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을 추적하기

출처: Springer Link

⟪마르크스의 자본의 궤적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논쟁과 21세기 자본주의에 주는 교훈(In the Tracks of Marx’s Capital: Debates in Marxian Political Economy and Lessons for 21st Century Capitalism)⟫은 두 명의 잘 알려진 튀르키예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쓴 중요한 신간이다. 아흐멧 토낙(Ahmet Tonak)과 순구르 사브란(Sungur Savran)은 지난 40년간 그들이 쓴 일련의 글들을 모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생산 양식 분석이 오늘날에도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추적'하고 있다. 순구르 사브란은 이스탄불 오칸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아흐멧 토낙은 스미스칼리지의 연구원이자 매사추세츠대학교 애머스트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 경제에 관련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핵심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자본론(Capital)⟫과 그 방법론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2부에서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양도 이윤'의 측정 문제, 착취율, 투입-산출표의 재구성, 복지 국가와 사회적 임금의 역할에 적용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3부에서는 디지털 노동과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생겨난 도전에 맞서 21세기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의 새로운 연구를 다룬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순구르 사브란이 마르크스주의 가치론과 스라파 학파, 신리카도 경제학 간의 차이점을 논의한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목표는 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발전시켜, 이 생산 방식이 인류에게 제공하는 착취, 억압, 소외에 맞서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1부에서 토낙은 독자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첫 번째 노트들로 안내하는데, 이는 1857년 대규모 경제 위기 이후에 작성된, 현재 ⟪정치 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으로 불리는 글들에서 표현되었다. 토낙은 그 글의 역사적 맥락과 내용을 상세히 논의하고, 마르크스가 소외, 가치, 탈자본주의에 대해 제시한 주요 논점을 요약한다.

사브란은 두 개의 장에서 마르크스의 걸작 ⟪자본론⟫의 세 권에 걸친 주요 쟁점을 다룬다. 사브란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해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브란은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종종 간과하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는데,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1850년대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보았지, 단순히 고전파 학파의 발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예를 들어 안와르 샤이크 같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사브란이 말했듯이, ⟪자본론⟫은 "그 학파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경제 내 가치가 인간 노동력에 의해 창출된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모순적 성격, 즉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와 이로 인해 자본주의적 생산과 투자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위기의 원인을 부정했다. 엥겔스가 말했듯이,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잉여가치였는데, 이는 생산수단 소유자들이 어떻게 가치 생산자인 노동자들로부터 표면적으로는 동등한 교환, 즉 임금을 통해 잉여를 착취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무시한 부분이다. 더 나아가, 사브란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영원히 지속될 생산 방식으로 간주하고, 가치, 화폐, 임금노동, 이윤 등 자본주의의 범주들을 전혀 의문시하지 않았던 반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범주들 자체를 깊이 파고들어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특정하고 일시적인 생산 관계를 낱낱이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다음 장에서는 두 저자가 현대 경제의 다양한 활동 분야를 살펴보며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매우 중요한 구분을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가치는 오직 인간 노동력에 의해 창출된다고 말하지만, 모든 노동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자본에 있어 생산적 노동은 생산수단 소유자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 부문을 의미한다. 비생산적 노동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지만, 생산적 부문에서 창출된 잉여가치로 지급되는 임금을 통해 그 대가를 받는 노동 부문을 가리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주요 부문은 비생산적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사회의 복지나 계급투쟁에 있어 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 공무원, 교사, 사회복지사, 의료 종사자들은 자본주의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들인데, 그들은 자본에게 새로운 가치나 잉여가치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의 임금은 전체 잉여가치에서 차감된다. 이는 자본이 국가 지출과 투자를 반대하고 민영화를 선호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관점에서 이는 자본주의의 '건강'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로서 생산적 노동의 수익성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명확히 한다.

토낙은 안와르 샤이크와 함께 ⟪국가의 부를 측정하기: 국민 계정의 정치경제학(Measuring the wealth of nations: the political economy of national accounts)⟫이라는 중요한 저서를 공동 집필했는데,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범주를 사용하여 국가의 생산을 측정한다. 그리고 또 다른 장에서 토낙과 이잇 카라하노울라르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명확히 한다. 이들은 먼저 마르크스주의 노동가치론을 바탕으로 착취의 의미를 정의하며, 착취의 유일한 기준은 잉여노동의 수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생산적 노동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런 다음 터키의 정부, 금융, 무역 부문에서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착취율을 실증적으로 추정한다. 또 다른 장에서는 토낙이 알퍼 두만과 함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마르크스주의적 분류를 투입-산출표를 사용하여 경제에 적용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의 역동성을 드러내는데, 이는 주류 분류에서 단순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2부에서 토낙과 알퍼 두만은 나의 의견으로는 논란이 많은 '양도 이윤'(POA, Profit on alienation)이라는 범주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다. '양도 이윤'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착취되는 이윤 외에 추가적인 이윤의 원천으로 제시된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의 가치론, 즉 총가치가 자본 간 가치 재분배 이후에는 총 생산가격과 같고, 따라서 총 잉여가치도 총 이윤, 이자, 지대와 같다는 견해와 상충한다. 이러한 평등성은 오직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하며, 그 가치의 분배와 유통이 총가치의 불평등한 몫을 낳는다는 관점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이윤의 원천이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양도 이윤'은 초기 고전파 경제학자인 제임스 스튜어트에게서 나온 개념이다. 안와르 샤이크 같은 일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토낙과 두만도 그를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마르크스가 생산 과정에서 노동 착취가 아닌 자본의 순환에서 나오는 또 다른 이윤의 원천으로 스튜어트의 양도 이윤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마르크스가 스튜어트의 개념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대다. 마르크스가 스튜어트의 분류에 대해 말한 것을 읽어보면,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중농학파(Physiocrats) 이전에는 잉여가치, 즉 이윤의 형태로서의 이윤이 순전히 교환에서, 즉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함으로써 설명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 경은 전체적으로 이 제한된 견해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과학적 형태로 재현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내가 ‘과학적 형태’라고 말하는 것은, 스튜어트는 개별 자본가가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함으로써 얻는 잉여가치가 새로운 부의 창출이라는 환상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말한다. “따라서 이 양도 이윤은 상품의 가격이 그 실제 가치보다 더 크거나, 상품이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됨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한쪽의 이득은 항상 다른 쪽의 손실을 수반한다. 전체적인 재고에 새로운 추가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부의 균형의 진동’ 이론은 잉여가치의 본질과 기원 자체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잉여가치가 다양한 계급과 이윤, 이자, 지대와 같은 다양한 범주 사이에 분배되는 것을 고려할 때 여전히 중요하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따라서 거래나 양도로 새로운 이윤이 생기는 것은 없다. 이 ‘상대적’ 이윤은 말 그대로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샤이크는 이것을 왜 그렇게 중시하려고 하는가? 불행히도, 샤이크는 마르크스의 등식(총가치=총가격;잉여가치=이윤)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는 신리카도파의 비판이다. 그래서 그는 생산에서 노동 착취 외부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 이 등식을 회복하려고 한다. 또한 이것이 20세기에 금융 자본이 생산 외부에서 어떻게 추가 이윤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이 추가 이윤은 ‘수입’(즉, 생산 외부에서 순환하거나 축적된 이윤)에서 나온다. 마치 도둑이 훔친 물건을 팔아 이윤을 얻는 것처럼, 은행가도 노동자의 저축과 주택 담보 대출에서 추가적인 이자와 수수료를 갈취함으로써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제 금융 자본은 노동자의 임금 일부를 은행 이자로 떼어내거나, 기업의 이윤(비금융 자본)을 압박하여 이윤을 얻을 수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토낙과 두만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추가적인 이윤의 원천이 아니라 단지 잉여가치의 재분배이거나 노동력 가치의 감소일 뿐이다. 이것이 금융 자본이 자본 순환에서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에서, 또는 스튜어트가 제안한 것처럼 ‘고전 전통’ 내에서도 경제 계정에 추가적인 이윤 원천을 포함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는 현대의 ‘금융화’ 이론의 모호함, 즉 이제는 금융만이 착취자이지 자본 자체가 착취자는 아니라는 주장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금융 부문이 노동자의 임금에서 주택 담보 이자와 집값을 통해 얻는 이윤을 추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토낙과 두만은 그 장에서 실증적 예시를 통해 바로 그런 내용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금융 이윤은 생산 자본가들이 획득한 총 잉여가치의 일부일 뿐이며, 이는 이자와 지대를 통해 금융 자본가에게 재분배되거나 노동자의 임금(가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예시들은 금융 이윤(그중 많은 부분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허구적’인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의 등식을 균형 맞추기 위해 또 다른 이윤의 원천을 찾을 필요는 없다. 신리카도파의 비판은 후속 마르크스주의 분석가들에 의해 반박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등식은 그의 모델 내에서 일관성을 가진다.

3부에서 토낙은 디지털 경제에서 노동 착취의 새로운 형태를 살펴본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달리 디지털 경제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와 이윤 이론을 바탕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이스북은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을 생산하며, 페이스북의 생산적 노동자들이 창출한 잉여가치는 회사의 이윤과 비생산적 노동자들의 임금의 주요 원천이지, '지대'의 착취가 아니다.

다른 장에서 사브란은 198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포드주의 이후’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한 이론들을 반박한다. 이는 '유연성'이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이롭게 작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디지털 노동 과정 통제 방식이 노동을 자본에 종속시키는 더욱 가혹한 형태일 뿐임을 입증한다.

또 다른 장에서 토낙은 현대 제국주의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 이론들은 주로 전쟁과 군사 침략과 같은 정치적 현상이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관계의 경제적 결과(불평등과 빈곤 등)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진정한 초점은 정치적 지배의 기초를 구성하는 남반구와 북반구 간 불균등한 경제 관계의 역할에 있어야 한다. 이윤 동기는 제국주의의 근본이며, 가치 이전의 메커니즘은 자본 축적의 글로벌 과정에 의해 유지되는 자본주의 경제들 간의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구글리엘모 카르케디와 내가 우리의 작업에서 표현한 관점이기도 하다.

이 장 하나만으로도 책을 읽을 가치가 있는 훌륭한 장에서, 토낙과 사브란은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요약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2008-2009년의 이른바 ‘세계 금융 위기’ 이후의 세계 경제를 1873-1896년의 장기 불황과 1930년대 대공황의 계보에 속하는 장기 불황 상태로 규정한다. 불황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토낙과 사브란은 모든 현대 위기 이론을 조사하고, 이를 철저히 논파하여, 2008년 이후 위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 기반한 이론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일부 실증적 데이터는 나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 사브란은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그의 위기 이론을 부정하는 신리카도파와의 논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무기를 다시 든다. 이 논쟁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좌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사브란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부정적 가치’를 초래했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다는 신리카도파의 주장을 반박한다. ‘부정적 가치’는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이며,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져야 한다는 신리카도파의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가치 창출 이론에서 마이너스 가치는 분명 일관성이 없는 허튼소리겠지만, 사브란은 이 신리카도파의 주장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신리카도파의 비판 뒤에는 피에로 스라파가 제시한 가치 또는 생산 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 사브란은 마르크스 이론이 아닌 스라파의 이론이 내부적으로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토낙과 사브란은 자본주의 생산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자본론⟫이 여전히 견고한 토대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자본론⟫의 분석을 수정하고 반박하려는 유행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여전히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 협력과 자유의 세계에서 함께하는 인류를 위한 새로운 사회 체제로 우리를 이끄는 유일한 등불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Tracking Marx’s Capital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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