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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크로포트킨의 회고록을 읽으면서(여기에서 리뷰했다), 러시아 혁명 운동의 지적 역사에 대한 그의 묘사가 베르댜예프의 저서인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과 의미(The origin and the meaning of Russian Communism)⟫를 떠올리게 했다. 베르댜예프는 이 책을 1935-36년에 썼고, 1938년에 출간되었다. 책에서 언급된 유일한 동시대의 사건들은 모스크바 재판(한 문장에서)과 히틀러에 대한 단 한 번의 언급뿐이다. 이 책은 19세기 초부터 10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혁명 사상의 지적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당시에는 비교적 새로운 해석으로 볼셰비키 정책들을 해석하고 있다.
나심 탈레브는 오래된 책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플라톤의 저서가 그가 쓴 지 거의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다면, 앞으로 2,500년 후에도 그것들이 읽힐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베르댜예프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앞서 언급했듯이 90년이 된 책이고, 나는 거의 40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은 여전히 "시사성이 있는(d’actualité)" 책이며, 최근 들어 더더욱 그러해졌다.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러시아 사상의 이념적 배경은 '종말론적 메시아주의'에 대한 믿음이다. 이는 베르댜예프가 말하길, 슬라브주의자들, 허무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잠재된 이념이라고 한다. 그 핵심 요소는 러시아 민중(여기서 말하는 '민중'이란 문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 즉 농민들을 의미한다)이 어떤 신비로운 이유로 고통을 받도록 선택받았고, 그 고통을 통해 세계에 보편적인 구원을 가져온다는 믿음이다. “러시아 민족의 사명은 인류 사회에서, 단지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글쓴이 번역). 이 구원은 파괴와 함께 온다. 요한의 묵시록적 저작들처럼, 두 요소는 함께 간다. 거짓되고 썩었으며 거짓에 기반한 모든 것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베르댜예프는 종말론적 사유가 러시아 사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썼다. 이는 금욕주의, 독단주의, 그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혹은 고통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으로 특징지어진다.
베르댜예프가 19세기 지적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공산주의적 밀레니엄주의를 러시아 메시아주의 교리 내에 정확히 위치시키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평범한 민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그 혁명이 오래된 틀에 쉽게 맞아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믿음이 기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일한 믿음은 전혀 다른 이념, 심지어는 명백히 반종교적인 이념인 마르크스주의와 함께할 수도 있었다. 다소 농담조로 베르댜예프는 러시아가 제3의 로마가 되는 데 실패했지만, 제3 인터내셔널을 만들었다고 썼다. 이것은 베르댜예프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극단적으로 서구화된 교리"였던 마르크스주의의 "러시아화"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했다.
두 번째 목적은 오늘날 더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종말론적 메시아주의의 유연성이다. 우리는 실제로 거의 매일 그것에 대해 듣고 있다. 러시아가 구현하고 있다는 '보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핵으로 멸망시키겠다는 거친 형태의 위협들 속에서 말이다. 베르댜예프 자신은 정교회 철학자였지만, 19세기 러시아 이념의 여정을 논하는 내내 계급 분석을 사용한다. 모든 메시아주의는 주어진 역사적, 사회적 틀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각기 다른 계층에 호소했다. 슬라브주의자들은 성직자, 고위 관료, 그리고 궁정에서 지지를 받았고, 아나키스트들은 귀족 일부와 이상주의적 학생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지지받았다. 사회혁명주의자들과 "흑색 분할" 운동(토지 개혁)은 해방된 농민들에게 의존했으며, 볼셰비키는 빈곤한 지식인들과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가장 강한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오늘날 베르댜예프를 읽는 것은 필연적으로 "만약 그런 비전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오늘날 종말론적 메시아주의의 지지 계층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이 실존하는지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보안위원회 부위원장의 다소 미친 듯한 일일 발언들과 몇몇 TV 해설자들의 말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존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르게이 카라가노프는 최근 저술에서 러시아의 투쟁(즉, 그들의 '메시아주의')을 두 가지 기둥 위에 세우며 이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오늘날 정치적 선호의 현실을 훨씬 더 잘 반영하고 더 평등한 다극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가족, 종교, 성별 등 '일반적으로 인정된'(보수적) 가치를 위한 투쟁이다. 카라가노프는 정치학자이자 국제관계 학자로서 첫 번째 요소를 강조하는 데 훨씬 더 능숙한데, 실제로도 나는 이 부분에 많은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세계는 패권 국가에 의해 지배될 수 없으며 평화로울 수 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국제 규칙을 깨면서 어떻게 다른 국가들이 그 규칙을 지키도록 기여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두 번째 목적('보수적 가치')는 단 한 문장으로 다루어진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 분야에서 러시아가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러시아는 자살률, 살인율, 가정 폭력, 알코올 중독, 그리고 거의 모든 다른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회 병리학적 지표에서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중하게도, 카라가노프는 그 주제를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내 질문은, 오늘날 "어떤 사회 계층이 종말론적 메시아주의의 버전을 지지할 수 있을까?"이다. 러시아의 사회 구조는 19세기나 베르댜예프가 설명한 시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공산주의 체제는 국가를 산업화하고 도시화했다. 그 결과, 새로운 지배 계층인 '적색 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고, 그들은 편리하게도 체제를 해체하기로 결정했을 때 진정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 나아가서는 과두제가 되었다. 기술적, 인문적 지식인 계층으로 구성된 대규모 중산층이 만들어졌으며, 젊은 층과 중년 층의 시장 의존적인 중산층은 여러 도시에서 발달했으며, 그 숫자는 두 수도에서 가장 많다. 귀족 계층은 제거되었고, 농민 계층은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 구조 속에서 누가 새로운 종말론적 메시아주의의 '담지자'가 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이 깊이 자리 잡은 이념이나 계급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분노나 절망의 개인적 목소리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종말론적 메시아주의'가 러시아에서 완전히 이념적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증명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이념적 형태로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믿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출처] Russia’s apocalyptic messianism
[번역] 류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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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