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다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7월 카림 보아텔
10년 동안 권좌를 차지하고 있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지난 4월과 5월 있은 선거에서 많
은 물의를 빚으며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참관단을 철수시킨 미주기구와 관계를 끊었
지만, 미국의 재신임을 받은 후지모리가 정적인 알레한드로 톨레도가 참여를 거부한 결선
투표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루 전체가 빈곤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선거
부정이 전말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표를 준 많은 페루인들이 존재한다. 이들
은 충성의 대가로 곧 무너질 것 같은 사회 구조적 처방을 내려 주었을 뿐인 체제에 의존하
고 있으며, 여전히 후지모리를 초인플레이션과 ‘빛나는 길’ 테러분자들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1980년 5월 17일 밤, 12년 동안의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첫 번째의 자유 선거를 치르기
전날이었다.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이 아야쿠초 주의 작은 마을 쿠스키에 나타났
다. “스키 마스크 같은 발라클라바 모자를 쓴 다섯 명이 선거관리위원회를 습격하고 선거인
명부와 투표함을 불태웠다. 새벽 2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30분 후 상황은 종료되었
다.”<주1> 이것이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20년의 세월로 페루를 끌고 들어간 게릴라 전쟁의
첫 시작이었다. 2만 5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만 5천 명이 실종되었다. 그리고 60만 명 이
상이 피난해야 했고, 이들은 리마의 판자촌을 급속히 확대시켰다. 이 지역은 얄궂게도 푸에
블로스 후베네스, 즉 신도시라 불려졌다. 재산 손실은 약 3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
되었다.
곤살로 대통령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이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 아비마엘 구스만이 1992
년 9월 12일 리마에서 체포된 후 8년이 지났지만, 빛나는 길이 페루나 페루인의 마음 속에
서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주2> 테러리즘은 공식적으로 과거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전쟁이 남긴 상처와 기억들을 조작하는데 있어서 노련한 대가였다. 5
월 17일 그는 아야쿠초의 한 회합에서 여전히 이렇게 연설하고 있다. “5월 28일 페루인들은
빛나는 길에 대해,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에 대해, 그리고 테러리즘에 대해 ‘노’라고 말할
것이다.”
나라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수사적 무기가 되었으며, 야당은 이와 관련한 그 어떤
비난도 퍼부어질 수 있는 과녁이 되었다. 5월 28일의 결선 투표가 있기 사흘 동안 괴유인물
들이 아야쿠쵸 북부와 완타, 라 마르 주 등에 뿌려졌다. 거기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주3>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쓴, 야당 페루가능성당의 대통령 후보
알레한드로 톨레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유인물이 뿌려진 곳들은 코카를 재배하는 지역으로
서 게릴라 전쟁이 특히나 유혈을 빚었던 곳이었다. “폭력, 살해, 전쟁, 그리고 시체들, 톨
레도에게 투표하는 것은 테러리즘에 투표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선전은 심지어 농림부의 프로그램인 국립농업위생서비스 아야쿠쵸 사무실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당국이 돈을 대는 저가의 황색 일간지(치차)들 역시 똑같은 이야기들을 쏟
아냈다. “아비마엘 (구스만)은 폭력을 숭배했다. 패자(톨레도) 역시 그러했다. 아비마엘은
그의 어머니의 아들이다. 촐레도(촐로는 시에라 아메린디안들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이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나이며, 똑같다.”<주4> 아야쿠쵸 회합에서 후지모리는 만약 그가 패
배하면 테러리즘이 복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낮에는 택시를 몰고 저녁때 일하며 월 170
달러를 버는 한 교사는 이렇게 토로한다. “그가 바로 테러리스트이다. 군대는 빛나는 길과
MRTA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열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그 누구라도 공공연하게 말한다면, 그는 즉각 파괴행동으로 고발되고 투옥될 것이다.”
1992년 빛나는 길이 패주하고 지도자가 붙잡힌 이후 지방으로부터 탈출했던 일부 인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비정부기구들의 압력이 증대되면서, 1993
년 10월 비상사태 지역의 개발과 재거주를 위한 PAR 지원 프로그램이 실시되게 되었다.
지난 5년 동안 2억 8천 5백만 달러 상당이 가장 심한 영향을 받았던 지역들(아푸리마크,
아야쿠초, 완카벨리카, 후닌)에 투자되었다.<주5> 6천 5백 가구가 복귀할 수 있었으며, 주
택과, 학교, 보건 기반시설들이 재건축되고 수선되었다. 또한 67만 명에 이르는 무적자들의
신분을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R의 기술 수석인 베티 올라노 씨에사는 자신이
가진 예산으로는 이 일을 다 추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프로데 인권연합의 홍
보 수석, 호세 마누엘 라미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황폐화된 이들 지역에서 PAR는 경제 재
건과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권리 회복을 위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나라는 사람들을 되돌리기 위해 정책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일상 생활과 개발에 대한 새로운 요구들을 가지고 시에라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일종의
공백에 직면해서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자원과 제도들을 스스로 만들어내
야 했다. “피난민들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진보의 담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다.” 의회 자문역인 사회학자 하이메 안테사나는 말한다. “스스로 일하며, 이들은 안데스에
서 진정한 농촌 혁명을 출범시켰다.” 조금씩 조금씩, 시민으로서 갖는 자각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커져 갔으며, 개발과 인식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엔진이 되었다. 또한 농민들
(campesinos)은 국민 국가로의 통합된 일부이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열망을 깨닫는데
수년이 걸린 후지모리 정부는 이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
아야쿠초를 떠나면, 포장 도로는 끝이 나고, 먼지나는 길이 다시 등장한다. 70마일 떨어
진 탐보 지역에 도착하려면 세 시간이 걸린다. 거기서 국가의 물리적 존재는 상징적일 뿐이
다. 하지만, 기반시설(소규모 보건센터, 군사 기지, 그리고 몇몇 도로의 건설)을 개선하기
위한 후지모리 정부의 “노력”은 사실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이다. 모두가 그것을 알
고 있다. 이 지역처럼 잊혀진 곳에서는 전무만 아니면 꽤나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곳
사람들은 치노를 찍었다.<주6> 그는 약속한 모든 것들을 지킨다. 그는 우리를 도와주었
다… 그렇다면, 그 외에 다른 누가 폭력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후지모리는 탐보 지역에서 결선 투표의 71%를 득표했다. 하지만 빈곤 순위에서 아야쿠초
는 바로 이웃의 완카벨리카에 이어 두 번째에 위치해 있다. 일인당 평균 월소득은 전국 평
균 82달러보다 현격히 낮아서 26달러에 그치고 있다. 기대 수명은 56세이며, 전국 평균은
68세이다. 이것은 충분히 흔한 현상이다. 농촌 지역 인구의 64%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을 하
고 있다. 도시 거주자의 경우 이 비율은 24%이다.
이 모든 사실과 기만에도 불구하고 후지모리가 신이 보낸 사람으로 간주되고 농촌과 리
마의 판자촌이 그의 편이라는 사실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정부는 폭력이라는 문제
를 선전 도구로 사용했다.” 인구 문제 개선 및 개발 센터인 케프로뎁의 소장, 그리말도 리
오스 바리엔토스의 해설이다. “전적으로 선거 부정에만 초점이 맞춰진 선거 관련 논쟁은 사
람들이 진실로 뭘 원하고 있는가에 관한 논의, 즉 지역 사회와 지역 경제를 개발하기 위한
필요성 같은 것들에 관한 모든 논의를 봉쇄하고 있다.”
또한 후지모리가 많은 선동의 위험을 무릎쓰며, 도시민들과 중간 계급을 격렬히 비난했
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결국 그가 의존했던 것은
군부의 지지였다. 비상사태 지역(전 국토의 9%)의 비군사화가 이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한다
는 뜻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는 군대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국가 권력이었던 것이다.
시에라의 푸에블로스에서는 군대가 때때로 국가가 존재한다는 유일한 물리적 증거이다. 전
쟁이 입힌 그 모든 상처들 때문에 사실 군대가 떠나기를 원하는 것 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20년 동안 살해당한 2만 5천 명의 페루인들이 모두 “테러리스트들”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지역에 팽배한 이런 사고 방식은 놀라울 정도이다.
반군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명목으로 자의적인 체포와 부당한 대우, 고문, 암살, 심지
어는 학살까지 자행되었다. 하지만 “국가를 공격하기에는 농민들이 국가를 너무 필요로 한
다.” 은퇴한 경제학자 페드로 와만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은 어떻게 군대를 비난할 것인
가? 그들은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산다. 만약 불
평한다면, 당신은 사라진다.”
후지모리와 군사령관들은 빛나는 길을 제거했다는 데에서 명성과 위신을 찾고 있다. 하
지만 농민들이 없었다면,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2년 말 이래 농민들은
농민 감시대나 자경단(CADs) 등을 통해 스스로 방어막을 구축했다. 이것은 때때로 자발적이
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군대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강제적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전투 중에 죽어간 이런 무명의 영웅들에게는 그 어떤
금전적 혹은 도덕적 보상도 없었다.
분명, 1992년 11월 정부는 741호 법령을 통과시키기는 했다. 이 법은 CADs를 “테러분자
들의 위협에 맞서 자신들의 지역 사회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일어난 시민들의
조직”으로 인정했다.<주8> 1년 후 077/DE92호 최고법은 10조에서 “죽음, 부상 혹은 불구는
보상 혹은 연금이라는 측면에서 국가의 선택적 배려를 이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1998년까지도 068/DE/SG호 최고법은 보상의 액수를 규정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입안된 법은
077호 법령의 공포 이후, 즉 1992년 10월 이후 살해되거나 부상당한 희생자만을 대상으로
보상을 적용했다. 하지만 농민들의 저항은 198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게다가 보상은 반
군과의 전투에서 살해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경대가
테러분자들을 소탕하러 나간 경우”에만 해당되며, “반군이 마을에 쳐들어 온 경우”는 해당
되지 않았다.
1982년부터 1994년에 이르는 탐보 공격에서 빛나는 길은 264명의 사망자와 36명의 부상
자를 발생시켰으며, 여기에 전투 중 사망한 85명과 영구 불구가 된 29명이 더해진다.<주9>
077호 법령이 공표된 후 죽은 사람들인 네 명(전체 희생자의 1.15%)의 가족만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이 사망 증명서 같은 규정된 서류들을 마련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불가능하다. 전쟁 기간 동안 정부는 농촌 지역에 없었거나 농
촌을 포기한 상태였다.
1990년 4월 농민 감시대 출신의 80명이 전통의상인 폰초를 입고 리마에 와서 여론의 지
지를 호소했다. “300달러뿐일지라도, 그것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
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탐보 주민들에게 5만 달러의 보상을 약
속했던 077호와 068호 법령은 의회로 제출되자마자 폐기되었다. “이 나라에서 훈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군대뿐이다.” 안테사나의 불만섞인 말이다. 이러한 무정한 배은망덕에도 불구
하고 공포의 연간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분노보다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탐보 자경단의
전 멤버인 알베르토 시가르베 토레즈는 군인들이 “혼란 속에” 사람들을 죽였다고 믿는다.
“만약 그들이 거기 있지 않았다며,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었을까? 그들은 우리를 지키려고
했다. 그렇다, 아무도 그들에게 거역하지 않는다.” 후지모리의 귀에는 음악 소리로만 들린
다. 그러나…
평화협회 의장, 프란시스코 디에스-칸세코 타바라에 따르면, “구스만을 사로잡은 것은
전략적 승리였다. 하지만 이것이 빛나는 길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
다.” 라 마르 주에는 반군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사람들을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사라졌
다고요? 농담마세요. 산 위에 아직도 수백 명이나 있어요.” 와만의 확언이다. 목격자들은
리오 아푸리마크 근처에 활동적인 게릴라 부대가 존재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산악 지역과
아야쿠초에서 아마존으로 넘어가는 지역, 왈라가와 리베르타드 주의 고지대 등이 그 지역이
다. 이 지역은 코카의 재배와 교역이 가장 성행하는 곳으로서 빛나는 길이 게릴라들에게 생
존 자금을 되어주고 있다.
4월 9일 토카체에서는 게릴라 부대가 투표소로 가는 길을 막았으며, 주민들은 되돌아가
야 했다. 비정부기구인 이파스의 대표, 헤프레이 가마라 카리요가 지적하다시피, 후지모리
정부는 두 장의 카드로 게임하고 있다. “게릴라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이점을 챙길 수 있다. 불안한 분위기는 수지 타산이 맞는 것이다. 워싱턴으로 하여금 원조
를 제공하도록 할 수 있으며, 군비 지출과 상비군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해준다. 뭐든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빛나는 길은 권력층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라를 진정시키고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후지모리가 전혀 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지난 20년의 가장 엄혹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수천의 농민
이 학살된데 대한 군대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며, 시에라 지역을 비롯,
리마의 “신도시”에 몰려든 수백만의 일자리없는 남녀의 주변화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쏟아붇는 것일 수도 있다. 최근의 선거에서 불거져나온 문제들 이상으로, 그리고 꽤
나 정력적으로 추진된 경제 정책의 결과로서 페루는 사회적 폭력의 증가때문에 요동치고 있
다. 몇몇 분석가들은 이것을 국가의 “센데로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국가와 시민 사
회가 진정한 평화 구축을 위한 노력을 시급히 기울이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이라고는 새로
운 게릴라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면..”
<1> 구스타보 고리티 엘렌보겐, 센데로. 페루 무장 투쟁의 역사, 에디숀 아모요, 리마,
1990년 7월, p.207.
<2> 2000년에만 59명이 “맑스-레닌주의-마오주의” 게릴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3> 게바라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운동체로서, 1996년 12월 17일부터 1997년 4월 22
일까지 리마의 일본 대사관저를 점거하면서 유명해졌다.
<4> 라 유카, 리마 2000년 5월 25일
<5> 1999년 PAR 보고서, 리마
<6> “칭크”라는 말로서 후지모리의 혈통을 뜻한다. 물론 후지모리는 일본계이지만 말이
다. (역주: 칭크, 치노는 중국인을 뜻하는 속어)
<7> 1998-99 사회-인구 조사, 국립통계정보연구소, 리마, 1999년 8월.
<8> 제 4833호 법령 초안, 1999년 5월 27일: www.congreso.gob.pe
<9> 하이메 안테사나·헤미나 카르샤-고도즈, El Estado y la autodefensa campesina,
deuda social y reindividicaci n de los campesions ronderos,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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