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가의 운명에 대한 예측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를 이미 `20세기의 유물’쯤으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있는가하면, 세계화가 가져올 `부익부 빈익빈의 재앙’을 막을 마지막 방파제로 바라보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 또 20세기 국가의 `내용을 채우던’ 민족주의 역시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과연 민족주의는 공동체 담론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공동체’에 자리를 내주고 마는 것일까?
계간 <당대비평>(삼인 펴냄)과 <창작과 비평>(창작과비평사 펴냄) 봄호가 모두 이 주제로 특집을 마련했다. <당대비평>의 특집 `동아시아 지성의 고뇌와 모색―지구화와 내셔널리티 사이에서’는 한·중·일 세 나라 지식인이 세계화 바람 속에서 허물어지는 민족주의의 모습과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담았다. 반면 <창작과 비평>의 특집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에는 남북통일, 시민운동, 사이버공동체 등 구체적인 움직임들이 어떻게 새로운 흐름을 형성할지를 논하는 글들이 실렸다.
두 계간지는 특집에 이어 긴급진단·긴급의제라는 형식으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 의의 평가 좌담’도 똑같이 마련했다. 특집과 좌담이 같아지면서 두 출판사 내부에서는 “스파이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말이 나돌았다는 후문이지만, 그만큼 이 주제들이 지닌 절박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읽힌다.
<당대비평>에서 세 나라 지식인은 모두 동아시아 민족주의가 새로운 모습을 요구한다고 입을 모았다. 임지현 교수(한양대·사학)는 `한반도 민족주의와 권력담론’이라는 글에서 “한반도 민족주의는 해방의 담론이기보다 권력의 담론이었다”고 비판한다. 임 교수는 애초 식민지시대에는 “민족은 공동체 또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민족주의는 저항의 담론이었다고 밝힌다. 하지만 저항의 담론이 꼭 해방의 담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임 교수는 해방 뒤 이승만 정권은 체제순응적인 `애국적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 “일장기를 태극기로, 천황의 사진을 대통령의 사진으로 바꾸었을 뿐” 국가에 대한 복종을 일제식민지시대처럼 되풀이했다.
임 교수는 한국의 경우 97년말 외환위기로 이런 국가주의적 근대화모델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민족주의의 새로운 모색기’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한다. 이제 민족주의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가 과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조심스럽게 “20세기 민족주의에서 배제된 타자와의 수평적이고 다층적인 연대”를 통한 `시민적 민족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강상중 교수(도쿄대)와 요시미 순야 교수(도쿄대·사회학)는 `혼성화 사회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일본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음을 지적한다. 전후 일본 사회는 “국가나 개인보다는 회사와 같은 소규모집단이 공동체의 핵심”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개인 인권 신장을 막는 구실도 했지만, 국가주의가 강력히 떠오르는 것도 저지하는 구실도 했다.
그러나 두 교수는 최근 10년간 `거품경제’가 걷히면서 소규모집단의 `공동체 담지자’ 기능도 눈에 띄게 약화됐다고 지적한다.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도 일본 신우파의 부상은 바로 이런 공백을 파고드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두 교수는 이와는 반대로 재일 한국·조선인의 모습에서 `디아스포라(흩어진)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지적한다. 전세계에 500만명 가량 흩어져 있는 한국·조선계 동포들이 예전처럼 `민족주의’라는 단일 깃발로 뭉쳐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지역사회와의 관계성 △국적 문제 등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는 공동체로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일본사회에서 지역적 차원의 참정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창작과 비평>에 실린 글들은 이런 전체적 흐름을 전제로 개별적 변화 지점들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비평>의 특집과 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박명규 교수(서울대·사회학)는 `복합적 정치공동체와 변혁의 논리’에서 국민국가가 인식론의 범주로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사건과 변화를 국민국가라는 공간과 국가의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이해”해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인식틀로는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밝힌다. 그는 따라서 월러스틴의 장기적-세계적 시공간, 혹은 그보다 범위가 작은 국면적-지역적 시공간 인식의 유용성이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박 교수는 이중 동아시아를 주된 분석단위로 하는 국면적-지역적 시공간 인식에서 볼 때, 한반도의 통일은 큰 중요성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일본의 시민사회운동, 중국의 인권운동이 모두 국민국가적 틀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지만 장기적으로 그 한계를 뛰어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들이 민족주의가 지닌 편협성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때 “한반도의 통일과정은 하나의 시험장”이다. 박 교수는 한반도 통일이 현재 국민국가체제에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개별 국가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는 반면, 현 권력단위 안팎의 변혁을 통해 새로운 관계와 연대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조효제 교수(성공회대·사회학)는 `시민사회의 변화와 주권의 급진적 재편’에서 시민사회론의 핵심을 “국가 주권의 약화로 인한 공백을 시민의 자발성으로 메울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요약한다. 그는 법·의학·교육 등 `전문가 시스템’에 시민사회가 적극 개입해들어감으로써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에서 국가의 작동기제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보근 기자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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