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아무개(39·여·서울 강서구)씨는 자신의 주민등록 등본을 뗄 때마다 `주홍글씨’를 본다고 했다.
6살 된 아들 이름 옆에 적혀 있는 `호주 ○○○’, 이는 그가 이혼 여성임을 보여주는 꼬리표이다.
3년 전 이혼 직후 그는 자신이 호주가 됐다.
주민등록에 세대주와 호주는 자신으로 돼 있는데, 자신이 기르는 아들 이름 옆에는 전 남편이 호주라고 써 있는 것이다.
“세금공제를 받거나 하려고 직장에 등본을 낼 때마다 이혼한 여자라는 게 금세 드러나요. 그게 싫고 괴롭습니다.”
물론 그의 호적등본에 아들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남편 없는 여자’로 산다는 게 두렵고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울 경우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왔던 박씨가 지긋지긋하게 되풀이된 남편의 폭력과 폭언에 이혼을 결심했을 땐 호주제를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이처럼 일상의 구석구석에마저 흔적을 남기는 호주제는, 새 삶을 일궈가려는 그의 몸무림과 마음을 휘젓고 흩트려놓곤 했다.
박씨는 아들이 입학할 때를 떠올리면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혼했다는 걸 감출 일도 아니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이가 이혼 가정의 애라는 건 그냥 드러나겠지요. 여자라고 내 아이조차 같은 호적에 올리지 못하게 하다니, 호주제가 도대체 뭔가요?”
지난해 10월 결혼식을 올린 정수범(33·충북 청주시)-김미경(32)씨 부부는 아직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다. 혼인신고를 안했기, 아니 못했기 때문이다.
8년째 여성단체에서 뛰어온 아내 김씨가 임신한 올 봄, 사업하느라 외국에 갔다 돌아온 정씨는 미뤘던 혼인신고를 하려 했다.
김씨는 남편을 가정의 주인으로 삼는 호주제에 반대했고, 정씨는 남아선호로 고통을 안기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데 동의했다.
정씨는 구청에 호주란을 비운 채 혼인신고 서류를 냈다. 담당 직원은 곤혹스러워하며 `정해진 양식이니까 채워넣어야 한다’며 접수를 거부했다. 부부를 나란히 쓰겠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난달 초 아들이 태어나자 부부는 고민에 빠졌다. 2남1녀의 장남인 정씨가 어렵게 아버지에게 뜻을 밝혔다.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혼인신고를)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며 걱정하면서도 막지는 않았다.
정씨는 호적에 아들을 혼인외자로 올렸다. 아내 김씨는 이 호적에 없다. 다만 아들 칸에 어머니로 이름만 올라 있다.
“3년쯤 사귄 끝에 결혼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부부가 되기로 다짐했지요. 아내의 뜻이 훌륭하고 저도 공감합니다.”
박씨도, 정-김씨 부부도 지난달 22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추진하는 호주제 위헌심판청구를 위한 원고인단에 동참했다.
호주제 폐지 연대는 △이혼 여성의 호적에 자녀를 입적하거나 △호주란을 비우거나 부부를 나란히 올려 혼인신고를 하도록 한 뒤, 이 신청이 거부당하면 가정법원에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내도록 할 계획이다. 가정법원이 이를 기각하면 원고들이 직접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내도록 할 방침이다.
가정법률상담소·여성단체연합·여성단체협의회 등 111개 여성·시민단체들로 결성된 호주제 폐지 연대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도움을 받아, 짧지 않은 시일과 뜨거운 논쟁이 예상되는 이 소송을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또 △남계혈통을 우선해 호주를 승계하도록 하고 △처를 남편의 가에 입적하도록 하며 △자녀도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게 한 민법 조항들이 양성 평등을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이를 개정할 것을 촉구하는 청원을 2만6156명의 서명과 함께 국회에 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