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트랜스해방전선, 필자 제공
성소수자의 삶은 치열하고 간절하다. 그래서 아주 위대하고 경이롭지만 그것을 쌓아올린 중요한 기둥 중 하나는 추모와 기억이다. 9년 전 이맘때, 우리의 친구 크리스가 세상을 먼저 등졌다. 세상을 떠난 바로 전날까지도 크리스의 SNS 담벼락은 활발했고, 우리는 믿을 수 없었다. 크리스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커피 한 잔 하러 카페에 들어갔을 때, ‘잘 지내는지, 힘든 것은 없는지, 고민은 없는지 더 자세히 물어볼걸’ 하는 마음은 이제 덧없다.
그 후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달력에는 우리가 추모와 기억의 시간을 가질 날이 점점 늘어갔다. 치열했던 삶을 추모하면서, 그렇게 기억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우리의 삶을 더 간절히 이어가야 했다. 다가오는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이다.
바로 며칠 전, 트랜스젠더인 친구 한희가 메시지로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해 보내주었다. 정밀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한 검진센터에 방문했는데, 검사안내와 문진표에 태어났을 때 지정되었던 성별이 표기되어 있었고 주민등록증에도 여전히 성별을 가리키는 숫자가 있었다. 그런데 탈의실을 이용할 때조차 그 숫자가 가리키는 탈의실로 직원이 안내했다. 다행히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문을 잠글 수 있는 방이 안쪽에 하나 더 있어 빨리 검진을 끝내고 가려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아뿔싸, 갈아입어야 하는 옷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색깔이었다. 남성은 황토색 옷에 파란 팔찌, 여성은 주황색 옷에 분홍 팔찌. 상의탈의를 해야하는 순간도 있는데, 의료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 다음 순서로 소변검사도 해야 하는데 옷색깔이 내 성별과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옷색깔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했다. 이런저런 검사를 마치고 다시 일상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런, 탈의실에 사람이 많다. ‘그냥 빨리 나오자’는 마음으로 등돌리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한희는, 이 일을 겪고나서 생각해보니, 평소에도 다치면 병원을 잘 안가게 되었던 것이 이런 성별이분법적인 시스템에 대한 심적 거부감이 커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TDoR(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가까워져 기록을 더 남기고 싶었다는 한희의 메시지의 마지막 단어는 ‘다들 화이팅’.
트랜스젠더/퀴어, 논바이너리 친구들은 언제나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에서 위기의 순간을 겪는다. 이렇게 수도 없이 많은 위기의 순간을 겪어야 하기에, 삶이 투쟁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 허언이 아니다. 바로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연수도 이렇게 치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버거웠던 것이 아닐까. 연수는 살아생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서로 연합하여 한 개인이 아닌,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에 대해 함께 싸워나갔으면 좋겠다.”
“주변에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돌아보고 살핌으로써 외롭게 혼자두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 사회에서 끊임없이 존재를 부정당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정신질환에도 취약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쉽다. (...)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소수자였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겐 내가 최초의 트랜스젠더였다. 나를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나를 설명해야 했고 나의 존재를 납득시켜야 했다. (...) 나는 감히 조금 더 많은 분들에게 지지를 부탁드리고 싶다.”
11월 16일 토요일, 트랜스해방전선 등 56개의 인권시민사회단체가 공동주최하는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 및 행진이 진행됐다. ‘Trans Pride’라는 슬로건 하에 진행된 이 역시 추모와 기억 위에 쌓아올린 우리의 간절하고도 치열한 삶의 표현이다. 우리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하나,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차별금지법, 지금 당장 제정하라.
하나, 수술강요와 억압을 막기 위한 성별인정법 제정하라.
하나, 성별이분법에 근거한 주민등록번호 폐지하라.
하나,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권과 의료보험을 보장하라.
하나, 트랜스젠더의 가족 구성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혼인평등 실현하라
하나, 트랜스젠더 시민의 삶을 포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트랜스젠더 인권법 제정하라.
Trans Pride, 저 자긍심 안에는 트랜스젠더,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뿐 아니라, 그에 더해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받는 순간에 그 옆에 서는 것’이 반드시 포함된다. 곁에 있자, 우리의 자긍심을 세우고 지키자. 트랜스 프라이드, 우리의 자긍심, 트랜스젠더의 삶은 과거형을 지나온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 덧붙이는 말
-
오소리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소주는 'HIV/AIDS인권행동 알'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