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평등주의 vs 국부유출방지’?
지난 5월 26일 삼성의 이른바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계획이 발표되었다. 메르스 사태로 국민들의 눈과 귀에 한쪽으로 쏠린 사이, 이건희 삼성회장의 신변문제로 속도가 붙은 권력승계의 단추가 다시 꿰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제일모직과 삼성SDI의 상장을 통해 이건희 지분 상속을 위한 이재용의 실탄확보를 마무리 지은 후, 이제는 합병을 통해 삼성전자의 지배력을 더 높이려는 계산이다.
그런데 여기에 3대 주주로서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가지고 있는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소송을 제기해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그들 주장의 요지는 삼성물산의 경영진들이 합병을 하면서 주주이익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삼성물산의 자산규모가 제일모직에 비해 세배나 큼에도 불구하고 합병비율은 반대로 0.35:1의 비율로 헐값에 합병시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배임행위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에 합병반대에 동참할 것을 공개적으로 호소했고, 여론전을 피면서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위임 받고 있다. 물론 여기엔 이 문제를 최대한 이슈화 시켜 주가상승을 유도하여 단기차익을 노리겠다는 속내도 있다.
이 논란에 대해서 여러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삼성이 3대 세습에만 몰두하여 시장 질서를 훼손하고 주주 이익을 침해한다고 지적하는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단기차익을 노리는 해외 투기자본에 의한 국부유출을 우려한다는 지적까지 제기되고 있다. 마치 2003년 헤지펀드 소버린이 SK의 기업지배구조를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경영권 획득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시세차익만 누리고 떠났을 때처럼 “주주자본주의 vs 국부유출” 논쟁이 재현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순환출자와 재벌지배구조
이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은 재벌기업의 순환출자에 있다. 삼성을 필두로 대다수 재벌들은 재벌기업들끼리 연결된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재벌을 지배하고 있다. 현재 재벌기업이 새로 순환출자하는 것은 금지됐지만, 기존 순환출자는 그대로 용인되고 있다. 문제는 기존 순환출자가 재벌기업 간 합병을 통해서 그대로 승계되기 때문에, 이재용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삼성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들이 생겨나고 있다.
삼성물산이 중요한 이유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의 핵심에 있는 삼성전자의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이 최대주주인 재일모직이 삼성물산과 합병을 하면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분을 이재용이 거머쥘 수 있다. 또한 삼성물산은 삼성SDS의 2대주주라서 삼성SDS가 삼성전자와 합병한다면 삼성전자의 지분율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부회장 3대 세습도 이와 똑같은 합병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재편의 최종 종착역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재벌일가의 지배를 용인하되, 지주회사체제로 정리하는 것? 아니면 이건희 일가가 경영권에서 손을 떼고 미국식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는 것? 현재의 논의대로라면 어떤 형태가 되든 재벌문제의 딜레마는 해결되지 않고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됐든 소수의 지분으로 자산 400조의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주자본주의 혹은 주주평등주의 속 실제 현실은 1대 주주와 2대, 3대 주주간의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주평등주의는 최대주주가 독점하고 있는 권리를 2대, 3대 주주가 권력을 분점하자는 요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대다수 재벌기업의 2대, 3대 주주는 외국인 자본이 많고 이들은 대부분은 해지펀드들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주주자본주의에 맞게 재벌 지배구조가 재편돼 봐야 그것이 더 민주적이라고 할 만한 이유는 없다.
삼성 문제, 다시 국민적 논의를 모아야
이건희 일가가 이기든, 엘리엇이 이기든, 혹은 서로 타협하든 그것은 대자본가들의 분쟁이며, 국민의 입장에서 고려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건희 일가가 이겨서 ‘국부’를 지킨다고 한들, 그 ‘국부’는 모두 3대 세습으로 귀결된다. 또 엘리엇이 이겨 삼성이 엄청난 손해를 본다고 한들 삼성이 내놓아야 할 돈은 대부분 엘리엇의 호주머니로 갈 뿐이다. 또는 타협을 해서 이익을 분점 할 수도 있다. 소버린과 SK 경영권 분쟁에서 소버린이 7000억원을 먹튀한 것 뿐 아니라, 최태원 일가도 수천억 원의 시세차익을 거둬 이를 통해 아주 소수의 지분으로도 SK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다잡았다. 이번 사태에서도 서로 윈윈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모두 알다시피,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매우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3대 세습은 지배구조를 더 취약하게 만들고 있고 이에 따라 삼성그룹의 무리수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취약한 재벌지배구조를 바꾸려고 든다면 방법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은행보다도 경제의 지배력이 더 큰 재벌기업에 대한 대주주적격성 심사를 도입하면 세금포탈과 배임 등 범죄 전력이 있는 이건희 회장은 대주주의 자격을 상실한다. 또한 금산분리 원칙을 철저하게 밀어붙이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없다. 심지어 보험업법에 “다른 금융기관들처럼 보유주식 산정을 시장가격으로 계산한다”라는 단서만 달아도 삼성생명은 당장 삼성전자 지분을 대거 팔아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희 일가의 삼성그룹에 대한 지배력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문제는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 약한 고리를 쳐서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삼성의 산업적 독식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벌어들이는 엄청난 수익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그런 경영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껏 얘길 해봐야 세금을 더 내라고 주문하거나, 사회 환원 차원의 장학재단설립이나 신성장 동력에 대한 투자와 고용을 당부하는 정도에 그친다.
이번 삼성물산 사태는 이재용으로의 3세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어떻게 쥐어짜더라도 지배구조는 이건희 때보다 더 취약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경영의 불안정성은 더 확산될 것이다. 불황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은 골목상권까지 잠식하며 이윤을 남기고 있지만, 임금삭감, 고용축소, 내수가격 인상, 단가후려치기 등으로 국민경제 전체 차원에서 위기와 불황을 더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재용의 손에 한국경제의 미래를 내맡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체제냐 하는 협소한 논의를 넘어서 재벌의 사회화를 통한 국민경제의 재편을 다시 논의해야 할 때다. [참세상 연구소(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