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끝과 시작: 레아 이피의 '자유'에 관해

한 권의 책을 배우거나 읽는 과정에서, 그 책에 대해 세 가지 다른 의견을 갖게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나는 레아 이피(Lea Ypi)의 '자유(Free)'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야 그에 대해 들었다. 그때도 나는,  '역사의 종말'에 있는 알바니아에서 성장한 자전적 이야기라는 주제에 다소 흥미를 느꼈다. 알바니아는 그 오랜 대통령인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고립주의 정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블랙박스'였기에. 하지만 나는 동유럽에서 나온 개인적인 회상에 대해 일률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을 뻔했다. 왜 그런 불신이 있었을까?

Lea Ypi, FREE(2021) 출처: penguin.co.uk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동유럽인이다(Ich bien ein Easterner)': 그것이 어땠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영어로 읽으라고 제안받은 것들 대부분은, 내가 생각하기에, 가짜였다. 서방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특히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개인 회고록은 철의 장막 뒤의 삶에 대한 서방의 시각이나 편견을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정치적 재판, 전 볼셰비키의 처형, 반체제 인사들의 망명, 고기와 화장지를 구하기 위한 긴 줄, 탱크 행렬, 지루한 관료들의 모습으로만 구성되었다. 모두가 모피 모자를 쓰고 영구 동토층에서 살았다. 이러한 것 중 일부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나라, 다른 시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내 인생 경험에 비추어 볼 때, 1970-90년대에 동유럽에 살았던 90%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세대와 그보다 한 세대 아래 세대의 삶이 어땠는지,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글은 서양 독자들에게 출판되거나 읽히지 않을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될 동유럽의 이야기는 언제나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사소한 특수 사례를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읽었던 철학과 시사 문제에 관한 이피의 매우 매력적인 글들도 알고 있었다. 그의 견해와 사고방식이, 프랑스인들이 '획일적 사고(la pensée unique)'라고 부르거나, 구 공산권 국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바니아는 소비에트 블록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소비에트 블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레아 이피를 만났을 때 우리는 아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이피가 친절하게 책 '자유(Free)'를 선물로 주었을 때, 나는 이미 첫 번째 접근 방식에서 조금 벗어날 준비가 된 상태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나는 런던의 한 공원 벤치에 앉아, 준 스탈린주의 정권 아래 알바니아에서 성장한 이피의 어린 시절부터, 민주주의와 혼란의 전환기까지 22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을 무작위로 펼쳤다. 나는 그 중 한 편인 '브리가티스타(Brigatista)'를 읽으며 가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들에게 세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으며, 가난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환경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어머니는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을 하기 싫어해서 가난하다고 여겼다. 

책의 첫 번째 부분에 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레퀴엠(Requiem)'에서 수감자들에게 소포를 배달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여성이 안나를 알아보고는, "이걸 설명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장면에서 나오는,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의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안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할 수 있어요." 

1980년대 알바니아는 1930년대 모스크바와는 거리가 멀었지만(서론에서 이미 말했듯), 안나의 대답이 생각난 것은, 의도적이고 자랑스러운 (통치자의 관점에서) 자급자족 사회주의 사회의 삶에 대한 이피의 묘사가 진실한 동시에 독자에게 힌트를 줄 뿐, 강요하지 않는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피 또래의 아이들은 개인 위생(매주 월요일마다 손톱을 잘랐는지, 깨끗한지 확인하는 것)과 당에 대한 숭배(너무나 어디에나 있어 '공산주의'라는 말을 앞에 붙일 필요가 없는, 그 유일한 당)가 동등하게 주입되는 질서 있는 나라에서 자랐다. 코카콜라 캔은 상대적 번영의 표시로 사용되었지만 모든 집에는 TV가 있었다. 추수 소식과 정치 연설 사이를 오가는 지역 1, 2개 채널에서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지만, 안테나를 조금만 조정하면 세리에 A 축구 경기와 유고슬라비아 농구를 볼 수 있고, 대부분의 날에는 이탈리아 저녁 뉴스를 시청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모든 국제 행사에 대해 논의하고, 만델라의 석방을 축하하며 이탈리아 좌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실제 알바니아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교조적으로 경직되어 있으나 국제주의적 가식을 가진 정권이 어떻게 국민들 사이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많은 여행을 하면서, 정보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운 일부 국가에서 세계에 대한 지식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단순한 지식으로 측정하더라도) 얼마나 제한적인지 종종 놀랐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통제되고 선전이 심한 이곳에서, 이피의 가족과 학교 친구들 역시 산 레모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다른 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짧은 일화들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설명하고, 공산주의 국가에서 삶의 여러 모순을 경험하지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지금 그것을 연관 지어 설명한 다음, 자본주의로의 전환의 충격을 설명할 때, 이피는 다소 반직관적으로 알바니아의 특징적인 요소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첫째, 1945년 이후 서방으로부터 독립된 정책을 따랐고, 1956년 이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며, 1978년 이후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알바니아의 상대적 고립은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다른 곳보다 더 급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의 완전한 폐쇄성에서 개방성으로, 모든 것이 '집단'을 통해 이루어지던 것에서 모든 것이 사유화되는 것으로, 당과 '엔베르 삼촌'의 단일 목소리에서 정당과 '시민 사회'의 불협화음으로, 변화는 더욱 극적이었다.

알바니아를 독특하게 만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알바니아가 쿠바, (그리고 어느 정도) 베트남과 함께 진정한 국내 공산주의 혁명을 경험하고, 다른 민족이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라는 점이다. 이것은 돌이켜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로 밝혀졌다. 혁명의 국내적 성격으로 인해, 공산주의와 그에 따른 모든 악영향이 전적으로 소련의 점령 때문이라는 설명은 (공산주의 정권의 국내 기반을 완전히 무시한 채) 알바니아 사례에서는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이어진 비난과 맞비난, 전쟁의 난장판도 알바니아의 민족적 동질성 때문에 불가능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훨씬 더 객관적이고 냉철한 눈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아야 했다. 대부분의 중부 유럽에서처럼 모든 부정적 측면을 지금은 러시아로 변모한 소련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고,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인을, 러시아인이 비러시아인 볼셰비키를, 세르비아인이 티토를,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을 영원히 탓할 수도 없었다. 알바니아의 경우 공산주의는 알바니아가 일으켰고,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것도 알바니아에 의해서였다. 

천천히 출구가 열리기 시작한다. 시위대(아니면 '사람들의 재산'을 파괴하려는 '훌리건'일까?)가 멀리 떨어진 수도의 거리를 가득 메운다. 소식은 느리고 고르지 않게 퍼진다. 그런 다음 상황이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시위'를 언급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시위가 언급되면, 찬성 또는 반대 중 어느 쪽인지 스스로를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시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저녁, 이피는 그가 잠자리에 든 줄 알았던 부모님을 놀라게 한다. 부모님은 매우 작은 소리로, 걱정스러운, 혹은 희망에 찬 얼굴을 하고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당제 선거가 치러지고 사회당(이름을 바꾼 공산당)이 승리하더라도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정치인이나 반체제 인사, 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식탁과 교실에서 이러한 사건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통해 목격한다. 열두 살 또는 열세 살의 톰보이 같은 소녀 이피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혼란이 이어진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학교는 180도 반전되고, 출석률은 급감하고, 모두가 나라를 떠나고 싶어하고 (단편 중 하나에 제목이 붙은 것처럼) 마약상, 매춘부, 인신매매업자, 돈세탁업자, 악덕 대출업자가 정상이 되고, 게다가 그들이 가장 많은 돈을 내기 때문에 매우 바람직한 직업이 된다.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감옥에서 출소한 사촌을 더 이상 '졸업했다'고 하지 않고,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을 '교육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등, 특히 부모가 공공장소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 모르는 자녀 앞에서 진실을 감추는 모든 언어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피도, 우리도 알지 못했던 많은 옛 이야기들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다. 이 책은 거의 아가사 크리스티와 같은 플롯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부분을 천천히 발견하고, 단편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 결코 완전한 결말을 알 수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드리아해를 횡단하는 배에 올라타고, 그 중 일부는 바다에 가라앉고, 서방 국가들이 전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국민들에게 출국 금지령을 내리고, 나토가 약탈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등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책에 대한 생각의 3단계로 넘어갔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서로 돕던 이웃의 연대는 사라지고, 직장에서 받은 식권보다 훨씬 덜 중요했던 돈이 왕이 되고,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서 담배와 코카인을 밀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오후 수학 클럽에 참석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다 이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한 사람의 삶과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그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책이 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동유럽과 서유럽은 드라마가 펼쳐지는 극장의 배경일 뿐이다.

이피의 책은 이제 사건에 대한 기록의 차원을 벗어나 소설 작품이 되었다. 우리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거의 전적으로 자전적이지만, 그를 예술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피의 책도 예술 작품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자신과 그의 가족, 친구들은 이제 소설 속 인물이 되어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마콘도(Macondo)가 실제로 존재했던 많은 유사한 장소를 기반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실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도 알바니아, 전환, 이피의 가족은 모두 은유다. 모두 사실이며, 현실의 모습을 초월한다.

만약 내가 레아를 다시 만난다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책이 헌정된 할머니, 가족, 첫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묻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나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이 다아시와 결혼한 후 그녀에게 합리적으로 일어났을 법한 일이나, (고리오 영감의) 라스티냐크가 파리를 정복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1990년대 후반 수천 명의 난민과 함께 아드리아해를 건너 남부 이탈리아로 여행한 젊은 여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추측해볼 수 있겠다. 

[출처] The end and the beginning of history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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