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노동자가 위험하다
고된 일에 짓눌려 유산 ‘다반사’
퇴직강요하는 현실에 하소연도 못해
임신한 노동자들이 모성보호의 사각지대에 내몰려있다. 임신 중에도 격무에 시달릴 뿐아니라 유산이 되더라도 그 아픔을 혼자서 삭여야 한다. 충분히 쉬지도 못한다. 겨우 연월차를 며칠 쓴 뒤 다시 나와 일한다. 주변에서는 그런 일을 겪었는지조차 모르고 넘어간다. 임신하면 퇴직을 강요받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소속 산업별연맹 차원에서조차 보건의료노조(위원장 차수련)를 빼고는 임신 노동자의 노동조건이나 환경에 대해 실태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는 실정이다. 상대적으로 조직력과 교섭력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는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이 이 정도라면, 노조가 없거나 영세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임신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떨지는 짐작하고도 남을만 하다.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 가운데 여성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학교, 병원, 백화점 등에서 유산하는 임신노동자가 적지 않아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보건의료노조가 지난 98년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에 따르면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유산비율은 다섯명 중 한명 꼴인 무려 22.8%로 일반의 수치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병원에서 일하다 임신한 여성노동자들은 여느 노동자와 똑같이 고된 3교대 근무와 야간근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병원 노동자들은 유산의 원인이 몸이 약해서(12%)라기 보다는 일이 힘들거나 교대근무(밤근무)의 영향 때문(36.6%)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81%가 밤근무가 유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응답자의 75%는 임신여성의 밤근무를 없앨 것을 요구했다.
전교조의 한 간부에 따르면 학교현장에서도 여교사가 유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는 특히 담임을 맡은 임신 여교사에게 3월은 최악이라고 전했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때여서 생활기록부 정리, 학생면담, 환경미화, 가족환경조사서, 건강기록부 작성, 학급임원 선출에 1년 수업계획 작성까지 온갖 업무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이나 대형서점의 경우도 임신노동자들의 유산사례가 적지 않다. 한 대형백화점 노조의 여성간부는 “조합원이나 파견사원들이 유산된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가 안됐을 뿐 백화점의 노동강도와 작업내용으로 볼 때 유산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허리에 열쇠꾸러미를 몇 개씩 차고 하루에도 창고와 매장을 수도 없이 오가며 무거운 짐을 들고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여성간부에 따르면 특히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는 협력업체 소속 여성노동자들은 임신초기에 사표를 내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임신한 여성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해 회사쪽은 전혀 관심 밖이다. 오히려 임신부를 노동강도가 더욱 센 곳으로 전환배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실정이다. 이를 연기해달라고 요구할라치면 “인원이 모자라 어쩔 수 없다”거나 “운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식이다. 유산끼를 느낀 한 사립학교 교사는 학교쪽이 장기휴가를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의 임금을 내주는 조건으로 임시직 교사를 알선해 채용케 한 사례도 있다.
유산한 뒤 휴가를 얻기도 힘들다. 지난해 한 사립학교에서 일하던 한 여교사의 경우 유산 뒤 학교쪽에 요양을 신청했으나 진단서 첨부 등을 요구하며 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백화점이나 서점의 경우도 ‘집안일’을 이유로 2∼3일, 길면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낸 뒤 출근해 다시 강도 높은 일을 하기가 일쑤다.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도 유산 뒤의 몸조리는 산후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상식에 비추어 여성노동자들의 건강에 장기적으로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문제는 그것이 미칠 심각한 악영향을 잘 알면서도 임신노동자 대부분이 열악한 작업환경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회사쪽이 적정인력을 확보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두가 고달픈데 임신했다는 이유로 혼자 편하자니 동료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건비를 아끼자는 천박한 자본의 논리가 고귀한 새 생명이 모태에서 건강하게 자라 세상에 나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한편 임신 노동자들이 자신의 모성보호에 소극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편견’이다. 즉 유산이나 유산징후를 놓고 지금까지는 그 책임을 대부분 개인의 부주의로 돌렸을 뿐, 고된 업무에 원인이 있다는 진단이 나온 적이 없다는 점이다. 노조로서도 유산이 ‘밤근무 때문’이라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워 회사쪽에 문제제기가 어려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경은 joungke@kct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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