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새천년’ 이땅의 여성노동자
3.8 여성의 날에 만난 사람/ 이혜선 공공연맹 부위원장
“여성간부라고 여성사업만 하라는 법 있나요?”
‘편견’에 맞서는 ‘유일한’ 연맹 여성임원…”여성간부 발굴·육성해야”
이혜선 공공연맹 부위원장은 민주노총과 소속 산별연맹에서는 유일한 여성임원이다.
여성노동자로만 조직된 여성노조연맹(위원장 정인숙)이나 여성조합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보건의료노조(위원장 차수련)를 빼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 두 곳 말고는 단위노조 위원장 가운데서도 여성이 드문 실정이다. 여성 30%할당제를 도입해도 이를 채우기 어렵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공공연맹(위원장 김연환)은 지난 해 3월 창립하면서 4명 이내의 부위원장 중 한 명은 반드시 여성으로 뽑도록 규약에 명시했다. 지난해 9월 이혜선 부위원장의 탄생은 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 만큼 많은 사람이 그가 당연히 여성사업을 맡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주변에서 부위원장으로 나서라는 제의를 받으면서도 여성사업을 ‘관할하는’ 구실보다는 ‘9만3천명의 거대조직, 게다가 대의원의 90%가 남성인 조직의 부위원장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가 고민거리였다. 여성사업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성사업을 맡는 걸 당연시하는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결국 임원 사이의 업무분담이 마무리되면서 관심을 가져온 사회복지위원회쪽을 책임지기로 했다.
한편 그가 노동조합 일에 발벗고 나선 것은 공교롭게도 지난 94년 노조가 무너지면서부터다. 그해 KDI 출신 연하청 씨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분기별 차등성과급제를 도입,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차별은 부쩍 심해졌다. 연원장은 노조관은 둘째 치고 뒷날 건강연대나 시민단체들이 ‘의료보험통합 5적’으로 꼽을 만큼 악명을 날린 이였다. 90년 결성된 노조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비조합원 가운데는 3년 동안 세번씩이나 승진한 사람도 있었으나 조합원들은 무조건 소외되니 당해낼 장사가 없었다. 노조탈퇴가 줄을 이었고 그후 1년 동안 노조는 이름만 남고 사실상 휴면상태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95년 노조가 재건되면서 활달하고 의욕적인 그가 사무국장을 맡게 됐다. 조합원 1백여명이 30여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재건된 노조는 연원장의 비슷한 수법에 다시 당해야 했다. 제대로 대응할 만한 힘도 없었거니와 이미 차등성과급제가 정착돼 이를 문제삼는 사람이 되레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대응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그의 몸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고 배는 점점 불러왔다. 산전산후휴가를 마치고 나니 노조는 다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 뒤 1년반 동안 단체협약은 완전히 해지됐고 노동부는 ‘해산권고’까지 내렸다.
97년 11월 IMF를 맞아 여기저기서 구조조정이 시작될 때 남은 무기는 그래도 노조밖에 없었다. 뜻있는 동료들과 다시 노조 재건에 나섰다. 위원장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으니 결국 그의 몫이 되고 말았다.
“노조위원장으로서는 안좋은 조건만 갖고 있었죠. 연구원이 대부분인 사업장에서 관리직인데다 나이는 30대 초반, 게다가 여성인 것은 치명적이었죠.” 무너진 단체협약을 체결하려 교섭에 나선 그에게 사용자쪽은 “누가 시켜서 위원장 하느냐”고 비아냥댔다. 잇딴 노조와해에 ‘해도 안된다’는 패배의식에 휩싸인 조합원들을 뒤로 하고 청와대 수석진출설까지 나도는 원장과 홀로 싸워야 했다. 한바탕 ‘교섭전쟁’을 치른 뒤 사용자쪽이 그를 불러 내지르는 말이란 “미스리, 여자가 애를 생각해야지 노조 때문에 애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그러면 돼?” 그렇게 일곱달을 싸운 끝에 98년 6월 마침내 단체협약을 맺었다.
“가장 진보적인 노동조합운동이 때로는 매우 보수적이죠. 여성들의 노조조직률이 낮은 탓이기도 하지만 노조차원에서 여성간부를 발굴하고 지도자로 키우려 노력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요. 누군가 그 일을 해야합니다.” 선이 굵은 그녀의 얼굴에서는 강인함이 배어나왔다.
정경은 joungke@kct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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