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이영미(문화평론가)
기술진보와 인간의 행복
독일의 노동자 출신 희곡작가 크뢰츠란 사람이 쓴 ‘수족관’이란 작품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88년에 초연됐는데, 나는 작년에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작가의 중요한 문제제기에 공감하게 됐다.
이 작품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납활자로 조판을 하는 옛날 방식의 식자공들이다. 수많은 활자들을 빠르게 맞추는 일은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도 이제 납활자 인쇄본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는데, 이 연극에서도 컴퓨터 조판방식이 도입되면서 납활자 식자공은 필요 없게 돼버렸다. 사업주는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기 직전에 공장을 팔아치웠고, 새 사업주는 컴퓨터 조판방식으로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대량의 정리해고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두 명의 의견이 갈린다. 한 명은 기술의 발전을 노동자의 발전으로 연결시켜야 하므로, 노조의 단결력으로 회사쪽에서 정리해고 대신 납활자 식자공들이 컴퓨터 식자교육을 받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한 명의 노동자는 이보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자신은 그간 열심히 노력해서 특정기술을 숙련했는데 이제 또 다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마흔이 된 자신의 손은 이미 납활자에 익숙하게 뭉툭해졌으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은 고등학교를 갓 나온 여성노동자들이 훨씬 빠르고 능률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의 단결된 힘으로 정리해고를 모면할 지라도,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른 사원들보다 훨씬 일을 못하면서 월급만 꼬박꼬박 챙겨가는 밥벌레로 살기는 싫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나는 두 입장에 다 공감한다. 기술의 발전은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진보를 노동자의 단기적인 이해관계로 가로막으면 안된다. 결국 기술의 진보를 노동자의 궁극적 이익으로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도기에 발생하는 부작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첫 번째 노동자의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런 문제에 부딪친 노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노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일단 접어두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충분히 옳다. 과연 중년이 되어 새로운 기술을 배워서 얼마나 세상에 기여하며 잘 살 수 있겠냐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런 현상이 특정 시기, 특정 직종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 직종에서 항시적으로 생겨날 것 같다는 예측이다.
기술혁신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이제는 중년이 돼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로 듣기에는 항상 새로워지는 생기발랄하고 멋진 세상 같아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라. 참 끔찍한 세상이 아닌가. 연극의 주인공은 이렇게 항변한다. 인간은 20대에 배우고, 40대에는 배운 것을 써먹으면서 사는 거라고. 그런데 기술 혁신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제는 20대 때 배운 것으로 평생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는데 그럼 20대에 배우고, 40대에 또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60대에도 일을 하려면 또 다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청년기를 지난 인간이 둔해진 머리와 둔해진 손으로 새로운 것을 자꾸 배우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게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인생싸이클과 기술의 진보 속도가 잘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빠른 기술진보는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셈이 된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의 수명을 줄이거나, 기술진보의 속도를 적정한 속도로 조절하는 일일 것이다. 환경과 생태계를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은 지구생태계가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을 내놓는다. 그러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은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과연 속도가 조절될까?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풀리지 않는 생각을 하면 이 세기말에 나는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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