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정신’을 말한다
사람사랑·평등·투쟁…갈수록 잊혀지는 아쉬움
“생활속에서 ‘닮고싶은 사람’으로 향기 피워내야”
1970년,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산화한 뒤 30년 동안 ‘전태일정신’은 민주노조운동을 끌어오는 가장 큰 힘으로 인식돼 왔다. 어떤 인물의 정신을 받드는 것은 생전의 삶이 훌륭했을 뿐 아니라 그 발자취가 후세에게도 ‘향기’를 내뿜는 까닭이다. 노동운동에 복무하는 대다수 활동가들이 그를 기리고, 민주노조진영은 지난 88년 이후 해마다 그의 기일에 맞춰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정신계승’을 외쳐왔다. 그가 묻힌 마석 모란공원은 한국 노동운동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어받고자 하는 그 정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70년대 민주노동운동 동지회(70민노회) 회장을 맡고 있는 남상헌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그 기본정신을 ‘사람사랑’, 다시 말해 ‘노동자 사랑’으로 꼽는다. 남지도위원은 “전태일은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지 않고 평등을 누리며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며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태일은 모든 방법을 다 썼음에도 독재정권이 이를 외면한 채 지독한 착취를 계속하자 분신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써서 철저하게 그 사랑을 실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 지도위원은 이어 “요즘 후배노동자들을 보면 논리에는 대단히 밝은 반면 ‘노동자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에는 투철치 못한 게 사실”이라며 “내 주장의 정당함만 고집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를 사랑하는 정신을 바탕에 둔 것이 아니다. 논리를 위한 운동이 아닌, 운동을 위한 논리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이수호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전태일정신을 ‘노동자정신’이라고 본다. 이총장은 “노동자로서의 인간선언이며,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사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민중정신”이라고 풀어냈다.
70민노회 부회장이기도 한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그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껴안고, 노력하고, 고민하고, 헌신하고, 투신했던 전태일의 정신은 현장에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집회나 행진 때 ‘정신계승’을 외치는 게 다가 아니라 “삶을 통해 주변 동료에게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는 향기를 냄으로써 다른 사람한테 그런 삶을 전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삶은 노동자 뿐 아니라 청년, 학생 등 어떤 부문이든 자기가 속한 현장에 파급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인숙 여성연맹 위원장은 “노동자들의 평등이 전태일정신”이라고 말한다. 정위원장은 “특히 90년 이후 비정규직이 급속히 늘면서 노동자간의 심각한 차별이 구조화되고 있다”며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에 대해 인적·물적 지원과 관심을 갖는 것이 또 하나의 전태일정신 계승”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내가 운동을 시작한 70년대에는 의견차이가 있어도 조직적 결정에 복무했는데, 요즘은 자기 입장만 고집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며 “전체 노동계의 대의를 위해 차이를 극복하고 조직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 역시 전태일정신이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를 모태로 하는 서울지역의류제조업노조 김정호위원장은 “어렵더라도 굽히거나 포기하지 않는 조직활동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투쟁정신이 지금 시기 더욱 절실한 열사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김위원장 역시 “현장노동자와 동지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도 전태일정신”이라고 덧붙였다.
30주기를 맞아 ‘연극 전태일’을 기획하고 있는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의 손동혁대표는 이번 연극을 위해 공연팀과 전태일정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손대표는 “전태일은 처음에 아주 착한 사람이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으며, 방황도 하다가 여론·조직활동을 했고, 그마저 벽에 부딪히자 극한지점까지 밀고 나가며 현실의 고민을 완성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완성돼간다는 것을 느꼈다”고 토론내용을 전했다. 그런 인간상을 재현해 나가는 게 ‘노동해방’이고, 그것이 바로 전태일정신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편 세월이 흐를수록 정신의 실체가 점점 막연하거나 잊혀지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지난해 새로 결성된 한 서울지역 노조 위원장은 “솔직히 전태일정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고 털어놨다.
공공연맹 영상패 ‘세상보기’에서 활동하고 있는 관우회노조 박주동 사무국장은 국제노동영화제 출품작을 만드느라 최근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 학생들을 상대로 전태일정신에 대해, 그리고 ‘지금 노동진영이 과연 전태일정신을 계승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 사무국장은 “뜻밖에 전태일정신에 대해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단지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노동자였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했다는 정도로 아주 일반적인 것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황미 leehm@nodong.org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