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강정구 교수의 주장을 논박함

지난 100호에 실린 강정구 교수의 기고 [남북정상회담, ‘눈앞 이해’보다 통일터전 닦아야]에 대해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채만수 부소장이 반론문을 보내왔다. <노동과 세계>는 민족분단과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한다는 취지에서,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이 글을 싣는다. 글을 보내주신 채만수 부소장께 감사드린다. 편집자.

노동자·민중적 통일만이 선이다

투표를 코앞에 두고 발표됨으로써 정치권의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않은 바 아니지만,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기대가 일부 대중에게 주는 흥분은 그러한 종파적 티격태격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가 보다. 대중매체의 온갖 논평이나 논설은 물론, ‘신북풍’이라며 반발하던 한나라당까지도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회담 성공을 위한 초당적 협력’을 다짐하고 있으니 말이다.

4월21일자 강정구 교수의 [남북정상회담, ‘눈앞 이해’보다 통일터전 닦아야]라는 논설 역시 그러한 기대와 흥분을 반영하고 있는데, 더구나 이 글은 이번의 합의를 ‘자주적 합의’라고 규정하면서 94년 그것 등과 대비시킴으로써 우리 근대사와 분단문제에 대한, 따라서 정상회담의 의의와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드러내고 유발하고 있다.

‘민족반역자’에 부당한 면죄부

그에 의하면, ‘분단은 외세에 의해서 강제’되었으며, “남과 북이 아무리 협력하더라도 …외세의 위력 때문에 통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이번 합의는 (남쪽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나름대로의 포용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한 “목적의식적 정책의 성과물”인 “자주적 합의”로서 “앞으로 통일문제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남북이 앞장서서 풀어나가는 초석을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의도했든 아니든, 역사적 사실과 분단·통일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고, 분단을 초래하고 거기서 단물을 빨아온, 강 교수 식의 민족주의적 용어로 하자면, ‘민족반역자들’에게 부당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그것도 이중으로!

분단은 단지 ‘외세’에 의해서 강제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분단은 명백히 국내적 국제적 계급투쟁의 결과였고, ‘외세’로 불리는 미·쏘간의 대립이란 다름 아니라 노·자간 계급투쟁의 국제적 전선이었을 뿐이다. 또한 분단은 미·쏘 냉전만이 아니라 동시에 민중에 대한 파쇼적 억압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남북문제는 주요하게 국내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햇볕정책’이나 이번의 합의도 결코 ‘자주적’이거나 ‘주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철저히 ‘페리 프로세스’로 알려진,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분단문제의 본질은, 분단의 동기·발단에서 그 유지나 통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계급문제이다. 제국주의적 억압과 미·쏘 대립이 그렇듯이, 분단이란 계급적 대립의 외화형태인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몰계급적 민족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으로서, 그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주관과 무관하게 많은 부분에서 결국 반민중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분단 및 통일 문제를 민족문제나 국제문제로서만 보는 피상적이고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이 팽배해 있고, 강 교수의 글 역시 그것을 극대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에 합의된 남북 정상회담은 명백히 이중의 의의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북간에 냉전적 적대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평화적 통일로 나아갈 ‘가능성’을 여는 긍정적 측면이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이 국가보안법의 철폐나 군축, 정치적 자유의 확대와 같은 민중적 요구를 내걸고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대신에, 강 교수가 당부하듯, “김대중 대통령은 … 민족의 대통령으로, 김정일은 … 민족의 총비서로 승화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요구”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지원”하기만 한다면, 분명 이러한 가능성조차 열리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대통령이나 총비서는 국가나 당의 기관일 뿐이지, 민족의 그것일 수 없다.)

정상회담의 ‘겉’과 ‘속’

그런데, 포위·봉쇄로부터 유화·’포용(?)’으로의 대북정책의 변화는 내외 독점자본이 남녘에서 이제 그 지배를 물질적·이데올로기적으로 확고히 확립했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또한 전반적 과잉생산의 항상화로 자본이 절실히 요구하는 새로운 투자처·시장이 유화적 정책을 통해서만 개척될 수 있다는 계산을 표현하는 것이다. 총선에서 민주당이 ‘북한특수’를 예고함으로써 득표를 노렸던 것도 시장과 잉여가치에 대한 독점자본의 열망과, 그 열망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되어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면, 부르주아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 운운은 결코 빈소리가 아니며, 남북 정상회담과 독점자본에 의한 남북경협 등은 노동자·민중에 대한 독점자본의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자 위협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실제로, 계급적 시각의 진지한 경계와 투쟁이 없다면, 몰계급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운동이 정세를 철저히 주도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거침없이 심화·관철되는 등, 노동자·민중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질 것임에 틀림없다. 노동자·민중운동 조직의 근본적 재정비를 포함한 철저한 대응작업이 시급히 요청되는 때이다.

노동자·민중적 통일만이 선이다!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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