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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과 자본주의, 그리고 새로운 공학

Composition, Capitalism and the New Technology

데이빗 호크스 / 권경우(문화평론가) 번역

많은 미국인들이 국기 모독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대의·재현(representation)을 숭배하는 태도, 즉 국기가 단순히 미국의 상징이 아닌 화신(化身)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것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반미투쟁의 광경으로서 불타는 국기 뒤에, 그리고 그러한 광경들을 TV 뉴스에 내보낼 수 있는 탁월함 뒤에 따르는 추론이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외국인 시위자들의 상징적 우위들이 확장되었다. 이번 주에 벨그라드(유고슬라비아의 수도:역주)에서 반미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처음으로 태운 것이 맥도널드사였는데, 이는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사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맥도널드사는 세계 곳곳에서 문자 그대로 미국의 구현, 체현으로 해석되어왔다. 사실, 그 밖의 세계에 대해 마치 대사와 같은 맥도널드사의 충분한 호소력은 식당 건물들이 해외에 있는 미국 영토의 축소형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으며, 하나의 한 국가를 구현하는 곳은 어디인가?

1983년에 맑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고대 수사학의 현대화된 변형이 문학연구를 대체함을 충고하면서 원리로서의 문학연구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담은 『문학이론입문』(Literary Theory)이라는 중요한 입문서를 마무리지었다. 급진적인 수많은 문학 선생들과 같이, 이글턴은 정전으로 인정받은 텍스트의 확정적인 형태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정치적으로 억압적이었다고 확신했다. 1980년대에는 서구 정전이 특권을 갖고 있어서 특별한 사상의 전통을 영속시킨다는 점은

거의 자명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천년 동안 발전해오면

서 그러한 사상의 전통은 사회적인 권력 지위를 소유한 사람들의 이익에 봉사한다. 상류 백인 계급이 문학 정전들을 불균형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이 자주 주목을 받았고, 이러한 가설은 당연히 그 정전이 편파적이고 특정적이고 편견을 지닌 백인 상류 계급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결과 그러한 정전은 하위적 인종과 계급들, 그리고 성(gender)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반면, 정전 그 자체는 만만하게도 보편적 가치의 우월한 저장소로서 당연히 행세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글턴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경직된 문학 정전보다 수사학이라는 주제가 더욱 자유로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수사학이 근본적으로 참여적이고 평등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수사학은 진리 혹은 가치의 절대적인 기준의 실존을 전제하지 않는다.(실제로는 암시적으로 부정한다) 그보다 수사학은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어떤 집단이나 이익의 도움에 헌신할 수 있는 설득의 기술이다. 결과적으로 인문학 내부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은, 수사학이 문학을 대체함으로써 하위 집단들이 지금까지 남의 것이었던 전통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쉽게 변하는 주체 위치들의 점유에 의해 생산되는 경험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되는 힘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 학자로서 이글턴은 자신의 결론이 글쓰기 혹은 작문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이제 막 출현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이미 도달한 것과 얼마나 유사한 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지모른다. 영국에서는 작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대학과 대부분의 중등학교에서 미국의 글쓰기(writing) 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없다. 이론화되지 않고 심지어는 표현되지 않은 가설은 글쓰기를 배울 수는 있지만 가르칠 수는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영국의 교육체계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조직되는데, 이유는 읽기에 의해서 글쓰기를 배우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전제는 뿌리깊고 심지어는 무의식적인 엘리트 사회의 그것이다. 이 전제는 학생들이 존속 가능한 규범 문학의 지식, 일반적인 관습들에 대한 수용 가능한 친밀성, 그리고 스타일적 태도 등으로 인해서 요구에 대한 충분한 접근을 독립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개별 지식인들이 학생들에게 대개 피상적인 인사치레만을 건넬 것이지만, 이 학생들이 백인 남성 헤게모니의 세기 동안 고착된 개념적 틀 내에 어쩔 수 없이 갇혀있는 것이라는 확언은 은연중에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규범적인 문자해독력(literacy)의 기준에 따르면, 글쓰기를

교육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미국보다는 영국의 학생들이 모든 단계에서 글을 더 잘 쓴다는 점은 양국의 교육체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규범철학의 기준에 의하면 추론 능력이 결코 대안적이고 전통적으로 주변화된 사고체계보다 더 뛰어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기준들이 진부한 것이거나 사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논의에 따르면, 그 문제는 플라톤의 ‘대화'(Dialogues)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즉 플라톤은 객관적 진리보다는 주관적인 것에 호소한다는 이유로 수사학을 철학보다 격하시키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중들의 개념을 연구해 온 수사학자가 청중들의 편견과 오해에 호소하기 위해서 담론을 교묘하게 조작한다고 말한다. 수사학자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대중들을 설득하는 데 관심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진리와 오류의 비참한 혼란 속으로, 나아가 선과 악의 끔찍한 혼동 속으로 추락한다.

달리 말하자면, 수사학자는 잘못 이끄는 민중 지도자라면 철학자는 온화한 독재자이다. 철학자의 능력과 훈련은 객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데, 그 진리는 철학자가 그가 획득한 지혜를 가르치고 싶은 이들에게는 반드시 거절당하는 그런 것이다. 반대로 수사학자는 사람들이 이미 소유하면서도 배우지 않은 견해들을 자신의 도구로 취해서 당연히 사람들에게 설득적으로 보이는 논의들을 형성한다. 수사학이 만드는 가설은 주관적 의견이 단지 그것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타당하고 가치 있다는 점이다. 수사학적 시각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의 객관적 진리는 단지 이데올로기이다. 즉 그것은 타자들에게 그 자체를 강요하고 속여서 스스로가 보편적인 것처럼 행세하는 특정한 계급과 성의 편파적인 선입견이다.

현재 실시되는 것처럼, 작문의 원칙(흔히 작문과 수사학으로 언급되는)은 수사학적 관점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작문의 지배적인 표현주의 이론은 글쓰기의 목적이 글쓰는 이의 구체적이고 특별한 주체-위치(subject-position)에 의해 생산되는 구체적이고 특별한 태도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전제에 기대고 있다. 이 분야에서 일해 온 사람들은 누구나 학생들의 권한, 학생 위주의 교실, 그리고 학생들의 삶을 교실로 들여오는 데 따르는 학생들의 힘의 증가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에 익숙할 것이다. 자기 표현이야말로 글쓰기의 목표라고 믿는다면, 의사소통의 규범적 양식을 가르치는 것이 사회적 하위그룹 사람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기만이라는 점은 너무 당연하다. 그래서 작문이론가들은 종종 문학 정전의 적대자들이 하는 논의를 반복한다. 학생들이 자신 스스로의 주관적인 경험들에 관한 주체적인 목소

리들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여성과 소수자들과 같은 사회적 주변부 집단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문 교과서는 대개 개인적 경험의 다양한 양식들을 살펴볼 수 있는 것과 관련된 텍스트로 구성되며, 보통 이 과정을 가르치는 대학원생들은 그들의 석사학위를 위한 유사한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마치 백인 남성들이 항상 백인 남성들의 사상을 탐사해 온 것처럼, 여성들은 여성의 글쓰기를 연구하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 글쓰기의 역사를 드러내는 등등. 학생들이 받아들인 이 메시지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무매개적이고 주관적인 반영이 그들의 정확도 혹은 성실도에 따라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 포스트모던 낭만주의의 변종 형태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유기적 감수성 그 이상을 지닌 인간의 영혼을 나타내는 워즈워스의 엘리트적 열망은 모든 주체-위치들의 역학을 발가벗긴 엄격한 결정에 의해 대체되어 왔다. 개인의 초월적 재능이라는 낭만주의 개념은 민주화되어 왔다. 그래서 현재 모든 사람의 내적 반영들은 글로 쓰여진 표현과 평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말로 작문과정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쓰는가에 관해서 가르치도록 구성되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일화와 경험의 증거 영역으로 후퇴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든 것의 안내 역할을 한다면 평균적인 학생들은 한 학기 과정에 걸쳐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에서 전적으로 개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문학을 가르치는 훈련 중에 있는 사람들과 현재 자신의 고용을 더 큰 야망에 이르는, 동의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단계로 생각하는 사람

들은 매우 자주 작문을 배운다. 대체적으로 학생들은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고, 그들은 자주 이 강제적인 참석으로부터 잃게 되는 어떤 이익들을 분명히 이상하게 여긴다. 그리고 물론, 대학원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치게 하는 이유가 대부분의 대학들이 오직 어떠한 문학의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유지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작문의 목적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어떤 사람은 미국의 고등교육제도를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로부터 많은 추측을 했을 지 모른다. 자끄 데리다는, 플라톤의 대화에 대한 비판에서, 초월적 진리에 이르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적 노정이 글쓰기의 창조성에 의해 위협받는 것 같다고 적고 있다. 작가의 신체적 현존을 필요로 할지라도, 글쓰기는 고정된 주체-위치에 대한 잠재적인 전복성을 지니고 있다. 글쓰기의 중요성은 그것이 교묘히 빠져나가며, 복수적이고 가변적이라는 데 있다. 데리다에게 있어, 글쓰기는 철학적 객관성의 억압된 타자(Other)처럼 기능 한다. 그와 같이 글쓰기는 더욱 변형되고, 적대적이고 심지어 여성적인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 의해 추앙 받고 고양되어 왔다. 글쓰기를 재현의 자유로운 놀이를 구현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데리다적 술어학은 글쓰기의 개념을 해방의 개념, 그리고 억압적 이성으로부터의 리비도적 자유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강력한 수사학적 충격을 수반한다. 후자는 종종 정치적 전체주의와의 반(half)의식적 제휴와 함께 전체화하는 것으로 비난받는다. 이렇게 적당히 동화된 후기구조주의는 최근의 작문 이론에서 새로운 공학의 이른바 급진적 가능성에 대한 온화한 관심과 결합한다. 오늘날 4대 회의(미국의 가장 중요한 작문 회의)에서 성차별이라는 토픽은 하이퍼텍스트의 교육학적 가능성이다. 오디오와 비디오, 네트워크 연결을 글쓰기 영역에 도입함으로써, 하이퍼텍스트는 선형적인 서사의 전통적 형식으로부터 이탈을 가능하게 한다. 하이퍼텍스트는 고대 세계가 수사학적인 것으로 인식했을 지 모를 비이성적인 기술들을 통한 설득을 고려한다.

많은 사람들은 논의하기를, 학생들이 광고와 전자 미디어에 의해 오랫동안 종속되어 온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힘을 부여받는 것이 하이퍼텍스트 때문이라고 한다.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Mythologies)과 같은 작업들이 그러한 기술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들을 제공했다. 바르트가 믿는 기술은 세계와 만나는 전(pre)이성적이거나 신화론적 양식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3색기(프랑스 국기:역주)에 인사하는 흑인 병사가 나오는 잡지 표지에 대한 유명한 분석에서, 바르트는 사진이 이성적인 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교묘한 수사학적 조작에 의해서 보는 사람을 프랑스 제국주의에 관한 복잡하고 논쟁적인 결론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설명한다. 성조기에 대한 물신화 경향과 마찬가지로 사진은 우상 숭배적인 인식론을 전제하며, 여기서 기호들

과 그 지시대상들 사이의 구별이 붕괴되었다. 학생들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들은 그러한 기술들이 조장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조작 개념은 떼어낼 수 있는 객관적 진리의 실재를 전제한다. 이것이 유사 데리다적 작문 이론이 마지못해 용인하는 개념이다.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하는 학생들은 스스로를 수사학에 저항하는 논리학의 수호자로 간주하지 않으며, 그들은 선형적 형식과 이성적 내용의 횡포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단어와 이미지의 분별 있는 융합을 통해 그들의 주관적인 경험들을 표현하고 있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놀랍게도 그들의 글쓰기에서 비롯되는 논쟁적인 전언들에 의해 모순된다. 작문 교사들은 종종 그들의 요구에

의해 표현된 기호와 사상의 놀랄만한 불일치성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 자아가 표현되고 있다면, 놀랍게도 그것은 합의에 바탕을 둔 응집적 자아이다. 자유로운 작문 이론가들이 말하는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수사학적 강조가 책략인 것처럼, 자아는 급진적 일치를 숨기며 견고한 일치의 부여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해 연상된다.

앨런 블룸(Allan Bloom)은 많은 비난을 담은 그의 책 『미국 정신의 끝』(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의 첫머리에서, 현대 미국 대학신입생 교사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학생들이 다원주의자라는 것뿐이라고 적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든 주관적인 시각들이 타당하며 선입견만큼 한탄스러운 것은 없다고 믿을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은 모든 주관적 시각이 타당하다는 자신의 의견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편견에 치우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관용은 전체주의적이다. 즉 그들은 주관적인 다원주의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타당한 위치로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블룸이 지적한 대로, 20세기말에 모든 미국학생들이 이것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과장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스탈린이 꿈꿀 수만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합의를 즐기고 있다. 학생들에게 쓰는 방법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까지 가르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자랑하는 작문은, 모든 개인이 독특하지만 또한 평등하다는 원칙을 가르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개인주의와 평등주의 사이의 모순은 너무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의 부과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에 그 모순은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다. 작문은 자아표현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우연히 포스트모던 주체의 객관성을 드러낸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서, 노동의 상품화가 실제로 인간 경험을 고르게 했다면 정치적 평등주의를 생각할 수 있게 됨을 지적한다. 일단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돈의 배분으로 동등하게 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위로서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왔다면, 다른 인간들이 지닌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 차이들은 이러한 양적 유사성으로 대체된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물질 세계에서 작동하는데, 따라서 질적으로 다른 대상의 사용가치들은 단지 교환가치에서의 양적인 변화에 의해 흐려진다. 사람들과

세계에 대한 이러한 규격화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개념을 낳는다. 이 개념은, 맑스가 미처 예견하지 못한 나중의 형태에서, 모든 의견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는 개념을 낳는다. 동시에 기호를 지시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순수한 재현의 자유로운 놀이에 탐닉함으로써, 그것은 주관적인 경험이 끝없이 변화되며 다면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창조한다. 물자체(thing-in-itself)에 대한 상품형태의 승리는 동일성의 현실을 감추려는 차이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상징으로서 맥도날드사 체인점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다. 맥도날드사의 호소력은, 생산품 그 자체는 하등의 사용가치도 갖지 못하는 반면, 분명히 그 가게들과 생산품의 전세계적인 획일성에 있다. 그러나 그 호소력은 그와 연관된 이미지들을 통해서 독자들을 유혹한다. 세르비아인들이나 이라크인들이 맥도날드사를 폭파할 때, 그들은 진실로 자신들이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던 전쟁에서 기호에 대한 공격이 곧 지시대상에 대한 공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맥도날드사에 의해 상징화된 그 지시대상은 단지 미국, 나토, 혹은 심지어 서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장으로 알고 있는 전체주의적 다원주의 체계이다. 작문 이론가들이 논리보다 주관성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학생들이 믿도록 조장할 때, 이미지 조작을 이성에 대한 타당한 대리자로 제시할

때, 선형적 서사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새로운 공학을 이용할 때, 작문이론가들은 자신들이 계급과 성, 인종 평등의 평등주의 운동에 복무하고 있으며 또한 거의 옳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획일성이라는 화폐로써 그러한 평등을 획득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야기된 정치적 무감각과 무지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격인 지를 묻는다. ▣

본 글은 Subjects 1999년 6월호(제44호)에 실린 글이다. 데이빗 호크스는 펜실베니아주 베들레헴의 레이하이(Lehigh) 대학의 영어과 교수이며 가장 최근의 저서로는 Ideology (1997, Routledg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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