으로 확대되자 숫적으로 다양한 작업그룹들이 등장했다. 초기에 코뮌의 운영에 필수적인 식당, 치안, 의료지원, 쓰레기 및 재활용 등 작업그룹에서 시작하여 학생과 노동 등 부문 그룹이나 유아, 감옥연대, 문화활동, 명상 등 주제별 그룹들이 등장했고, 초기에 10여개의 실무적 작업그룹 중심의 활동이 11월에 이르면 홍보, 교육, 언론, 문화예술, 조정, 외국어, 이민자권리, 안전, 유아, 감옥연대, 경찰폭력, 노동, 학생, 예산, 인터넷 활동 등 100여개 이상의 작업그룹들의 자율적 활동으로 확대됐다.

물론 이것은 OWC에서 최대 규모를 갖춘 뉴욕의 사례이지만 일정 규모에 이른 다른 도시의 점거운동에서도 점거촌의 규모에 비례하여 재현됐다.

△ 주요한 기구들

활동그룹임과 동시에 보다 항구적인 구조를 갖는 기구들이 등장했는데 식당과 도서관이 대표적 사례이다. 주중 1,500명, 주말 3,000명분의 저녁식사를 제공한 식당의 조직과 운영은 OWC의 조직적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4천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게 된 민중 도서관 역시 주코티 코뮌이 일시적 주거연합이 아니라 항상적 열린 공동체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실체임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경찰폭력의 피해와 노숙점거로 인한 위생과 건강 문제로부터 점거활동가들을 보살핀 의료센터, 시민불복종투쟁으로 체포된 활동가들을 법적으로 보호한 법률지원센터, OWC의 활동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미디어 센터 등 역시 OWC의 지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구들이었다.

△ OWC와 지역사회운동

OWC는 10월 5일 노학 연대투쟁처럼 사회의 다양한 부분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지역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로 유색인종이 거주하는 슬럼가의 도시빈민운동에 연대하였고, 그 결과 지역점거운동(Occupy the Hood) 등의 급진적 지역운동 흐름이 형성되었다.

11월 2일 오클랜드 총파업 역시 지역적 확장의 사례이며 점거코뮌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적 탄압에 대한 지역운동 전체의 공동대응으로서 성격을 가졌다. 그리고 규모는 지역 총파업의 수준에 이를 만큼 지역 노동자들의 동원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지역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점거운동의 지역적 확장의 가능성을 확인한 중요한 사례이자 OWC의 급진화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OWC의 지역운동화는 2001-2002년 아르헨티나 위기 시에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출현했던 동네 총회(barrio assembly)나 에스파냐의 지역총회운동에 비해 제한적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도시빈민운동이 하나의 부문으로서 OWC와 연대했고, OWC 역시 지역화를 시도했지만, 구체적 성과를 낼 정도로 전진하진 못했다.

△ 주코티 코뮌의 이면

주코티 점거캠프는 단일한 실체는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초기의 낙관적 희망을 넘어 규모가 확대되고 다양한 성향의 개별 활동가들이 결합하면서 캠프 자체는 작은 소우주로서 정치적으로, 계급적으로 사회와 운동을 반영했다.

이른바 공원 내 동서의 분열이 그런 경우인데 총회와 식당, 도서관, 미디어 센터 등 좀 더 항구적 기구들이 동쪽에 위치한 반면 텐트와 보다 이른바 강성의 정치적 집단들이 서쪽에 위치했다. 또한 활동성향 측면에서 개혁성향의 중산층 활동가들이 동쪽에 거주한 반면 노동자계급의 강성 정치운동가(?)들(대표적으로 무정부주의 경향의 <계급전쟁> 텐트)은 서쪽에 위치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의 차이는 일종의 계급과 인종, 성을 가르는 구분선이 되기도 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의 집단 간의 갈등이 발행했고,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자 그 규모에 비해 비점거 시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임에도 언론의 비방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소수의 폭력, 성폭행 등의 문제는 발생했고, OWC의 주류 활동가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고, 비록 합의의 형식을 갖추긴 했지만, OWC의 활동에 대한 제약은 많은 활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더불어, 인종과 성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초기에 상대적으로 백인 남성 활동가 중심의 총회운영에 대한 비판에 제기되었고, 중반 이후 흑인과 여성의 참여가 보다 조직적으로 장려되고 다양한 소수자의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총회의 의제와 지향은 더욱 풍부해지고 다양해졌다.

3) 이데올로기와 지향 - 주요 문서 분석을 중심으로

월가점거운동은 이례적으로 운동의 성격과 지향을 규정하는 몇 가지 문서를 채택했다.15) 특히 9월말 뉴욕총회가 채택한 <뉴욕시 점거선언>은 신좌파의 강령적 문서로 간주되는 <포트휴런 선언>(Port Huron Statement)16)에 비견되며, 이후에 채택된 <연대의 원칙>(Principles of Solidarity)과 <자율선언>(Statement of Autonomy) 등은 보완문서의 성격을 갖는다.

<점거선언>은 크게 현 상황에 대한 인식과 행동의 촉구로 구성되며 월가점거운동 참여주체들의 상황인식과 지향을 집약하고 있다. 그 자체로는 현재 다양한 운동의 문건들과 크게 차별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점거운동 주체들의 합의수준과 지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이 강령적 문서들은 민주주의와 연대, 자율로 집약되는 OWC의 기본적 가치를 기술하고 있으며 특히 <자율선언>은 OWC의 독자성 및 다른 운동과의 개방적 관계를 구체화하고 있다.

더불어 OWC가 일정한 틀을 갖추게 된 9월말 이후 발간된 뉴욕 OWC의 신문은 <월가점거신문)(Occupied Wall Street Journal), 유사한 맥락에서 참여자들이 발간한 <월가점거 신문>(Occupy Wall Street Gazette) 역시 OWC의 성격과 지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저널들은 아랍의 봄이나 유럽의 점거운동과의 유기적 연대를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점거운동의 일상과 구체적 투쟁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저널들은 OWC의 공식문서와 함께 OWC의 정체성 형성과 진화를 담아내는 데 일정할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투쟁의 초기에 한편에서 OWC는 극우파 풀뿌리운동인 티파티(Tea Party) 운동과 비교되기도 했다. 또한 일부 티파티 활동가들이 OWC에 개별적으로 개입하기도 했지만 자생적 투쟁력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에 적응할 수 없었고 티파티와의 연관은 사실상 무화됐다. 외형상 풀뿌리 운동으로서의 공통점이 보이긴 하지만, 공화당계 억만장자들의 노골적인 재정적 지지에 의존한 티파티의 구조적 한계와 공화당 외부에 존재하지만 공화당에 긴박된 티파티 운동은 민주당과 명확한 차별성을 강조한 OWC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4) 다른 운동과의 관계: 68운동, 반세계화운동 등

월가점거운동은 거시적으로는 68운동과 반세계화/반전운동, 미시적으로 미국의 위스콘신투쟁, 아랍의 봄 투쟁, 에스파냐와 그리스의 시민투쟁 등 2011년의 국제적 투쟁에 맥을 같이 하고 있다.

OWC는 기본적으로 68 신좌파운동의 급진성을 견지하며 68세대가 구좌파운동에 대비하면서 제기한 반관료주의, 반권위주의, 직접/참여민주주의를 재현했으며 강력한 비제도/반제도적 지향성을 보여줬다. 그런 의미에서 OWC를 68혁명/운동의 연장 속에서 맥락지울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까지 이어진 반세계화운동과도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반세계화운동/반전운동의 동원이 없었다면 대규모 전국적 동시투쟁의 재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연관성의 맥락에서, OWC는 기성 운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열린 대화 추구했다. 특히 비제도적 정치좌파 또는 무정부주의 세력들에 대해 OWC의 이름 아래 암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낸 공개적 활동을 촉구하여 열린 관계를 모색했고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운동의 운동” 가능성을 실현했다. 더불어 최근 다소 퇴조국면에 있는 세계사회포럼 운동과의 연대도 추진했다.


OWC의 의미와 쟁점

월가점거운동의 갑작스런 등장과 확산에 당황한 언론은 대부분 운동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기존의 다른 운동과의 차별성을 정서적으로 수용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초기 국면에서 OWC에 대해 요구 없는 운동, 지향이 불분명한 운동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1퍼센트와 월가에 대한 강력한 지목으로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에도 직면해야 했다. 더불어 하나의 명확한 요구로 1개월간 점거하자는 <애드버스터스>의 제안과 달리, 모든 요구가 제기되면서 OWC의 요구와 지향에 대한 혼동은 일정 정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OWC는 심지어 제안자나 초동 참여주체들도 예상하지 못한 범위와 수준에서 전개됨으로써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이론, 특정한 정치적 경향이나 조직이 독점할 수 없는 유기적 실체로서 독자적 메카니즘을 형성하여 발전했다. 따라서 그 의미와 성격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일종의 열린 딜레마로서 실천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해결해 나가야 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 OWC의 의의

OWC의 의의와 의미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다. 먼저 미국사회와 운동의 측면과 국제적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고 또한 투쟁의 과정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제와 전술의 측면에서도 검토할 수 있다.

먼저, 미국사회와 운동에 대한 의의는 1% 대 99%의 슬로건을 통해 30년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계급의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며, ‘우리가 99%’라는 인식을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계함으로써 현재 미국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미래의 지형을 계급적으로 표현했다. 더불어 그 99%는 투쟁을 통해 계급적-사회적 연대를 구현했고 노동자, 학생, 교수, 실업자, 홈리스의 만남이 이뤄졌고 인종, 민족, 종교, 언어, 문화를 넘은 연대가 실현했다.

다음으로, OWC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이래 최대의 좌파적 대중운동으로서 등장했고 새로운 좌파적 대중운동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했다. 그 잠재력은 향후 OWC과 기존 좌파/사회/민중운동의 대화와 상호작용은 과제로 남지만 현재의 정치/운동지형의 변화를 강제할 것이다.

OWC는 본질적으로 미국 문제에 대한 미국적 운동이지만 강력한 국제적 반향을 가져왔고 따라서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2001년 아랍의 봄과 유럽의 여름을 확장하여 OWC를 일국적 운동을 넘어 전 지구적 저항운동으로 정립시켰고 구조적 대공황 시기에 자본과 국가의 공세에 맞선 저항과 투쟁, 운동의 형태를 보편화했다.

의제적 측면에서는 비록 확고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체계화 또는 내면화하지 못했지만 월가를 지목함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에 대해 전면적인 문제제기를 시각화했다. 더불어 99%를 배제하고 독점금융자본을 옹호하는 미국정치의 모순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OWC는 점거코뮌을 통해 ‘민주주의란 이런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계급지배의 껍데기로 변질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대중의 배제에 기반한 형식적 민주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했고 그 대신에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했다. OWC의 상징인 총회, 담당자의 순번제, 공개토론, 합의제 의사결정 등 직접행동/투쟁과 결합된 직접민주주의는 대공황으로 파산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체제의 대안으로서 미래사회를 여는 열쇠임을 보여줬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는 직접행동과 투쟁을 조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 결과 OWC는 거리와 광장의 운동이자 소셜미디어의 버추얼 운동의 양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소셜미디어의 역할을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현실운동의 한 구성부문으로 소통과 연대의 매개체로서의 부정할 수 없는 역할을 확인했다.

△ OWS의 성격과 지향을 둘러싼 두 가지 해석

기본적으로 월가점거운동은 직접행동(direct action)과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를 핵심적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자율주의적/무정부주의적 영향력이 강한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코티 점거에 참가한 이른바 강성 무정부주의(또는 정통 무정부주의: 대표적으로 ‘계급전쟁(Class War)’ 그룹은 주코티 공원 서부의 중산층 활동가들과 많은 측면에서 대립하면서 비판했지만 그들의 OWC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이나 기여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OWC는 넓은 의미의 연성 무정부주의/자율주의의 감성과 논리가 경향적으로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68혁명에 뿌리는 두는 비종파적 신좌파의 경우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를 이른바 68혁명/운동의 전통으로서 공유하기 때문에 맑스주의 대 무정부주의의 대립/경쟁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구체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에 취약하다.

오히려 OWC는 과거 조직민주주의를 둘러싼 자율주의적/무정부주의와 조직좌파/맑스주의 간의논쟁 즉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 문제를 단지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실천과 투쟁, 코뮌조직화 및 운영의 전 과정을 통해 실천적으로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지도력도 총회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의 과정을 우회하여 수립될 수 없음이 증명됐다.

다만 제도정치의 개입에 대한 우려로 인해 관료적/위계적 지도력을 거부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합의제나 책임윤번제 등 직접민주주의 기제의 이면에서 구성되는 행정적 실무지도력이 정치적 지도력으로 전화되는 현상에 대한 대안부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과제로 남는다. 이 문제는 자율주의/무정부주의의 본원적 딜레마이기 때문에 OWC의 직접민주주의가 제도 밖의 반체제운동을 넘어 제도로 진입하는 시점에 불가피하게 극복해야 할 과제로 제기될 것이지만 아직 진화의 초기단계인 OWC 운동에서 완결된 정답이나 대안이 제출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OWC는 강력한 현실운동임과 동시에 유토피아적 요소로 활동가군을 형성했고 뚜렷한 이데올로기적 지향이 없는 이데올로기적 공백 속에서 무정부주의의 일정한 영향 아래 좌파적 포퓰리즘의 정치적 현상으로 해석할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진 않으며 반자본주의적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음에도 주체나 의제의 측면에서 강력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가졌다.

따라서 좌파/맑스주의적 운동에서 제기하는 반자본주의/사회주의적 지향 강화,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결합, 구체적인 정치적 전략의 정식화 등의 과제는 여전히 진화하는 OWC가 투쟁과 실천을 통해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기된다.

△ 월가점거운동와 촛불항쟁, 인디그나도스 운동

OWC는 스스로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점거로 상징되는 아랍의 봄이나 에스파냐의 인디그나도스 운동으로 상징되는 유럽의 여름과 직접적으로 동일화하며 직접행동과 점거, 소셜미디어의 활용, 직접민주주의의 강조 등 많은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줬다.

OWC는 2008년 한국의 촛불항쟁과도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다. 두 운동 간의 배경의 차이, 운동지형의 차이 등으로 인해, 규모나 파급력 등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지만 강력하고 지속적인 투쟁력이나 기존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창조적 실천과 투쟁 등은 두 운동이 공유하는 자산이다.

그러나 촛불의 민주주의는 반MB로 한정되는 협소한 자유주의적 한계에 갇혀 있었고 미친소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및 자본주의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반자본주의적 확장은 부재했다. 더불어 대책위로 표현되는 운동관료주의는 촛불의 잠재력을 가두는 장치였던 점에서 OWC와의 중대한 차이가 있었고 국제주의적 관점과 연대보다는 민족주의에 갇힌 투쟁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잠정적 평가에 기초한 성과와 한계, 그리고 전망

기본적으로 월가점거운동은 99% 계급의 적인 월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비폭력 직접행동과 그 투쟁의 기지이자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코뮌으로서의 해방구의 실현을 결합시켰다. 민중의 적에 대한 직접적 비폭력적 공격과 민중적 대안공동체 운동이 결합한 상징성을 매개로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했고 1퍼센트와 99퍼센트 즉 계급의 문제를 전국적 의제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통해 제도좌파와 노동조합운동 등 대중운동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20세기 신구좌파의 구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중적 좌파운동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역량과 잠재력을 갖는 대중투쟁과 대중운동의 성장은 보수적 양당 제도를 넘는 정치적 변혁을 강제할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공포 속에서 강력한 정치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정치화되거나 구조화/조직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계급적 분노를 체제의 근본적 변혁으로 전환시킬 충분한 지도력이 없었고, 경찰력을 포함한 국가폭력에 맞서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조직이 없었고, 즉자적 계급본능과 분노를 넘어 충분히 강력한 급진적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없었다. 주되게 체제에 대한 도덕적 거부와 대안적 사회의 가능성의 확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월가점거운동 자체만으로 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20세기 미국 운동사에서 1930~40년대와 1960~70년대 각각 신구좌파의 급진화를 경험했음에도 대중적 좌파운동이나 급진적 노동운동을 구축하지 못한 역사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비판했지만 유의미한 제3의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분산되어 있는 혁명적 좌파 역시 분열과 파편화로 기존의 급진적 운동과 새로 등장한 급진적 운동의 유기적 결합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20세기식 무정부주의 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논쟁을 재생산한 주코티 코뮌의 내부지형은 미국운동의 정치적 빈곤을 보여준다.

월가점거운동은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한국의 촛불항쟁이나 에스파냐와 그리스의 분노파 운동처럼 물리적 공간에서 배제된 웹 상의 존속 외에 점거운동의 신기루적 소멸의 운명을 공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가점령운동이 이룩한 성과는 다음 단계 즉 현재로선 그 등장시기와 구체적 형태를 예단할 수 없지만 체제의 모순이 불가피하게 재생산할 월가점령운동 시즌 II로 이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20세기 좌파(20세기 후반의 신좌파)와 월가점령운동 세대의 신좌파의 유기적 결합 및 이의 대중운동화의 과제는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월가점거운동은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경제대공황과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의 균열이며 동시에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효과적 저항과 대안정립에 실패한 기존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또한 운동사의 측면에서는 극단의 세기로서 단기 20세기를 지배한 좌파운동(공산주의/사민주의 등 주류 제도좌파)의 해체와 무기력을 넘어서려 했던 68세대 신좌파 등 비주류/비제도 좌파운동의 연장선 속에서 새로운 기획과 새로운 주체형성의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월가점거운동을 매개로 제기되는 좌파운동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으로서 점거운동과의 유기적 결합이며 더불어 지도력, 조직력, 명확한 이데올로기를 개발-공유해야 하는 것이며, 이미 만들어진 기성의 이데올로기이나 위계적-비민주적 지도력, 오도된 집중주의적 조직의 훈계가 아니다. 적지 않은 좌파 활동가들이 OWC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운동으로서 또는 조직으로서 좌파의 대응은 미온적이었고 노동운동과의 결합이나 지역투쟁으로의 확장에서 이들의 역할은 주요한 것이었지만 OWC 자체에 대한 분석이나 실천적 발전에 대한 기여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월가점거운동의 핵심은 99%의 계급성이다. OWC는 2011년 가을투쟁을 통해 21세기의 계급문제를 의제화했고, 현재의 위기구조가 해소되지 않는 한 OWC의 시리즈는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OWC의 향후 과제는 맑스의 옛날 표현을 빌자면 OWC의 즉자적 계급성을 대자적 계급성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 주

1) 2011년 9월부터 2012년 7월까지 177개 도시에서 7,361명이 체포됐다. Dan La Botz, Robert Brenner & Joel Jordan, “The Significance of Occupy,” August 9, 2012, http://www.solidarity-us.org/current/node/3663.

2) 2010년 12월 시작되어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를 퇴진시킨 튀니지혁명, 2월 15일 타흐리르 광장 점거와 대중투쟁을 시작하여 2월 11일 무바라크 30년 독재는 타도한 이집트혁명, 혁명적 민족주의로 출발했으나 신자유주의적 족벌독재로 전락한 카다피 체제에 맞선 리비아 내전 등을 중심으로 아랍지역을 휩쓴 민주/민중혁명의 물결을 가리킨다. 박석삼, “아랍혁명” 『진보전략』 준비1호, 127~200쪽을 참조하라.

3) 포르투갈의 3월 투쟁(절망한 세대(Geração à Rasca) 또는 3월 12일 운동(Movimento 12 de Março), 에스파냐의 5~6월 투쟁(분노한 사람들(indignados) 5월 15일 운동(Movimiento 15-M), 그리스의 5월 투쟁 등과 영국의 공공부문 파업 등 경제위기와 긴축, 정치권의 기만성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대중투쟁과 광정점거운동을 가리킨다. 보론 1 <유럽의 여름>을 참조하라.

4) 위스콘신투쟁: 조지워커의 주정부 예산삭감 저지투쟁. 보론 2 <위스콘신 봉기>를 참조하라.

5) 시위자, <점거하라>(Occupying Wall Street), 25쪽을 참조하라.

6) 1999년 시애틀전투에서 촉발된 반세계화운동은 2005년 이후 쇠퇴국면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반세계화운동이 직접적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WTO 도하라운드의 교착 등 투쟁의 성과와, 다자간 협정에서 양자간 쌍무협정, 즉 자유무역협정(FTA)로 전환된 정세와 그로 인한 투쟁의 불가피한 국부성 등의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7) 반세계화운동은 직접적으로 다자간, 양자간 자유무역/투자협정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한 운동이었고, 외견상 단일 이슈 캠페인을 취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영향력이 전 세계 노동자-민중의 삶의 다양한 영역을 포괄함에 따라, 다양한 주체와 주제를 수렴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운동의 운동’이란 별칭을 갖게 됐다.

8) http://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Occupy_Wall_Street

9) ttp://www.adbusters.org/blogs/adbusters-blog/occupywallstreet.html & Kirk MacDonald,“Adbusters and Occupy Wall Steet,” Foundation Watch, Capital Reserach Center, January 2012. 그러나 월가점거의 구상 자체는 2011년 이전에도 개별적 수준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Danny Schechter, Occupy - Dissecting Occupy Wall Street, December, 2011. 의 Introductioin, ix~xiii쪽을 참조하라.

10)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Occupy_movement_protest_locations

11) 이와 같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전술은 이른바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에 의거한 것으로 작은 범죄가 커다란 범죄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초동 단계에서 강력한 진압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12) 4,800만 달러의 경찰 초과근무수당이 지출되었다.

13) 주코티 공원은 부동산업체가 뉴욕시의 건설업 관련 특혜에 대한 대가로 기증한 半공공적 시설이었기에, 다른 공공 공원과는 달리 야간점거가 가능했다.

14) 뉴욕경찰은 앰프마이크 사용을 금지했다.

15) http://www.nycga.net/ - <뉴욕시 점거선언>(Declaration of the Occupation of New York City), <연대의 원칙>(Principles of Solidarity), <자치선언>(Statement of Autonomy)과 <기업인격 종식결의>(Resolution to End Corporate Personhood). 세 문서의 원문 번역은 이 글의 부록을 참조하라.

16) 1962년 6월 15일 SDS(민주사회를 위한 학생회) 총회에서 채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