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과 대안>
산별노조 건설로 다시 세우자”
활동가 새로 키우고 조직력 강화할 중장기계획 마련해야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88∼89년에 걸쳐 무려 1백28일간 계속된 현대중공업 파업 등은 한국노동운동사를 다시 쓰게 만든 엄청난 투쟁이었다. 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이후 처음으로 전국총파업을 선언하게 만든 온 90년 4월의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는 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 9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무쟁의 6년’이라는 회사의 자랑은 그만두고라도 헌법에 보장된 단체교섭권마저 강탈당한 채 ‘회사임금안 동의서명’이라는 굴욕으로 내몰렸다. 현대중공업노조의 산 증인이자 현대자본과의 투쟁에서 맹장으로 활약했던 해고자들은 회사 경비대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 사이 현중은 왜 이렇게 돌변했는가.
금속산업연맹 한석호 조직1국장은 먼저 “개별작업 공정이 많은 조선산업의 특성상 조합원들이 넓은 조선소에 흩어져 있어 회사의 현장장악기도가 효과를 나타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또 공기가 2~3년에 이르는 수주산업이라서 실질적인 파업효과를 내기가 어렵고, 발주자가 자본가이기 때문에 초보적인 시민불복종운동도 벌일 수 없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현대중공업노조 곽진호 기획부장은 “현재 조합원의 평균나이가 44세인데 대부분 자녀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갈 시기이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등 가정경제에 대한 부담이 많다”며 “회사는 잔업통제만으로도 상당한 현장통제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엇보다 90년대 들어 새로 도입한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현대자본은 87년 이전 출입문마다 ‘바리깡’으로 머리길이까지 통제하던 군대식 노무관리와 89년 1·8식칼테러사건으로 대표되던 폭력적 대노조전략의 대명사였다. 신경영전략은 공세적인 현장장악전략으로 90년대 ‘리폼(Reform)90s’에서 최근의 ‘비전(Vision) 2010’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사업부 안상태(41) 대의원은 “94년 LNG파업이 끝난 뒤 회사는 팀반장 집중교육, 조합원 한마음교육 등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는 노동강도의 강화로 이어져 조합원들은 ‘나, 우리조, 우리반만 잘되면 된다’는 회사의 주입식 논리에 옴죽달싹도 못하게 됐다”며 “이젠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진단했다.
신경영전략이 노조조직력에 미친 악영향은 컸다. 조선사업부 남명우(42)씨는 “96년말 노개투 파업 초기에 시계탑사거리에 3천명이 모였는데, 회사는 참여조합원에 대해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등 철저히 불이익을 주는 전술을 썼다”며 “노조가 조합원을 책임지지 못하자 조합원들은 생각을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안상태 대의원은 “지금처럼 현장과 노동자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대의원들이 집행부의 정책과 사업에 발목을 잡는 방식으로 가선 곤란하다”며 “대의원이 회사쪽의 회유·협박에 맞서 바람막이 역할을 해줘야 조합원들이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엔진사업부 허동욱(45)씨는 “지쳐있는 활동가와 노조간부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이들 개개인을 지키는데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며 “비전 2010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인간의 감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내용이어서 우리가 노조정신을 지켜나간다면 희망은 있다”고 강조했다. 허씨는 또 “이젠 단위노조 힘으론 안된다”며 “공장 담장 밖으로 나가 사회적 문제로 풀어가는 산별노조로 방향을 잡을 때”라고 말했다.
이처럼 산별노조 건설을 나름의 대안으로 보는데는 조선현장의 절박함이 배어있었다. 곽진호 기획부장은 “이대로는 현상유지도 어렵기 때문에 기업별노조의 장점을 계승하는 ‘상설연대투쟁체로서의 산별노조’ 건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사업부 이상선(44)씨는 “장기적으로 산별노조로 가서 산별기금 등으로 쟁의기금을 책임지는 기획이 나와야 한다”며 “회사가 신규입사자에 대한 2중3중의 인우보증을 통해 족쇄를 채우고 있는데 이에 맞서 노조활동가를 새롭게 키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맹 한석호 조직1국장은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는 정몽준고문을 압박해 노무관리체제를 변화시키는 전술과 함께 현장조직력을 되살리기 위한 중장기 사업계획과 목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장탈환을 위한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의 투쟁의지는 이번 단임협투쟁을 겨냥하고 있었다. 현대자본의 노조무력화에 맞서 이번 투쟁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면 ‘노조의 미래가 없다’는 현장의 긴박감이 목에까지 차올라 있는 것이다.
이재철 leecc@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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