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8/04 기사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가 되었군요. 어제 3일에 이어 오늘도 각 신문마다 난리입니다. 박지원장관의 발언과 관계된 보도를 “누가누가 많이 하나” 내기하는 모습입니다.
지난 2일 문화관광부 박지원장관은 기자들과 오찬회동을 가진 자리에서 “TV속의 선정·폭력성을 없애는데 장관직을 걸겠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방송위원회 김정기 위원장, KBS 박권상 사장, SBS 송도균 사장, MBC 노성대 사장 등은 긴급 간담회를 열어 발표문을 내고, 방송사 심의강화를 결의했습니다.
선정보도를 막자는 건지‥하자는 건지‥
이에 신문들은 3일, 각 지면을 통해 일제히 관련기사를 실었습니다. 조선일보는 1면에 큰 상자기사로 박장관의 발언을 다뤘고 사회면(22·23면)에 박장관의 일문일답을 포함한 ´TV벗기기 경쟁원인´과 TV에서 방영한 선정적·폭력적 내용을 머릿기사로 올렸습니다.
국민일보와 대한매일, 한국일보, 문화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도 모두 관련기사를 실었습니다. 다음날인 4일, 각 신문은 사설(한국·경향·한겨레·동아)과 외부 기고(중앙·대한매일·세계)를 통해 ´TV의 선정·폭력성을 장관직을 걸고 막겠다´는 박장관의 ´월권´에 대해 얘기하고, TV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추방시켜야 할 방송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점잖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신문의 보도는 정확합니다. 현재 TV는 도가 지나칠 만큼 충분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그러나 신문들의 이같은 점잖은 타이름(?)에 과연 신문들 또한 자유로운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박장관의 발언과 관련한 보도에서 몇몇 신문은 사진이나 제목 등 편집에 있어 방송보다 더욱 선정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은 박장관이 언급했던 내용 중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문제장면을 여성 출연자의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채 문제의 ´젖가슴´을 노출시키는 ´과감함´을 보였습니다. 경향신문은 문제의 장면을 ´컬러´로 선명하게 처리했고, 조선일보는 양면에 걸친 제목에서 ´젖가슴 노출´이라는 표현으로 “신문보도가 더 선정적”이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중앙일보 역시 TV의 선정성과 관련한 사진을 게재하면서 MBC의 한 음악프로그램의 화면-뒤에서 여가수의 가슴을 만지는 백댄서의 모습-을 제목 위에 실었습니다. 단지 백댄서와 여가수의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채 말입니다. ´선정성´을 막자는 기사에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자료 화면이라니!
조선일보 4일자는 22·23면 상단에 인터넷 성인방송의 음란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들을 연결시켜 게재했습니다. 한 면은 컬러로, 다른 한 면은 흑백으로 말입니다. 특히 22면 컬러사진 (인터넷 화면)중엔 상의를 다 벗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성을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해 실었더군요.
TV의 선정성과 인터넷 방송의 음란성을 성토하는 신문이 스스로 문제삼던 ´젖가슴´을 그대로 보여주며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있는 격입니다. 더구나 조선일보가 사진으로 사용한 자료화면엔 문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 성인방송의 사이트 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같은 날 보도된 국민일보의 관련기사 그래픽과 대조적인 편집입니다.
결국 방송이나 신문이나 선정적이기는 매한가지라는 비난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신문의 경우 선정성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스포츠지를 자매지나 전략적 제휴지로 끼고 있기 때문에 더욱 자유로울 수 없을 텐데도 말입니다. 자신들의 선정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없이 방송의 선정성만 물고 늘어지는 신문들의 심보를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미디어오늘/안경숙기자)
[관련자료]
<논평>8월3일 언론개혁시민연대의 “문화관광부 장관의 방송 규제 발언은 잘못됐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지나 2일 기자간담회에서 “방송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사회적으로 인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장관직을 걸고 이를 뿌리뽑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박 장관의 발언과 관련해 방송사의 일부 연예 오락프로그램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심각하다는 데 대해 인식을 같이한다.
요즘 방송프로그램들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은 온 가족이 함께 보기 낯뜨겁기 짝이 없다. 더욱이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어 오락 연예 프로그램들은 앞다투어 출연자들 벗기기 경쟁에 나서고, 어떤 드라마는 폭력배들의 폭력장면을 그대로 재연해 충격을 주었다. 공공성을 존립근거로 하는 지상파방송에서 이런 프로그램들이 무차별적으로 안방에 전달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고, 이에 대해선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문화관광부 장관이 장관직을 걸고 해결하겠다고 말한 것은 잘못됐다. 문제가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심의하여 행정적으로 규제할 권한을 갖고 있는 곳은 방송위원회다. 새 방송법은 방송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과거 정부부처가 행세하던 방송정책·행정권을 독립적 행정기구인 방송위원회에 부여했다.
따라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방송 규제 발언은 방송위원회에 대한 명백한 월권이다. 박 장관의 이 발언이 나오자 일각에서는 방송위원회 길들이기 의도이고, 방송의 독립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방송위원회가 그 동안 방송프로그램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방치한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방송위원회는 명실공히 독립적 행정기구로서의 위상과 기능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화관광부 장관은 오늘날 방송사가 시청률경쟁에 내몰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구조적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박 장관의 이번 방송 규제 발언은 주무장관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처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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