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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통일누리] 금강산 여행 참가기

[평화누리통일누리] 금강산 여행 참가기

1박3일의 금강산 여행... 이번 금강산 여행은 엄청난 설레임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드디어 북측 땅을 밟아보는구나’ 하는 흥분되 는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밤새 버스가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고성. 그곳에서는 사뭇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왠지모를 긴장감,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간다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현대아산 직원으로부터 북측에 가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것 등 주의사항을 듣고 남 과 북 출입국 사무소를 지났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 ‘얼른 통일이 돼야지, 너무 번잡하다.’ 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왔다. 북측 출입국 사무소를 나와서 숙소 쪽을 향했을 때 버스 밖 풍경 중 군데군데 서있던 군인들은 마치 서있 는 모습과 복장들이 장난감 병정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안동 평통사, 제5기 시민학교를 돌아보며]

[평화누리통일누리] [안동 평통사, 제5기 시민학교를 돌아보며]

분단된 이 땅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며 지역의 대안적 발전을 위한 자발적 시민단체 “안동, 평화와 통일 을 여는 사람들”이 이번 2007년 가을을 맞아 연례적으로 행사해오던 안동 시민학교의 제5회째 개교를 맞았다. 기간은 11월 2일을 시작으로 매주 금요일 저녁(19:00~21:30)에 개강하여 11월 30일까지 연 5주간 진행됐다. 장소 는 안동가톨릭상지대학교 셀린관과 세미나실로 지역의 매우 뜻 깊은 행사인 만큼 대학 측에서 장소 및 시설을 전 격 후원해 주었다. 이번 제5기 안동시민학교의 제목은 “민족주의 이후의 민족”으로 큰 틀을 정했다.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 점차 가속되어지는 전 지구적 미 제국주의와 또 신자유주의라는 미명하에 진행되는 경제 적 예속을 탈피하고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이뤄내는 진정한 대안이 무엇일까 하는 일종의 모색에서 출발했다. 즉, 글로벌화 된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고의 필요성과 함께 분단된 이 땅에서 어렵게 싹이 트기 시작한 “우 리 민족끼리”의 남북화해 협력이 내포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와 또 우리에게 과연 “민족”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깊이 성찰해 보기 위한 기회로 활용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번 제5기 안동시민학교를 실제적으로 기획하고 입안한 피재 현 정책실장의 “민족주의 이후의 민족”으로 정한 화두의 웅변이다. 이러한 관계로 이번 제5기 안동시민학교의 초빙 강사진은 이 “민족”이라는 큰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 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면면만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평화누리통일누리] 평통史(3) –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전망을 모색하여,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를 결성하다. 1999년

[평화누리통일누리] 평통史(3) –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전망을 모색하여,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를 결성하다. 1999년

98년 8월 통일행사 과정에서의 쟁점은 통일대축전 남측추진본부 구성에서의 한총련, 범민련 남측본부의 가입 배 제와 관변단체인 민화협이 결성된 것 두 가지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평통사는 9월,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진영 의 새로운 조직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통일운동단체의 대표자들의 좌담회를 조직하는 등 자주통일진영의 재편 논의를 주도한다.(1998년 9월20일, 회지 통권 17호) 좌담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대표자들(민족회의, 민자통, 범민련, 민주노총, 전국연합, 사월혁명회, 평통사)은 민족회의의 민화협 가입문제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민화협과 정부에 독자성을 가진 자주적 민간통일운동 진영의 단결과 재편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한편 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으로 평양 장충성당 건립 10주년 기념미사를 위해 북을 방문했던 문규현 상임대표는 그 시기에 열린 북의 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다. 이전정권과 달리 북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취하며 북과 통일대축전을 함께 치르자고 했던 김대중 정권이 취임 첫 해에 저지른 행태였다.

[평화누리통일누리] 평통사와 늘 함께 하겠다는 순수한 청년 – 부천평통사 노칠성 회원

[평화누리통일누리] 평통사와 늘 함께 하겠다는 순수한 청년 – 부천평통사 노칠성 회원

노칠성 회원은 부천시의 조그마한 공장이 우글거리는 내동에 터를 잡고 9년째 살아가고 있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23세에 이곳으로 올라와 제조업노동자로서, 또 부천평통사의 전신인 통일사랑노동자회 회원으로서 살며 활동하고 있다. 현재 그는 일하던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죽어도 평통사와는 떨어질 수 없다는 너스레를 떨며 실직 중이다. 그는 오랜만에 쉬는 시간을 활용해 국가고시시험(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하고 취업을 준비하느라 이력서를 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회지에 실릴 회원인터뷰 이야기가 건네지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약간 쑥스러운 듯, 설레이는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박하고 맑은 눈빛 그대로 회지를 통해 만나게 될 평통사 회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 평통사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나는 어렸을 때 꿈이 없었다. 오로지 좋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는데 함께 일하던 용진이형을 통해 단체생활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좋아서 마음을 열게 되었다. 처음으로 전태일 열사정신계승 추모집회에 참여했을 때 대학로에서 명동성당까지 행진을 함께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은 나에게 ‘아 이런 삶도 있구나! 참으로 멋있는 일이다. 함께하고 싶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효순이 미선이 투쟁이 계기가 되어 주한미군의 만행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고 하루라도 빨리 미군철수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 큰일이며 꼭 필요한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통사 활동을 하면서 무엇이 변화되었나? 단체 생활을 시작한지 8년이 흘렀다. 내가 개인적인 삶을 택했다면 아마도 보수적인 생각을 하고 그에 관한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평통사에서 분회활동, 실천투쟁, 학습, 사람들과의 관계를 겪으면서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지금은 자기 생각, 주장을 말할 수 있게 되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꾸고 있는 꿈은? 대중적 실천,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보다 더 나은 활동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집회참가, 학습 등 나이 먹어서도 꾸준히 하고 싶다. -가장 기뻤을 때와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 2006년 4월 7일 평택투쟁으로 연행됐을 때다. 연행되어 들어갔는데 저녁 9시가 넘도록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고 평일이라 내일 일하러 못가는가 싶어 불안하기도 한 상황에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한 일이었지만 불안함이 고조되었을 때 10시경 사무장님과 회원들이 면회를 왔다. 회원들의 모습에 기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경찰서를 쩌렁쩌렁 울리는 사무장님의 목소리, 회원들...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싸워주는구나! 경찰서를 나올 때에는 어두운 긴 터널을 뚫고 밝은 빛으로 나오는 느낌이었다. - 활동하면서 아쉬었던 점은? 탈퇴한 회원들을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다. - 부천평통사의 자랑거리는? 회원들 전체가 다 친구 같고 편하다, 결속력이 강하다는 것^^ - 평통사에 바라고 싶은 말? 통일이 된 이후에도 평통사가 변혁운동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 길에 항상 함께 하겠다. *** 인터뷰를 시작할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노칠성 회원은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처럼 그는 중단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평통사 활동이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노칠성 회원. 이 열정이야말로 오늘의 평통사를 만들어낸 힘이 아닐까?

[평화누리통일누리] 남북 정상의 공동선언 발표를 보고

[평화누리통일누리] 남북 정상의 공동선언 발표를 보고

남북 정상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합의하였다. 우선 두 정상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한다. 선언문에서 밝혔듯이 이번 합의로 남북관계는 6.15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평화, 번영, 통일 향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남북 정상은 ‘615선언을 고수하고 구현’하기로 다짐하고,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이에 지향’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양정상의 합의가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게 평가한다. 또한 ‘남북 관계의 발전을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하여 각기 필요한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를 합의한 것은 국가보압법 폐지를 위한 진일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 정상은 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반대하여 불가침의 의무를 준수하기로 합의한 것이나 서해상의 무력 충돌방지를 위해 해주 경제특구건설과 해주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등을 합의한 것은 평가를 하고자 한다. 특히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기로 한 것은 서해해상경계선, 북방한계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 대안의 하나로 평화에 대한 남북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항구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서 이와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의 모임의 추진하기로 한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신호탄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또 그간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미국이 한반도 평화협정체결의 책임당사자라는 점을 분명히 한 점도 높이 사야한다. 선언이 철저히 이행되어 한반도 평화, 번영, 통일의 시대가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분단선을 걸어서 넘은 데서 정상회담에 기대가 높았던 우리는 양 정상의 선언을 보고 아쉽게 느껴진다. 특히 통일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한 논의기구를 구성한다거나 주한미군을 포함한 북미, 남북 사이의 군축과 관련하여 기본적 합의가 있으리라 기대하였었다. 우리가 군사적인 문제에 대한 한계를 보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선의로 해석하면 6자회담의 영역, 북미 사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6자 회담의 눈치를 살폈지 모르겠다. 아니면 미국의 눈치를 살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 한반도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의 근본 위협이 되고 있는 미군의 철수가 불가피하게 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한대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 원인은 우리가 미국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남한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이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인데도 불구하고 지례 질급을 하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못했다. 남북한 군사력 비교나 현재 남한이 보이고 있는 국력신장 등 남한이 북한보다 앞지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미워하여 초래되는 새로운 상황을 인정 못하는 결과이겠지요. 지금과 같은 상황 하에서는 북이 남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군 당국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마당에 보수주의적 무리들이 성조기를 흔들고 있는 상황이니 참으로 한심한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축정도를 생각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친일’을 경계하듯이 ‘친미’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 길은 군축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홍익인간의 전통을 따라 평화 지향적으로 되었을 때에 비로소 살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것이 역시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다.

[평화누리통일누리] 9.19 공동성명 2단계 합의 및 남북정상회담 선언의 의미와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 투쟁의 절박성

[평화누리통일누리] 9.19 공동성명 2단계 합의 및 남북정상회담 선언의 의미와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 투쟁의 절박성

‘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기’ 1만인 선언에 함께해 주세요! 미국이 2012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준다고 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이를 ‘군사주권의 회복’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니... 무늬만 환수, 껍데기 환수에 불과합니다. 왜 그럴까요? ☞ 한미양국은 층층이 ‘군사협조기구’를 두어 미국이 작전통제권에 간섭하도록 하고 있 습니다. 특히, 공군의 경우 작전통제권 환수계획조차 없습니다. ☞ 미국이 군사전략과 작전지침을 짜고, 한국군은 이에 따라 작전통제권을 행사합니 다. 한국군은 미국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 ‘북한군 격멸’, ‘북정권 제거’를 목적으로 한 공격적 작전계획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 한 대규모 미군 전력지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미국은 전력지원을 핑계로 작전통제권 에 간섭할 것입니다. ☞ 미국은 독자적인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한국군 합동군사령부’ 창설계획도 무산시켰 습니다. 이는 유엔사나 주한미군사령부가 작전통제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속셈입니다. 유엔사 강화하여 작전통제권 다시 장악 노려 ☞ 미국은 1975년 유엔 총회에서 해체가 결의된 유엔군사령부를 강화하려 하고 있습 니다. ☞ 미국이 유엔사를 강화하려는 이유는 ▲ 작전통제권의 핵심 권한을 장악하고, ▲ 북 한에 대한 선제공격과 반격작전, 점령통치를 합법화하며, ▲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주한미군 주둔 근거를 마련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작전통제권이 기만적으로 환수되면... ☞ 미국의 군사적 간섭이 계속되어 군사주권의 회복이 불가능해 집니다. ☞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이를 무기로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 할 것입 니다. ☞ 주한미군은 방어 임무를 한국군에 넘기고 세계 어느 곳이든 침략할 수 있는 군대로 바뀌며(‘전략적 유연성’), 한국군도 여기에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작전권 환수’에 대비한다는 핑계로 2020년까지 621조원의 예산을 들 여 미국산 첨단무기를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국민은 앞으로 15년 동안 가 구당 5천만원의 세금을 내야 합니다. 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고 유엔사 해체해야 온전한 평화협정 가능 ☞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온전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 해서는 작전통제권을 제대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환수해야 합니다. 또한 유엔사도 늦 어도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완전히 해체해야 합니다.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 한미동맹 폐기해야 ☞ 한반도 평화가 위협당해 온 것은 주한미군이 우리나라의 작전통제권을 틀어쥐고 군 사적 대결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폐기해 야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와 통일의 길이 열립니다. 국민여러분, 이렇게 합시다! 작전통제권을 제대로 되찾기 위한 1만인 선언과 모금운동에 참여합시다! ☞ ‘작전통제권 완전 환수,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 1만인 선언과 신문광고를 위한 2천원 이상 모금운동에 참가해 주십시오. ☞ 가족과 친지, 지인들도 선언 참여와 모금운동에 나서도록 권유합시다. 작전통제권의 기만적 환수를 합의하게 될 39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반대투쟁에 참여합시다! ※한미안보협의회의(SCM)란? ‘군사분야의 FTA’라고 할 수 있는 한미안보협의회의(Security Consultative Meeting) 는 한미 양국의 국방부장관이 참가하는 최고위급 안보협의기구로 해마다 열립니다. 올 해는 작전통제권 환수 및 유엔사 문제 등을 중심으로 11월 초에 서울에서 열립니다. ☞ 11월 3일(토) 오후 4시, 국방부 앞에서 열리는 작전통제권 완전 환수와 유엔사 해 체, 주한미군 없는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집회에 적극 참가합시다! ☞ 기자회견과 미국 국방장관 방한반대 시위에 참여합시다!

[평화누리통일누리]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투쟁을 향한 회원들의 진군이 시작되다! – 광주, 평통사 일꾼 전진대회 –

[평화누리통일누리]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투쟁을 향한 회원들의 진군이 시작되다! – 광주, 평통사 일꾼 전진대회 –

빗줄기 사이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흐르는 가운데 돌아 본 신묘역. 신묘역에서 참가자들은 윤상원, 박기순, 박관현 등 광주 7열사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변연식 대표님의 시 낭송이 울리는 가운데 참배를 했습니다. 차가운 빗속에, 차가운 대리석 틀 안에 자리잡아 구묘역보다 차갑게 느껴지던 신묘역은 유일한 참배객인 평통사 회원들의 조용하지만 뜨거운 결의로 가득 찼습니다. 오전 11시, 마지막 일정으로 5·18 묘역 영상실에서 평통사 일꾼 전진대회를 마무리하며 마음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배종렬 광주전남 평통사 대표의 추모사와 김종일 사무처장의 결의발언, 그리고 홍근수 상임대표의 마무리 말씀으로 진행된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각자의 결의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2시 30분, 전체가 함께 하는 점심 식사를 한 뒤,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굵은 빗속에서도 서로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며 각자 지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전진대회에 참가했던 회원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각각의 지역으로 돌아가지만, 모두의 마음에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새겨 반드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자는 결의가 담겨졌습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대동강에 두고 온 누이 – 칠순의 투사 유호명 할아버지

[평화누리통일누리] 대동강에 두고 온 누이 – 칠순의 투사 유호명 할아버지

유호명 할아버지(69세)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국방부를 찾아갔다. 이날 새벽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 성민 씨가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방부 민원실 앞에선 평통사 주최 <제70차 평화군축 집회>가 열 렸다. 아프간 사태 때문인지 몇몇 외신들이 집회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맞은편 전쟁기념관 정문 너머 전투병의 동상이 보였다. 집회는 점심시간에 맞춰 한 시간 가량 진행됐다. 이글거리는 뙤약볕으로 등줄 기에 땀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기름때 묻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종로, 청계천, 장안동 등지의 카센터에 자동차 부속품을 납품하는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일을 멈추고 근처에 트럭을 주차했다. 짐칸은 물론이고 운전자 옆 좌석 에도 부속품들이 가득 쌓여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그는 장사하면서도 항상 통일 생각을 한다고 한 다. 방송을 봐도, 신문을 봐도 통일 관련된 소식이 있으면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그는 할아버지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활기찬 표정이다. 실제 할아버지라고 부 른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가 단단한 체구에서도 느껴졌다. 그러면 서도 순박함과 천진난만함이 묻어났다. 매일 집회에 나오기가 어렵지 않냐고 여쭈었다. “나이 드니까 예전 같지 않고 몸이 잘 안 따르지. 힘들어서 이런 운동 이제 그만하자는 생각도 드는데, 일이 생기면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절로 생겨.” 할아버지는 지기이자 동지라고 일컫는 한상준(71세)과 함께 최루탄도 많이 맞고 경찰서 유치장도 많이 끌려다녔다. 서울에서 안 가 본 경찰서가 드물다. 집회가 있으면 만사 제치고 참여한다. 그를 만나기 위 해 오늘만도 두 건의 집회에 참가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다음날도 미 대사관 앞 기자회견장에 얼굴을 내 밀었다. 길을 지나가던 70대 가량으로 보이는 한 노인과 국방부 장교가 집회자들을 삿대질하며 지나갔다. 집회 참가자들은 영어를 병기한 피켓과 손플랑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할아버지는 집회에 나오는 일이 생활의 십일조라며 겸손해한다. 십일조라는 것은 수입의 딱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첫 번째 것, 즉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에게 겨레 의 하나됨을 위한 노력은 신에게 드리는 가장 첫 번째 것인 셈이다. 부인은 매일 집회에 나가 과로하는 할아버지를 걱정도 하고 원망도 한다. 할아버지는 평택 대추리 집회에 자주 나섰는데 경찰 병력이 투입된 날 일이 생겨 대추리를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아직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 할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집회에 빠지면 마음이 불편하 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롭다. 심지어 악몽도 꾼다. 그가 다니는 교회 조헌정 목사는 FTA를 반대해 분 신자살한 ‘허세욱 동지도 그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하면서 “옳은 병입니다. 옳은 병!” 이라고 말했다고 한 다. 할아버지는 언제부터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옳은 병’에 걸리게 된 걸까? “1989년에 임수경이 텔레비전에 나오던 때야. 한참 통일 바람이 불던 때였잖아. 그때 일하던 중에 우연 히 TV를 보는데 임수경이가 ‘우리는 하나다.’라고 부르짖고 어릴 때 뛰어놀던 대동강, 모란봉, 평양시가 지가 나오는데 누님 생각이 나면서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연세대학교 집회에 한 번 가본거야. 거기서 문 목사님이 앞에 나와서 열사들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어. 난 그 전까지 데모하는 학생들 보면 폭도들이라고 했거든. 그날 정말 통곡을 했지. 김도향의 노래 있잖아. ‘난 참 바보처럼 살았 군요.’ 내가 딱 그런 놈이었어.” 할아버지는 그날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최근까지 헌신 적으로 봉사해 왔다. 유가협에서 공로패도 수여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요즘은 유가협에 관심을 갖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의 부모는 일제하 조선 땅에서 살기 어려워 일본에 건너갔다.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 살았는데 원폭 당시 산에 굴 파고 숨어 다행히 원폭피해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광복을 맞이 해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들어왔다. 부사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는 길에 둘째 누님은 일본 교포 남자의 고 향인 당진에서 내려 살림을 차렸다. 누구도 그것이 가져올 아픔을 짐작할 수 없었다. 고향으로 올라간 가족은 사동 탄광지대에 살았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석탄 캐는 일을 했다. 전쟁이 났고 국군이 진격해 들어올 때의 일이다. 그때 그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언제나처럼 대동강 옆 개천에서 동무들과 미역도 감고 놀고 있는데 군복에 총을 메고 우리 쪽으로 군 인들이 오는 거야. 국군 간호장교 대위인 여군 한 명이 앞서고 남자 호위병 서넛이 카빈 총을 들고 뒤따 르고. 무서웠지. 우리 쪽으로 와서 우리 어머니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는거야. 자세히 보니 당진에 살던 둘째 누이야. 어이구 이 녀석 많이 컸네 그러면서 껴안더라고. 반갑기도 하고, 총을 보니까 무섭기도 했 지. 그러고 나서 집에 함께 들어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오더라. 그때 셋째 누님이 둘째 누이가 들어오는 걸 봤대.” 이때 인민군 간호장교 소좌인 셋째 누님은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집에 숨어 살고 있었다. 인민 군 누이는 군의관 장교인 사귀는 남자의 영향으로 간호장교가 되었고, 군국 누이는 어릴 때부터 나이팅 게일을 존경해 간호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빨리 숨어라 그래서 작은누이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로 장롱과 벽 사이 좁은 틈에 숨었 단 말야. 혹시라도 장롱 속이 안 보이게 셋째 누님이 가로막고 있었지. 어머니 아버지는 딸이 오니까 반 가우면서도 한편 불안한 거야. 서로 반가워하고 인사하고 있는 와중에 인민군 누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 고 뛰쳐나온 거야. 둘째누이를 핏줄보다 적으로 생각했나봐. 국군을 보니 반동분자들이란 생각이 들었겠 지. 죽여버리겠다고 외치면서 권총을 들고 탁, 나와서 국군 누이를 향해 겨눴어. 국군 누이는 멍하니 서 있고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인민군 누이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 “나는 누나들 다릴 붙잡고 엉엉 울었지. 금방 누구라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자식들은 울면서 바짓가랑 이 잡고 말리고, 어머니는 왜들 그러냐고 통곡을 하면서, 절대 방아쇠 당기지 마라, 니들 중 하나는 죽는 다, 하나라도 죽는 거 원치 않는다, 당장 총을 내려놓아라, 말리셨는데 그게 어머니 마음이고 우리 마음 이야. 동네 사람들 몇몇은 방에 들어와 있고 문 밖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방 안 상황이 그렇게 험악했지. 이게 딱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현실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국군누이가 호위병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럴 수 없다고 머뭇거 리자 단호하게 재차 외쳤다.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어!” 그제서야 호위병들이 총을 내려놓았다. 작은 누 이도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둘째누이에게 말했다. “오늘 이 일은 없 었던 걸로 하고 작은 애를 도망가게 하자. 동네 사람들도 다 못 본 거다.” 국군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누이는 치마저고리 차림 그대로 뒷간으로 난 쪽문을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이 가족이 목격 한 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국군과 인민군 그런 차이도 몰랐어. 인민군 누님은 완전 독기가 올랐었지. 원래 누나가 좀 사상성이 있었거든. 형제들 중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특히 산수를 참 잘했고 미모도 빼어났어.” 맏누이는 지금 부산에 있는 성당에서 노인들 목욕봉사를 하며 살고 있다. 마음이 인자하고 온유해 남을 위한 봉사를 좋아한다고 한다. 북쪽 누이는 지금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국군 점령지역을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전투병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는 누이들-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간호사들도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던 것 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국군 누님은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오고 있으니 남으로 내려가자며 가족을 재촉 했다. 누님을 따라나서면 안전하고 빠르게 대동강을 건너 피난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인민 군 누이를 두고 내려갈 수 없었다. 결국 누이는 국군과 함께 남쪽으로 먼저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인민군 누이를 기다리기 위해 부러 사동 집에서 평양 집인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만든 공동 방공호로 옮겼다. 지금 평양의 지하철도 전쟁 시 대피하기 위한 방공호로 지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인 민군과 중공군이 사리원까지 남하하고 평양 시가지를 돌며 국군 찦차에서 이승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돌아올 테니 3일치 식량만 들고 피난하라는 것이었다. “3일만 후퇴하면 된다고 했는데 3일이 어느새 60여 년이 되었어. 이승만에게 속았어. 중공군이 물밀듯 이 내려올 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우린 살기 위해서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피난 했지. 결국 누님만 두고 내려왔다. 공기중에도 살얼음이 끼는 동지섣달 한파 속에서 한밤중 대동강을 건넜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다시 보 지 못할 대동강을 그때 건넜다. 그 위에서 팽이도 돌리고, 썰매도 타고, 연도 날리고, 발가벗고 헤엄치던 대동강과 칠흑의 어둠 속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 길로 영등포까지 걸어내려갔다. 가는 길에 국군 낙오병을 만나기도 했다. 미군 전투기, 일명 쌕쌔기가 쌕쌕쌕 소리를 내며 갑자기 나타나 민간인에게 총을 갈겼다. 눈 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을 직접 목 격했다. 길에서 죽어 있는 피난민들도 많았다. 영등포에 도착해 기차 지붕에 올라탔다. 피난민 중엔 비탈진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 지는 것보다 배고픔과 추위가 더 무서웠다. 밧줄이 없어 보따리며 이불 등을 끈으로 이용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했다. 가족 단위로 굴비처럼 엮어 추락에 대비했다. 그는 아버지 곁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기차 지붕 위에선 일주일 동안의 ‘지붕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피난민들은 개성김치며 주먹밥 등을 서로 나눠 먹었다. “그게 밥상공동체고 지붕공동체야. 서로 추락하지 않게 잡아주고, 먹을 것 있으면 나눠 먹고 도와주면 서 내려왔어. 그때는 서로 자기 것을 아끼지 않았어. 요즘 사람들 자기 것 챙기고 먼저 먹으려고 얼마나 영악해. 문명은 발전했지만 완전 헛것이지.” 더러 예고 없이 기차가 떠나 잠시 정이 쌓인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했다. 객차 후미를 분리시키고 기차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가족은 기차 앞 쪽에 탔기 때문에 부산까지 갈 수 있었다. 낮과 밤들이 지 붕 위에서 흘러갔다.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다. 새벽에 부산에 도착하자 “재첩국 사이소”, “오징어 사이소 ”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이었다. 부산에서 삶의 주춧돌을 맨바닥부터 쌓아올리는 일이 시작됐다. 그 짐은 부지런한, 아니 부지런할 수밖 에 없는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에게 대부분 돌아갔다. 그 전까지 부지런했던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그때 부터 허구한 날 술만 마셨다. 지금도 아버지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전쟁의 화마가 그에 게 무엇을 남겼던 걸까? 아버지는 누이를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하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할아버지는 형과 함께 절대 술을 마시지 말자는 약속을 하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그래. 그 대신 어머니가 빼빠지게 일만 하고 살았지. 메리야스 보따리 장사를 했던 어머닌 결국 길에서 장사하다 쓰러져 죽었어. 고혈압이었지. 66년 도였을 거야. 유언도 못 남기고 죽었어. 어머니도 작은 누이 한 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 그도 어머니 속 많이 썩여 후회가 많다고 한다. 사동에서의 일을 꺼내지 않던 맏누이에게선 딱 한 번 영 숙이(북한 누이)가 보고 싶다는 얘길 들었다. 매형 장례식 때였다. “이산가족 문제는 말야,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이지. 이산가족이 아니라 도 당연히 만나서 함께 살아야 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잖아. 난 우리 가족만 찾겠다는 생각은 없어. 7천만 겨레가 만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7천만이 다 이산가족이야.” 금강산에 가봤냐는 질문에 갈 생각도 없다고 한다. 민족이 갈라서 있는데 무슨 염치로 가냐며 민족이 하 나된 이후에 가보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교회 주보에 적힌 ‘분단 65년’이란 글자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고 한다. 분단을 유지하는 통일의 장애물은 무엇일까? “장애물을 치워야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듯 분단 장애물을 치워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거야. 부시가 북 한을 미사일 공격하면 내 동무들을 향해 쏜다는 것이잖아. 미군 철군 없는 평화는 없어.” 할아버지는 왕십리 유리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아내와 딸 둘과 함께 가족을 이뤘다. 큰딸은 시집가고 작 은 딸은 데리고 있다. 자식들이 대선 지지자가 다 다르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어보려고 애쓰기 도 했지만 지금은 포기했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대로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공주의자인 넷째 누 이와도 지금은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교회에 다닌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방부제나 핸드폰 밧데리 충 전하듯 온다. 올해 3월 문익환 목사 추모를 위해 교회에서 모란공원에 갈 때 할아버지에게 참석을 종용 하는 문자가 왔는데 ‘고(故) 문익환’이란 이름자가 적혀 있었다. “문 목사님은 돌아가신 분이 아냐. 땅 속에 묻힌 분이 아니야. 故자를 떼어 내고 대신 늦봄이란 그분의 호만 붙여야지. 문 목사님의 거룩한 뜻은 내 가슴에, 그리고 우리들 가슴에 살아 꿈틀대고 있으니까. 열 사들도 모두 살아 우리들 가슴에서 부활했잖아.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변해도, 죽은 자는 그 뜻 그대 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변하더라도 열사들은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이 없어.” 유가협에서 후원활동을 하며 자주 만난 문 목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였다. 두 분은 몇 가지 점에서 닮은 모습이었다. 예수를 시대적 예언자로 인식하고 그 뜻을 따라 실천한 점과 늦은 나이에 투사의 삶을 시작한 늦봄들이란 점, 열사들에 대한 애정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각별하다는 점이 그렇다. 할아버지는 종종 열사들의 묘지를 혼자서 찾아간다. 할아버지의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통일운동 단체 총회 때 태극 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한반도기를 걸어야지 왜 갈라진 민족의 국기인 태극기를 거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몇 년 전엔 인천에서 ‘8?15민족통일대회’가 열렸을 때, 할아버지는 친구 한상준과 함께 북쪽 대표 단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안기부 요원들이 막아도 소용없었다. 서로 반 갑다고 손을 잡고 얼싸안으며 대뜸 “야, 이 새꺄!, 빨리 오지 않고 왜 이제 왔냐?”, “야, 그게 어디 내 맘 대로 되냐?” “야, 이 새끼 너, 손 한 번 만나보자.” 순식간에 자신들도 모르게 이뤄진 상봉이고 대화였다. 그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생면부지였지만 서로의 이름은 ‘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저녁에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주최하는 집회에 참석해 다시 할아버지를 만났다. 길 건너로 미 대사 관 건물이 보였다. 스피커에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들려왔다. 시위자들은 이번 아프간 사태의 근 본적 책임은 미국의 아프간 점령을 도운 현 정부에게 있다며 철군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촛불집회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열사들이야말로 자기 몸을 불태워서 제사로 자신을 역사 앞에 바친 거잖아. 촛불을 봐. 어둠을 바쳐서 시 대를 밝히잖아. 열사들도 자기 몸을 희생해서 수많은 생명을 살린 거야.” 할아버지는 작년에 교회 목사의 권유로 유언장을 미리 써두었다. 그의 유언장엔 물론 민족 통일의 염원 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통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분단체제를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평양 동무들을, 생사를 알 수 없는 누이를, 대동강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길 건너 미 대사관 건물에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광주 일꾼전진대회를 다녀와서

[평화누리통일누리] 광주 일꾼전진대회를 다녀와서

앞으로의 투쟁을 다짐하고 방향을 찾기 위해 아름답고 성스러운 고장 광주로 향하는 우리 일행 발걸음은 가벼웠다. 부천에서 오후 3시에 출발하여 4시간 반이라는 시간 끝에 민주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장 광주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저녁 시간이여서 우리 일행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인 광주 청소년 수련원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 수련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소개하는 각 지역에서 참여하신 분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들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개가 끝나고 강연이 있었는데 강연 내내 나는 문근영이나 비가 옆에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아주 푹 약 4시간 동안 빠져있었다. 어렵고 조금은 생소하지만 하나라도 더욱 알기 위해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빠져들었다. 모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단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반도 평화 정착에 있어 지금의 시기가 아주 중요하고 놓칠 수 없는 기회이며 우리가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강연이 끝나고 조별 토론이 있었다. 새벽 1시의 토론장은 마치 한여름 태양 아래 서있는 것처럼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 전체가 모여 조별 토론 내용 발표와 그 내용에 맞는 퍼포먼스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날 밤 일만 생각하면 이마에서 땀이 난다. 조 발표자가 당근 우리 대표님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표님이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던 것이다. 그 순간 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역시나 대표님께서 잘 마무리를 해주어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조금 내성적이라 여러 사람들 앞에만 서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 혼자 있을 때 생각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발표를 하라하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단점이다. 모든 조가 색다른 아이디어로 발표하는 것을 들어보니 내가 우리 조에서 얘기한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가 넘어 뒤풀이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을 보니 토요일 일을 마치고 온 후라 많이 피곤해 보였다. 3시 조금 넘으니까 하나 둘씩 침실로 향했다. 아마도 아침 7시에 기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배가 고파서 통닭, 맥주를 조금 많이 먹었다. 통닭 맛이 좋았으며 이 모든 준비를 해준 광주전남 평통사 선배님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요일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아침 식사 후에 오전 일정을 시작했다. 강당에서 오전에 율동배우기 및 그림 글자 맞추기 게임을 하였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다음 시간은 퀴즈 게임 이였는데 난 첫 문제에서 탈락 했다. 이런 공부 좀 할걸... 다음 행사는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참배행사를 위해 이동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몰려왔다. 하늘을 보니 흐린 구름이 차츰 몰려오면서 조금씩 비가 왔다. 마치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묘역에 발을 옮긴 순간 알 수 없는 소리가 내 귀를 울립니다. “당신들이 있어서 우리가 여기서 편히 잠들 수 있습니다...더욱 노력해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주세요....” 난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 할 때까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다시 와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람들 얼굴을 보니 모두 나와 같은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좋은 사람들 속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회원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곧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하면서, 더욱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면서 버스에 몸을 맡겼다. 우리는 광주에서 하나였고 행복했다. 같은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행복한 마음을 얻었다. 그 속에 우리의 미래가 있었다. 이번 일꾼전진대회는 진정한 나를 찾아낸, 너무나 행복한 여행이었다.

[평화누리통일누리] 우주의 무기화와 인디아(Weaponisation of Space and India)

[평화누리통일누리] 우주의 무기화와 인디아(Weaponisation of Space and India)

1) ‘우주의 무기화와 핵화에 반대하는 전 지구적 모임(Global Network Against Weapons and Nuclear Power in Space, 이하 GN. 『평화누리 통일누리』64, 66호에 소개됨) 감독단의 한 사람인 제이 나라야나 라오는 인디아 나 그푸르에 산다. 올해 3월 담스타트에서 열린 GN 연간 행사에 같이 참석하면서 알게 된 그에게 인디아의 우주평화 이슈에 관한 글을 부탁했다. 집에 전용 컴퓨터가 없는 그는 고맙게도 6월 26일 인터넷 카페에서 아래 글을 보내주 었다. 허세욱 님처럼 그 역시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을 일치시킨 삶을 살아왔다. 제이 나라야나 라오는 1958년부터 1994 년까지 인디아 철도무역노조 운동을 전개하던 중 평화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1982년에 전 인디아 평화와 연대 조 직(All India Peace & Solidarity Organization;AIPSO)에 가담했다. AIPSO는 World Peace Council의 인디아 동 맹 지부이다. 현재 그는 AIPSO의 마하라쉬트라 주 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일한다. 그는 핵무기와 전쟁반대 운동, 그 리고 개발도상국 운동에서 여성과 청소년 운동의 절실함을 자각하고 인디아 여성, 청소년운동 조직 건설의 초석을 세웠으며 마하라쉬트라 주 의사들의 평화와 개발을 위한 운동 조직을 설립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1994년 철도 공사 은퇴 후 남동부 중앙철도 연금수령자 협회를 세웠고 그곳의 사무장으로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그는 최근 자 기 비용으로 GN의 활동을 소개하는 출판물을 제작했으며 2006년 10월에는 브루스 개그논 등 GN 스탭들을 인디아 다섯 개 도시에서 열린 시민우주평화 행사에 초대하여 인디아 우주평화운동을 대중화 하는 데에서 주목할 만한 활 동을 펼쳤다. 브루스 개그논이 그의 블로그(http://space4peace.blogspot.com/2006_10_15_archive.html)에 쓴 2006년 인디 아 여행 보고에서 그 자세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jnrao36@sify.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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