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앞 농성장의 하루
‘야전사령부’는 멈춰서지 않는다
국회앞에 난데없는 천막촌
개혁입법투쟁 이끄는 구심
국회 정문에서 백미터 남짓 떨어진 국민은행앞 빈터는 지금 ‘천막촌’이 들어서 있다. 각각 20∼40명이 기거할 수 있는 대형천막 열 댓 동이 처마를 잇대고 늘어섰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난민촌 같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인지추운 날씨 속에 대하는 첫인상은 퍽 을씨년스럽다. 천막촌 어귀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그나마 썰렁함을 덜어준다.
이곳은 민주노총의 ‘전시 야전사령부’다.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이곳에 상주하고 있고, 공공, 화학-섬유, 금속, 건설, 민주택시, 병원, 사무 등 주요연맹들도 줄줄이 천막을 치고 연맹지도부가 옮겨와 있다. 먹고 자는 상주인원이 1백50여명에 이른다. 삼미특수강 등 노조들도 합류하고 있어 천막수는 계속 늘고 있다.
11일(토요일) 오전 11시, 민주노동당(준)이 이 야전사령부에 합류하려 천막을 치고 있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고, 바닥을 까느라 정신이 없다. 조금 떨어진 모닥불 주변에는 삼미특수강 노조원 10여명이 둘러앉아 느긋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 시각 일단의 손님이 민주노총 천막을 찾았다. 남상헌,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같은 또래의 지긋한 ‘아주머니’들. YH, 동일방직, 반도상사 등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불을 지핀 노동운동의 대선배들이다. 올해 6월 창립한 ’70년대 민주노동운동 동지회'(회장 남상헌) 정기총회를 마치고 들른 길이란다.
12시쯤 돼서 황혜원선전부장과 오늘 당직을 맡은 이혜순교육부장이 <노동과 세계> 호외 뭉치를 들고 들어선다. 민주노총 투쟁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어제 급히 찍은 것이다. “역시 김대중은 안된다”는 머리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다. 삼미특수강에서 얻어먹거나 근처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오늘은 전화로 주문했다. 수저를 놓은 이근원 조직쟁의실장이 ‘상황일지’를 적은 뒤 몸을 눕힌다. 그도 그럴 게 밤낮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늘 잠이 모자란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민중대회 후속대책을 의논하다 새벽녘에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필동 중대부속병원에 다녀왔다. 눈 붙일 사이도 없이 매일 아침 8시반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벌인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규재 부위원장이 떠날 채비를 한다. 오늘은 각 지역에서 동시에 규탄집회가 열리는데 부위원장들이 한 곳씩 나눠 참석하기로 했다. 다른 부위원장들은 오전 일찍 떠났고, 울산집회에 참가하는 이부위원장은 2시 비행기가 예약돼 있단다.
1시가 되자 다들 떠나 한산한 천막안으로 단병호 위원장이 들어선다. 명동성당에서 12시에 있은 민중대회 관련 기자회견에 다녀오는 길이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다들 먹었나? 그럼 삼특에서 해결하지 뭐…”. 잠시 뒤 일회용기 한 그릇을 든 단위원장이 다시 들어선다. 떡국에 김치 몇 조각이 떠있다. 한 술 뜬 단위원장이 한 마디 한다. “삼특 사람들, 다 주방장 해도 되겠어…”.
갑자기 주변이 소란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열리는 집회가 곧 시작될 모양이다. 정각 2시에 ‘개혁입법쟁취, 민주노총 탄압 규탄대회’가 시작됐다. “그따위로 할거면 국회를 해산하라!” 구호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재능교사노조를 중심으로 금새 7백여명이 모였다. 공공연맹 김연환 위원장이 규탄연설에 나서 “정부의 농성장 철거는 가만 있는 사람 얼굴에 가래침을 뱉은 격”이라며 “벌떼처럼 모여 본때를 보여주자”고 호소한다. 이어 단위원장이 연단으로 쓰는 트럭 위에 올라 대회사를 한다. “민중대회를 폭력으로 유린한 김대중정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아니오!” 우렁찬 답변이 들려온다. 전임자임금 문제만 부각하는 언론을 비판한 뒤 “국회가 민주노총의 핵심요구인 10대 개혁입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전면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는 경고로 연설을 마무리한다. 민주택시 강승규 위원장이 향후 투쟁일정을 발표한 뒤 ‘국회진격투쟁’이 시작됐다. 어느새 중무장한 전투경찰 1천여명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지도부가 맨앞에 선 시위대열과 전경대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러나 중과부적. 경찰저지선은 밀릴 기미가 안보인다. 10여분간 연좌농성을 벌인 뒤 다시 몸싸움. 역시 역부족이다. 후일을 도모하며 오늘 집회를 마무리한다.
이어 재능교사노조가 집회를 다시 시작한다. 삭발을 한 김수복 위원장이 나서 “노조설립 필증을 내주지 않는 노동부장관을 직무유기로 고발했다”고 보고한다. 대부분 여성들로 이루어진 조합원들이 추운 날씨 속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조사수, 투쟁!” 카랑카랑한 구호소리가 연방 터져나온다.
다시 민주노총 천막안. 선두에서 몸싸움을 이끈 지도부가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중간에 끼어서 허리, 가슴이 저리다”, “이제 경찰 헬멧을 밟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건설노련 이용식 위원장의 말에 폭소가 터진다. 축협중앙회노조에서 찾아왔다. “고생들 하시는데 힘내시라고…”. 우유 11상자와 훈제계란 33판을 가져왔단다.
그렇다고 온종일 농성장만 지키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다들 일을 좇아 끊임없이 드나든다. 4시가 조금 넘어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일을 보던 이수호 사무총장이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컨테이너 농성장 철거 때 무릎인대가 파열돼 한쪽 다리를 온통 깁스로 고정시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총장이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나서 상황을 공유하고, 대책을 의논한다. 간단한 사안은 그 자리에서 처리된다. 그 사이 건설노련에서 모닥불 땔감으로 쓸 화목 한 트럭분을 보내와 와르르 쏟아놓았다. 6시쯤 돼서 단위원장이 다시 자리를 뜬다. 이번에는 민주관광연맹과 전해투의 일일호프에 들러야 한다.
어둠이 깔리자 소형 발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천막마다 전등이 불을 밝힌다. 9시가 되면서 텔레비전도 켜졌다. 뉴스를 보기 위함이다. MBC뉴스가 민중대회 ‘폭력사태’를 기획으로 다룬다. 이번엔 ‘시위대도, 경찰도 문제가 있다’는 양비론을 편다. 언론홍보를 맡은 손낙구 교선실장의 표정이 더욱 어두어진다. 손실장은 지금껏 “2차민중대회는 농민이 주력이었고, 절박한 농민문제를 외면해온 정권에 책임이 있다”, “민주노총의 주요요구는 전임자임금이 아니라 노동시간단축”이라고 목이 아프게 설명했는데도 계속 비뚫어진 방향으로 몰아가는 언론의 태도에 부아가 치민다.
날씨도 더욱 쌀쌀해진다. 가스가 다 떨어져 가는지 난로의 불꽃도 시원찮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어쩔 수 없다. 하룻밤 그냥 버틸 수 밖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 눕는다. 천막촌의 고단한 하루가 저문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