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여한의사회가 ’95년 11월, 한의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200여명중 90%의 한의사가 ‘아들낳는 처방’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고 하였다. 또 이들중 60%의 한의사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에 응했다고 답했다. “4녀 출산후 남편이 외도를 하고 시집에서 박대하여 결혼생활이 파탄날 지경이라고 호소하던 여성” “종가집 맏며느리인 데 딸 셋을 낳고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던 여성” “아들 낳기 위해 유산을 20여회 했던 여 성” “아들 낳을 때까지 낳으라는 시부모 말을 듣고 찾아온 딸셋 가진 여성” “아들 없이도 부부 금슬이 좋으나 앞으로도 행복이 유지될지 불안하여 신경쇠약에 걸려있는 여성”…………

이상은 한의원을 찾아와 ‘아들 낳는 약’을 요구하던 여성들이 토해 놓은 사연들의 일부이다.

이들이 아들을 낳으려는 이유는 ‘집안 어른들의 요구(60%)’ 또는 ‘대를 이으려고 (30%)’ 등이 90%를 차지함으로써 여성 스스로의 주체적 희망에 의해 아들을 낳으려는 것 이 아니라 가부장적 가족구조 속에서 아들을 통해 ‘뿌리’를 내려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려하 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친정식구가 약을 지으러 오는 경우(12%)도 시집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아야 ‘부대끼지 않고’ 무난한 결혼생할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성감별 산부인과 의사들에 대해 검찰이 몇몇 산부인과의사를 구속한 것에 대 하여 담당검사는 ‘인위적 성비 파괴 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의사나 조산사들의 비윤 리적 의료행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한겨레 96,7).

그러나 몇몇 의료인들에 대한 사법적 처리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아들밝힘증’이 사라지리라고는 볼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대잇기’를 열망한다. ‘대잇기’를 통해서 조상과 자신이 일군 명예와 재산을 보존하거나 자신의 제사를 보장받음으로써 죽은 후에도 이승과 의 탄탄한 연결고리를 보장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대’라고 하는 것은 퍼뜨린 ‘씨’를 생산할 수 있는 아들을 통해서만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의 난자를 인식할 수 없었던 시절의 무지에 기인한다. 난자의 존재가 오래전에 밝혀졌음에도 그러한 무지가 현실을 지배하는 이유는 잘못된 편견과 관습을 선도하지 못하는 법과 제도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호주제(일제 식민치하에서 유입된, 그리고 현재의 일본에서는 사라진), 夫家입적제도는 여성을 ‘남편의 집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리고 ‘남편의 집안으로 들어 온 여성’ 에게 남편가문의 씨앗을 퍼뜨릴 의무를 우선적인 덕목으로 요구한다.(성감별을 요구하거나 아들낳는 약을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요구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며 이에 응하는 양,한방 의료인은 자신이 배운 학문의 힘으로 사회의 편견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 들이다.)

한국에서 여성이 가진 씨앗인 난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사고는 호주제 이외에도 한 국여성이 외국인과 결혼했을 때 그 남성의 한국국적 취득을 허용하지 않는 국적법, 씨가 같다하여 동성동본 남·녀의 결혼을 금하는 금혼법, 아이를 낳으면 너무나 당연히 남편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민법 등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 결혼을 하면 한국인은 일본인의 호적에 입적해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일본인의 성을 따르게 하며, 일본인의 조상을 위한 제례를 행하고, 사회의 주도권을 대부분 일본인이 쥐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연히 일본인은 가정과 사회에서 일등국민 취급을 받고 한국인은 이등 국민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집안에서 ‘귀남이’ 대접을 받는 남성들은 사회에서도 ‘귀남이’대접을 받는 일등국민 이 된다. 집안에서 ‘후남이’ 대접을 받는 여성들은 사회에서도 ‘후남이’ 대접을 받는 이등국 민이 된다. 얼마전 구정고등학교의 내신등급 사건에서 나타났던 “여자들이 왜 남학생들의 창창한 앞길을 가로막나? 시집이나 가면 될 것을…”이라는 논리나 “한총련 여학생 성추행사건은 당연하다. 전리품이니까”, “남자 한명은 전세계의 여자를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통신상의 젊은이들은 이런 풍조가 낳은 이 시대의 불행한 산물이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을 일등국민과 이등국민으로 차별하는 사회에서 이등국민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여아를 성감별후 낙태하려고 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적게 낳는 자식 속에 ‘일등국민’을 반드시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한·양방 의료인들도 돈벌이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팔거나 환자의 눈물어린 하소연 에 마음이 약해져서 ‘아들낳아 행복찾기’에 같은배를 타려고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부도 이제 ‘아들을 간절히 희망하게 하는 사회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획기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 편견과 무지에 그 뿌리를 둔 법과 제도와 관습이 여성을 차별속에 방치하는 한 이를 개인적으로 피해가려는 사람들의 아들낳는 처방요구나 계획적인 살인이나 다름없는 성감별 후 여아 낙태요구는 결코 근절될 수 없다.

의료인에 대한 행정적, 사법적 처벌만으로 성비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은 실 로 구두위로 발긁기 식의 우매한 소치에 불과하다. 정부는 말로만 세계화를 주장할 것이 아 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조치들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려야 한다. 호주제의 철폐, 여성에게만 불리한 국적법, 여성의 난자를 인정하지 않는 동성동본 금혼법 등 불합리 한 법의 개정과 아울러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하는 법률과 제도 그 밖의 무수한 남성중심 의 가족문화, 사회문화의 개선을 위하여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한다. 남아선호관은 이미 부메랑이 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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