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너희가 외자유치를 믿느냐
‘구세주’가 아니라 고통을 유치했다
6백여개 외자기업 중 노조 있는 곳 8.8%에 그쳐
경영여건 악화되면 언제라도, 미련 없이 떠난다
한국 최대의 자동차 부품회사인 만도기계가 갈가리 ‘찢겼다’. 창업자 정인영 전한라그룹 회장이 ‘불가능은 없다, 인간은 한다(Man do)’는 뜻에서 이름을 짓고, ‘8도로 뻗어 간다’는 의지를 담아 전국 7곳에 공장을 나눠지었다는 만도. 그러나 만도로 뻗어가기는커녕 IMF를 거치며 해외자본에 팔려나갔다. 경주공장은 프랑스계 발레오에, 아산공장이 스위스은행인 UBS, 평택공장 일부가 일본계 와브코, 평택공장 나머지와 문막·익산공장도 미국계 금융자
본 치어스맨하탄에 각각 매각됐다.
그 와중에 공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강원도 문막공장 안에는 다이게스팅 부서가 있다. 알루미늄 주물을 만드는 이 부서는 지난해 12월 문막공장과 따로 떼어 미국 깁스에 매각돼 유한회사 깁스코리아 다이게스팅이 됐다. 문제는 깁스가 무노조경영을 신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매각된 다음날인 12월23일, 부서원 78명 중 77명이 집단적으로 노조를 탈퇴했다. 버티던 나머지 한 명도 결국 탈퇴서에 서명했다. 오랜 부도상태에서 고용불안 심리가 팽배한데다 미국연수, 복지향상 등을 약속하고 “노조 때문에 인수 못하겠다”며 여러 차례 계약을 미루자 노조탈퇴는 속수무책이었다.
깁스는 인수에 앞서 노조활동에 적극적이거나 부서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노동자들을 골라 1주일간 미국에 연수시키며 “종업원 모두에게 여권을 내주고, 복지시설 등 모든 면에서 만도보다 낫게 대우하겠다”고 현혹했다. 이어 “노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자본을 철수하겠다”고 협박하며 고용불안 심리를 부추겼다. 노조탈퇴를 조건으로 성과급 1백%를 지급하기도 했다. 11월에는 반장, 고참, 미국 연수자들을 움직여 “회사 발전을 위해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서명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점령 전에 도로부터 정비한 것이다.
깁스는 현재 생산성이 두 배 높은 수동작업기를 미국에서 들여와 2교대제를 3교대제로 바꾸고 종업원을 3백50명까지 늘렸다. 물론 비정규직이다. 노동시간은 주42시간에서 주44시간으로 후퇴했다. 엄청나게 노동강도가 세진 것이다.
IMF를 거치며 ‘외자유치를 통한 국난극복’을 명분으로 국내의 알짜기업들이 순식간에 해외자본에 넘어가고 있다. 지난해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외국인 투자기업은 1천2백78개 사업장(종업원 13만8천9백6명)이다. 이 가운데 제조업체는 6백51개 사업장(종업원 9만4천3백67명)이다.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에서도 지난 2년 새 제조업과 제2금융권에서 눈에 띄게 늘었다. 금속산업연맹의 경우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소속 2백30여개 사업장 가운데 61개가 해외에 팔렸거나 매각이 진행 중이어서 전체의 27%나 된다. 이 가운데 80%는 IMF이후에 팔렸고, 그 수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화학섬유연맹의 경우 농약회사인 미성이 최근 팔려나갔다. 사무금융노련에 따르면 굿모닝증권, 해동화재 등 증권·손해보험부터 흥농종묘 등 씨앗회사까지 IMF이후 매각됐다.
반면 외자기업 가운데 노조가 조직된 곳은 1백13개로 8.8%에 그쳤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외국인 투자기업의 63%가 ‘노조가 없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답한데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질적 경영권이 외국자본에 있고 현지(한국)법인의 자율성이 떨어질수록 노사관계가 불안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펠저와 캄코, 오티스가 노조간부를 해고했고, 한국로버트보쉬기전은 노조간부의 보직을 박탈했으며, 한국산연은 일방적으로 단협을 해지했고, 한국게이츠는 불성실 교섭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한중석과 오티스, 오므론, 볼보, 만도기계, 와브코 등에서는 정리해고, 아웃소싱 등 여러 형태로 고용이 불안한 상태다.
이들 외자기업은 이미 해외에서도 노조탄압, 노동권 박탈로 말썽을 일으킨 경우가 많다. 대우자동차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 제너럴 모터스(GM)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 유럽, 브라질, 아르헨티나, 호주, 일본 등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 생산공장을 갖고 있다. GM은 또한 공장을 세운 모든 대륙에서 갑자기 문을 닫아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노동시간을 늘렸으며 노조를 약화시켰다. 이런 이유로 90년대 들어 미국 공장에서 파업이 22번이나 벌어졌고, 캐나다에서는 4만이던 노동자를 2만으로 줄였으며, 폴란드에서는 노조사무실도 주지 않았다. 이밖에 세계 최대의 자동차시트·내장시스템 생산업체인 리어, 자동차부품회사 델파이, 깁스, 발레오 등이 노조에 적대적이다.
청주에 있는 AMK의 경우는 해외자본에 매각된 기업의 미래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미국 본사가 올해 1월중순 부도나면서 독자기술개발이 어렵다는 이유로 한국 AMK도 2월12일 폐업공고했다. 회사쪽은 기계와 생산품을 밖으로 빼돌리면서도 50만원의 월급으로 빠듯하게 살아온 노동자들의 퇴직금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 회사 노조 조은경 위원장은 “2월14일부터 철야농성에 들어가 한나라당 당사 방문, 거리선전전 등을 벌이고 있으나 4월6일 마지막 교섭 뒤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안타깝게 말했다.
정부가 미국, 일본, 칠레 등과 투자협정 체결을 앞두고 있고, 니카라과와도 투자협정을 추진하면서 외자기업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관세인하, 세금감면 등 한국정부한테서 각종 혜택을 받고 있는 외자기업들은 해당국가와 투자협정이 체결되면 내국민대우에 최혜국대우, 심지어 회사문을 닫고 해외로 자본을 빼돌려도 정부가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치외법권을 누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외자유치에 대한 환상은 일부 노동자들에게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오랜 기간 경기침체에 빠져있는 특정산업의 경우 노조가 외자유치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경우도 있다. 금속산업연맹 김성혁 조사통계부장은 이와 관련해 “외자유치를 통해 당장은 경영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금속 사업장의 경우처럼 장기적으로는 노동권 침해와 상시적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금속산업연맹을 빼고는 민주노총 소속 산별연맹들이 외자기업이 얼마나 되고, 노조탄압 실태가 어떤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외국자본의 공세에 조바심이 더욱 이는지 모른다.
정경은 joungke@kct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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