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시 후에풍 신발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맑스주의를 방어하며] 10/23 응구옌키
14년에 걸친 “개혁” 이후, 새로운 경제 계획의 도입, 즉 이른바 “사회주의적 방
향 속의 국가 통제 시장 경제”는 과거의 정체나 곤궁과 비교되면서 베트남에 경제
적 붐을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경제가 이웃 나라들의 금융 위기에 대한
면역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부는 절망적으로 외국의 투자를 기
다리고 있다. 정부는 국영기업들의 소위 “주식화”(다른 말로는 ‘민영화’)를 가속
화하고 있다. 올해 정부는 공공 소유 기업들의 주식 거래와 합작기업의 설립을 허
용했다. 또한 경쟁력없는 국영기업들을 매각했다.
외국 자본가들은 베트남에 들어오자마자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부당한 대우를
최대화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모색했다. 여러 해 동안 한국과 대만을 비
롯한 여러 외국 기업가들은 반노동자적인 혹독한 방법들을 동원해 왔다. 전국 지
도부로부터 지역 조직에 이르기까지 노조의 대응은 꽤나 자주 너무 느렸으며, 노
동자들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무능력만을 보여줬을 따름이다. 파업은 거
의 보고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노동자들의 관심도 거의 끌지 못했다. 하지만 4천
명 이상이 참여한 9월 12일-13일의 후에퐁 회사(합작 신발생산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베트남 노동자 투쟁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른 노동자 탄압
오랫동안 후에퐁 회사는 혹독한 규정 부과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뚜렷이 침
해하고 노동관계법률을 위반해왔다. “관계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회사는 3천 2백
여 노동자(대부분 타지방 출신)를 고용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임시적인 노동계
약만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회사는 사회보험 분담금과 최저임금 지불
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14-16세 사이의 아동 노동자 130명을 고용하고 있다. 고
용된 후 노동자들은 그 어떤 노동계약도 맺지 못했다.” ([라오동] 2000.10.16.)
“노동자 숙소에서는 36평방미터 넓이의 방에 20명의 노동자가 생활하고 있으며,
천장은 고작 3.3미터 높이이다. 각 노동자에게 할당된 공간은 겨우 1.8평방미터
정도이다. 수도 공급은 언제나 불충분하다.” 이어지는 [라오동]지의 보도이다.
“9월 12-13일의 파업 이후 회사측은 28개에 달하는 노동자들의 불만사항에 대처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회사는 실제로 거의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노
동자들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무시했다. 임금 징계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회사는
보다 혹독하고 세련된 규정을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징계를 지속시킬 수 있
도록 새롭게 위장한 규정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화장실을 사용하는 동안 노동자
카드 소지를 깜박한 노동자들은 임금에서 7만동에서 10만동까지(미화 1달러는 약
만 4천동) 노동 효율성 보너스를 공제당한다. (파업 이전에는 회사가 직접 노동자
들의 임금에서 뺐다.) 더 심각한 것은 10월 3일 회사가 발표한 51조 규정
(TB-HP-00)이다. 이에 따르면 회사는 생산을 감축하기 위해 천 5백 명의 노동자들
을 해고해야 한다. 곧 이어, 발표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회사는 더 많은
노동자들의 모집을 추진했고, 그날 저녁 이미 일부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회사의 배신과 거짓말, 무시 그리고 회사측과 타협해버린 무능한 노조에 대한
분노와 함께, 9월 16일 아침 500명 이상의 후에퐁 회사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수시간 동안 팜반치외 거리의 교통을 마비시켰다.
“이 파업을 통해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수많은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알렸다. 후에퐁 회사를 재판정에 세울 것과 노조의 재조직화, 그리고
회사가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일 것 등을 요구했다. 당국과 경찰이 개입하고서야
노동자들은 일터로 복귀했다. 그러나 12명의 노동자는 작업 복귀를 거부하고 고밥
지구 12구 인민위원회까지 행진, 청원서를 전달했다.” [라오동]지의 보도이
다.(2000.10.17.)
이 상황들에 뒤이어 바로 수일에 걸친 비극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희생을 감
수한 채 노동자들의 이익과 정의를 위해 스스로 투쟁에 뛰어든 12명의 노동자들은
후에퐁 회사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처우의 희생자가 되었다. 문제는 노조 지도자
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뒤따른 비극을 막기 위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이
다.
10월 16일의 파업 후 회사측은 이 12명의 노동자들의 작업 복귀를 거부했다. 이
들은 심지어 노동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도 거부당했다. 그날 밤 잘 곳도 없었던
이들은 자정 무렵 [라오동]지의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숙
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측 경비원들이 우리 노동자 카드를 강탈해갔으
며,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를 몰아냈다.”
“만약 우리가 노동자 기숙사 밖의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면, 회사가 우리를 해
고했을 때, 우린 최소한 머물 곳은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규정에 따라
우리는 기숙사 안에서 살아야 했다. 회사측은 우리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우리 대
부분은 북부 출신으로 여기엔 아무 가족도 없다. 기숙사에 머무르지 못한다면 우
리는 갈 곳이 없다. 그 긴 밤을 우리는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돈도 없었고, 짐도
없었다. 씻지도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그저 거리로 내던져 버리고는 우리가 헤매
고 다니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 후인투옌이 분개하며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노조와 정부의 대처는 너무 느렸다. 비극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었다.
10월 19일 [라오동]지의 보도처럼 이 비극은 12명의 노동자들이 일터 복귀를 요
구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서 벌인 단식 투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라오동]지 기자들)는 일련의 기사들을 통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대
표해 12명의 노동자들이 후에퐁 회사(호치민 시, 고밥 지구) 사측이 자행한 부당
한 처우를 고발한 사실을 보도했다. 2000년 10월 16일과 17일, 이 12명의 노동자
들은 숙소에서 밀려 나왔으며, 작업장 복귀도 거부당했다. 음식도 먹지 못하고,
쉴 곳도 없이, 그리고 씻지도 못한 채 이틀이 지나고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
랐다. 10월 18일 아침, 그들은 공장으로 찾아가 작업 복귀를 요구했지만, 회사는
거부했다. 호치민 시, 그리고 남부 지방을 통틀어 처음으로 이 12명의 노동자들은
후에퐁 회사 정문 앞 도로에 누워, 뜨거운 태양열에 자신들을 노출시키며 단식 투
쟁에 들어갔다. 사측에 의한 가혹하고 부당한 노동자 처우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30분 공장 정문에 도착한 우리([라오동]지 기자들)는 이어지는 상
황을 지켜봤다.
뜨거운 태양 아래 노출된 채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기 위해 수백 명
의 사람들이 팜반치외 거리 주위로 모여들었다. 첫 번째로 남성 노동자 당반코아
이가 탈진해서 쓰러지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몇몇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
의 동료가 탈진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 속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이 날 오후 1시가 되자, 이들 중 7명이 굶주림과 열기로 쓰
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당국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회사 경비원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정문을 무너뜨리려는 군중들에 대항했다. 이 비극을 지켜본 부
이반호씨는 깊이 분노하며, 쓰러진 노동자들을 위해 10만동을 내고는 이렇게 말했
다. “이 회사는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노동자들의 참상에
이토록 무관심할 수 있는가?”
회사는 12대의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쓰러진 노동자들을 병원으로 옮기
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오후 1시 반에 지방경찰이 나타나 주위 질서를 정
리하고, 고밥 지구 사회노동재해센터 관계자가 택시 세 대를 불러 노동자들을 병
원으로 옮겼다. 오후 2시, 경관들과 고밥 지구 당국 대표자들이 회사측과 파업에
관한 임시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 회의 참석을 요구하자, 회사 경비원
들은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고밥 병원의 의사 부이도안티엔은 “수일 동안의 굶주림과 수면 부족, 그리고 뜨
거운 태양열에의 노출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다”고 말했
다.
끝은 아직 멀다
10월 19일 저녁, 회사 사장은 얼마간의 돈을 주겠다는 등 이 노동자들에게 양보
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날 밤, 노동자들은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고, 사흘간의
헤매임은 끝났다.
고통스럽고, 또한 역설적이게도, 10월 20일은 베트남 여성의 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극의 몇몇 희생자들 역시 여성임을 알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자신들
의 날을 기념하는 다른 여성들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굳건하게 싸웠던 이들 용
감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십년 동안 베트남은 이같은 파업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극히 소규모의 분
쟁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주요 국영 텔레비전 채널인
VTV1은 이 파업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다. 수백만 명이 이 비극에 대해 알게 된
다면, 분노의 물결이 일고 사회적 소요가 야기될지도 모른다는 정부의 불안감 때
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합작 회사의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선 많은 부분이
숨겨져 왔다. 오래 전부터 정부는 정치적 이견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어쩌면 오랜 관료주의와 부패에 맞선 노동자들의 새로운 투쟁
을 열어젖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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