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연대 Section2 : 아시아 연대

아시아는 싸우고 있다

동티모르와 동남아시아 안보

-동북아 안보 네트워크 특별보고서-

웨이드 헌틀리와 피터 헤이슬

지난 호에 이어 연재됩니다.

1. 미국의 책임

2. 공동의 지역적 안보-유엔과 아세안국가연합

3. 지역안보의 헤게모니- 오스트렐리아

4. 위험한 가정과 결론

공동의 지역안보-아세안국가연합과 유엔

독립투표가 다가옴에 따라서 동티모르에서의 폭력사태는 시시각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폭력사태와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신속한 군사적 개입은 절대적으로 선결해야할 과제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개입방식이나 구성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국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일부 논자들은 아세안 국가들과 아세안 지역 포럼(ASEAN Regional Forum 이하 ARF)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테면, 월든 벨로는 아세안이 평화유지군을 구성할 수 있도록 즉각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미국과 호주는 과거 동티모르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과오을 남긴 전모가 있기 때문에 동티모르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하는 모든 국가는 유엔과 아세안국가연합의 승인 하에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유엔의 승인 하에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지만 아세안국가-그것이 집단적이든, 개별국가든 간에

-들은 의미 있는 정치적 리더쉽의 역할을 수행할만한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리차드 텐터(Richard Tanter)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ARF가 동티모르 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 아무런 기여도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에 분쟁을 해결하고 예방할 수 있는 실험적인 여러 기구들이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ARF는 아세안 국가연합간에 인권침해와 관련한 의제를 지난 시기에 한 번도 상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신에 ARF와 아세안국가연합은 인권을 존중하기 위한 여러 규범들을 국제적 수준으로 상향시켜내지 못하고 인권 탄압이 극심했던 미얀마와 관련해서 다루었던 전례정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비정부기구인 아시아-태평양 안보협력위원회(The non-governmental Council for Security Cooperation in the Asia Pacific 이하 CSCAP) 건설과정 또한 ARF에서 논의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답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정부차원의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방지할 수 있는 필요한 기구나 경로가 ‘국가안보’사안과 직결될 때는 상당히 위축되어 나타난다.

마치 텐터의 논리를 반증하듯 수반하는 몇몇 사건이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 시 일어났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가 평화유지군을 구성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며 미국이 배후에서 이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인도네시아는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아세안 국가들에게 더욱 적극적인 불만을 표시했고, 다른 아세안 국가들은 파병 상에 까다로운 조건과 논쟁을 벌였다. 말레이시아경우 지난 평화유지군의 활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전개되었을 때 거북스런 반응을 비췄다. 또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오스트레일리아 다음으로 명령권을 태국에게 부여한 후에 다국적군의 배치에 한참일 때 제외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태국은 슈린 피트슈완(Surin Pitsuwan) 외무장관이 군부세력에 대항하는 등 내부적으로 긴장국면에 직면하자 자국의 입장에 혼선을 빚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필리핀 역시 다국적군 구성에 있어 상당한 군대를 파견했음도 불구하고, 동티모르 상황에 대해 국제적인 조사 수행여부를 결정하는 유엔 인권위 투표에 반대했던 중국이 참가하자, 자국의 입장을 모호하게 밝혔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개별적이든 집단적이든 아세안 연합국가들은 위기상황시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셈이다. 아세안국가들이 이처럼 동요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 국가들에게 보편적인 인권규준을 수용하라는 압력에 대해 “타 국가들의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전에 존재했던 정책조정과 공동행보의 메커니즘이 약화됨에 따라 아세안 국가연합의 무방비와 관성이 중층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부과하여,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미국과 같은 모든 국가들이 가난하고 약소한 동티모르의 인권을 파괴하는 사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석유산유국인 인도네시아를 정치경제, 안보관계상 치명적인 조치를 취하는데 꺼려온 데도 그 이유가 있다. 아세안연합국가의 무방비로 인해 예

상되다시피 한 결과들이 드러난 셈이다. 평화유지군의 효과적인 파병요구는 이 지역에서의 안보딜레마와 여타 긴장요소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ARF가 미래의 역할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셈이다. 그

러나, 효과적인 기회를 잡는데 실패한 ARF는 총체적인 무능력을 보임으로써 미국과 호주, 여타 동맹국들 그리고 무엇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유엔에게 아세안 지역의 리더쉽을 위탁한 결과를 초래했으며, 게다가 동남아지역이든 아니면 아시아-태평양 연안이든 이들과의 지역 안보협상과 관련해서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있다는 관념도 종결된 셈이다. 요컨대, 지역안보의 조정과 협상을 진행하는데 있어 지렛대 기능을 수행해야 할 ARF가 계속해서 불안전하게 운영되어 왔으며, 가까운 미래에 ARF나 여타 지역기구들이 안보정책과 활동을 수행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재획득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의미 있는 자치적인 안보기구 부재와 지역적 주도권의 공방은 또 다시 강대국에게만 그 통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안보의 헤게모니- 오스트레일리아의 역할

동티모르 위기 시 미국의 역할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위 역시도 주목해 보아야 한다. 특히 이러한 위기로 인해서, 존하워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자국의 외교정책과 향후 몇 년간 지역안보상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자국의 역사적인 접근을 재규정하는 기회를 지닌 셈이다. 1942년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가 영국의 안보를 제한하자고 주장했던 이래로 오스트레일리아는 자국의 서방 정착민과 아시아 지역과의 긴장에 직면해오고 있었다. 외교정책에 있어 이러한 긴장은 영국과 미국과의 제휴를 지속시켜 균형을 찾으려는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인접한 또 다른 주변국간의 교류를 증진시키려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

서 오스트레일리아는 풍부한 자원과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와의 관계가 자국의 외교정책을 입안하는데 있어 제일의 도전과제였던 것이다.

1960년 중반부에 친 서방 수하르토 독재체제가 들어서자 오스트레일리아 정책 입안자는 인도네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적어도 대결정책 기조를 개선함으로써 수하르토 정권과의 우호적인 교류를 유지시키는데 주력했다. 이런 정황에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과 억압은 환영받지 못할 자극제였던 것이다. 와이트람(Whitlam)정부는 이러한 침략을 비난하고 많은 동티모르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입안자는 자카르타와의 관계유지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다.

1993년 밥 호크(Bob Hawke)와 파울 키팅(Paul Keating)의 노동당이 집권하자 인도네시아와 호주와의 관계를 더욱 증진시키는데 노력했으며, 특히 인도네시아와의 군사적 교류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관계개선은 1985년에 들어서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와의 통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며 1995년 12월에 “안보 유지관련 협정(Agreement on Maintaining Security 이하 AMS)”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AMS는 비밀리에 협상이 진행이 되었으며 상당한 논쟁이 의회 내에서 벌어졌다. 지지하는 세력들은 자국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주변강국과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존 하워드를 필두로 한 반대세력들은 AMS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 즉, 오스트레일리아는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행태와 통합사안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자제토록 강제해야 한다고 강도 높은 비난의 입장을 견지했다.

AMS합의에 이르는 한 달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차기 대선에서 패배했고 존 하워드가 이끄는 자유당이 총리에 당선되었다. 새 정부는 출범당시 AMS의 지원을 주장하였지만, 이러한 접근방법은 정당간의 동양 아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한 역사적인 혐오증만을 부추겼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동아시아 금융대란과 수하르토 정권의 실각으로 인한 파장 등 인도네시아 자국의 분쟁이 터지자 ‘강국으로서의 인도네시아’라는 인식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은 인도네시

아가 민족적 분할, 혹은 ‘발칸화’되는 전망들을 속출하게 했고 자카르타와의 우호적인 교류를 강조해왔던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동티모르 분쟁’의 먹구름으로 하워드는 기존 인도네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깨는데 드라마틱한 기회를 포착한 셈이다. 인도네시아 하비비정권이 동티모르에 대한 이권을 챙기려 하자, 하워드 정부는 이 사안에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999년 1월 12일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AMS를 폐기하고 동티모르의 자치와 자치적인 투표권 보장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5일 후에 인도네

시아 하비비 정권도 동티모르가 자치와 독립을 선택할 수 있는 투표권을 주겠다는 역사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동티모르 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인도네시아 군부는 바로 하비비가 동티모르 자치권을 묵인한데 대한 강력한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이로 인해, 하비비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하워드 정부는 인도네시아군부의 예상했던 답변을 기대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하워드 정부의 당시 사안을 여론화 하고자 했던 계기는 동티모르 자체의 사안을 넘어 확대 되었고, 이러한 동티모르의 상황악화는 하워드 정부가 이 지역에서의 향후 자국의 역할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보다 강력한 군사적 지위와 함께 지역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 탁월한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동티모르 폭력사태가 확산됨에 따라, 그리고 이전에 다져진 인도네시아 군부와의 교류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억제로 인해 약화되어감에 따라, 유엔 개입을 조기에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으며 8월 30일 투표(동티모르 독립지지율이 78%에 이르는)에서 통합론자들로 구성된 민병대 조직은 즉각적이면서 현저한 살인과 약탈을 감행했다. 지역안보에 있어 아무런 응집성을 갖추고 있지 못한 구조와 믿을만한 대안적인 기구들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엔안보리는 다국적군을 편성할 수 있는 주도권을 오스트레일리아에게 넘기는데 승인했다. 다국적군에서 지위를 확보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폭넓은 기회와 권한은 하워드의 9월 전략독트린에서 명백해진다. 하워드의 전망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아시아 안보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다. 이른바 ‘하워드 독트린’은 동티모르 다국적군을 통합하는데 있어 필수요소로서가 아닌 향후 가까운 미래에 전형이 될 수 있다는데 그 시사점이 있다. 이 독트린 보고서는 새로운 수행역할을 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방위비용을 지속적으로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설가는 “하워드 독트린”은 지역안보 관계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방법론에 있어 변화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미국 친화적인 프로젝트에 기술된 방법론은 세계2차 대전이 종식한 이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존재해왔던 사상적 맥락들을 담아내고 있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구상은 미국이 안보를 담보해주기를 추구한 독특한 구상이었다. 1951년 ANZUS 조약은 부분적으로 이들의 목적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많은 분석가들은 미국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충성”(단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넘어 세계 곳곳에 대한 방위구상)은 위기가 발발했을 때, 미국의 지원을 담보해줄 수 있을 만큼의 친화력이 강한 유대를 형성시킬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법안으로 제출된 하워드 독트린은 간단히 말해서 친 서방적 방위전략가들 사이의 장기간의 야심을 최근에 구체화한 문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하워드 독트린이란 동티모르 분쟁을 기회 삼아 집단안보 메커니즘에 대한 의존성을 폐기하고, 미국을 배후로 해서 군사적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계획에 다름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안보정책에서 제시된 방법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항상 존재해 왔다: 그것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가 항상 일치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단순히 오스트레일리아의 충정으로 불일치에서 오는 공백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980년 중반부에 아시아-태평양지대를 관통하는 미국의 핵무기 정책에 대해 뉴질랜드는 비핵화 정책을 입안하며 반대했을 때, 펜타곤의 정책 결정자는 뉴질랜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정책을 실험하는데 결코 머뭇거리지 않았다. 1999년에 완성된 하워드 독트린은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이런 유사한 운명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작성된 것이다. ▣

■번역 : 평화인권연대 아시아연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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