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가 지난 20일자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한 <북 ‘노동당 규약 개정 약속’>을 두고, 청와대가 언론사사장단 모임에서의 비보도(Off the record) 약속을 깼다며 중앙일보 출입기자를 무기한 출입 정지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발표 이후로 언론보도를 두고 정부와 중앙 언론사가 정면으로 마찰을 빚기는 처음이다. 이번 일은 남북관계와 같이 미묘한 사안에 대해 정부와 언론이 ‘오프(비보도)’의 설정 기준과 행사 범위를 새롭게 규정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20일자 40판부터 게재된 관련 기사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4일 김대중대통령과의 평양 정상회담 도중 ‘우리(북한)가 먼저 7차 노동당대회를 열어 노동당 규약을 바꾸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박준영 공보수석은 다음날 2시30분 정례브리핑에서 “중앙일보의 보도는 언론사 사장단의 청와대 만찬에서 임동원 국정원장이 ‘비보도’를 전제로 브리핑한 말을 깬 것”이라며 “청와대 출입기자를 무기한 출입정지 시키겠다”고 말했다.
청와대측은 중앙일보가 저녁 8시 30분경에 원고마감되는 40판부터 이 기사를 게재한 점을 주목, 청와대 만찬에서의 비보도약속을 깬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날의 청와대 만찬은 저녁7시에 시작돼 8시30분경 끝났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지난 21일 <청와대, 본지기자 출입 무기한 정지>와 5면 해설기사 <여 386 아침모임서 단독 취재>를 통해 관련 정보를 19일 아침에 열린 민주당 386의원 간담회 자리에서 입수했으므로 청와대 비보도 약속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평양에 다녀온 정부여당의 관계자들이 주변에 아무런 경계심 없이 위험한 발언을 하는 것은 제재하지 않고, 보도한 언론만 문제삼는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중앙일보 제재로 본 언론-정부관계 : 한건주의 / 언론플레이 모두책임
중앙일보 보도를 계기로 불거진 비보도 논란에는 두 요소가 혼재돼 있다.
우선 언론의 ‘한건주의’. 그 보도가 미칠 파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코멘트 한마디를 머릿기사로 만들어내는 보도행태 이면에 자리한 한건주의, 특종욕이 비보도의 묵계를 흔들고 있다.
이번 ‘북한 노동당 규약 개정’ 보도의 경우 중앙일보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국민적 합의를 강화하기 위해 보도했다고 밝혔으나 그 사안이 갖는 민감성에 비춰볼 때 남북 교류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보도과정에서의 비보도 약속 준수여부도 문제이다. 청와대에서의 비보도 약속 파기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비보도 논란은 여전히 남는다.
중앙일보의 최초 취재원인 문정인 교수도 보도자제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앙일보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비공개 간담회인데도 참석을 막지 않았고, 메모 또한 제지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의원들이 간담회 이후 이야기를 했다는 점을 들어 비보도 요구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큰 설득력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의원들의 구두전파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도행위가 아니며, 메모 허용 등은 비보도 요구와 직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의 이런 행태와 함께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부 관계자들의 무책임한 대언론 활동이다. 정상회담 등 북한접촉관련 정보는 정부여당의 가장 핵심적인 관계자들이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 말은 언론의 추측성 보도의 경우를 제외하면 누군가가 기자들에게 관련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이 특종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보를 흘리고 난 다음에 그 책임을 언론 탓으로 돌리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11일 정상회담 연기 사실을 발표하면서 언론의 무책임한 일정 공개가 연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이면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앞서 지적한 정부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언론이 남북정상회담 실무회담에 참가한 것도 아닐 터인데 날짜별 일정과 숙소, 유적지 방문까지 어떻게 보도할 수 있었을까. 정부여당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역설적인 예도 있다. 정부는 6월초 임동원 국정원장이 정상회담 특보 자격으로 비밀리에 북한에 방문했다며 기자들에게 오프를 전제로 밝혔다. 모든 언론사는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13일 기자들은 허탈해했다. 정상회담 생중계 도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옆에 임동원원장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장면을 본 한 기자는 “허탈했다”고 표현했다. 정부의 요청에 최대한 협조했던 언론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연합뉴스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연합뉴스는 베이징에서 남북당국자들이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후부터 지금까지 8건의 기사를 전문 취소했다.
취소한 기사는 정상회담 일정을 비롯해 <김정일위원장 올 8·15때 방한 추진> 등 다양하다. 연합의 한 기자는 “언론이 나름대로의 예측을 해보는 것이 뭐가 문제냐”며 “정상회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정부의 기준도 모호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언론 활동의 난맥상은 평양을 다녀온 뒤에도 계속됐다. 청와대·통일부 등을 출입하는 기자들은 “정부 관계자들의 말만 보도해도 그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라며 “언론이 남북 화해 무드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자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고 있다.
정상회담을 수행한 정부여당의 관계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주변인물들까지 정상회담의 극비 사항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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