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적 뒤틀림으로 세상을 본다 2

이수진 (평화인권연대 대안문화·미디어모임 R.exe 활동가, riverexe@hanmail.net)

토미에 보다 완벽한 ‘소용돌이’

이토 준지 공포만화에서 최고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한번 보기만 하면 죽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매력을 가진 토미에는 어떨까. 그녀의 매력은 사람들의 소유욕과 편집증과 같은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데다 사라진 후에도 지독하게 흡인력강한 자취를 남긴다. 그러나 매우 불완전하다. 아름다움 뒤에는 악령의 모습이 있고 이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사진 속엔 그대로 찍히곤 한다. (불완전한 건 그녀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일지도.)

그렇다면 토미에처럼 끊임없이 재생되며 엄청난 흡인력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그녀의 모든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한 듯한 매력적인 캐릭터로서 ‘소용돌이’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만화의 경우는 사실 캐릭터가 작품의 매력을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캐릭터의 비중이 커진다는 건 그만큼 대중적인 주목을 받기가 쉽고 이후 상업적인 이용가치가 고려된다는 것과 연계가 있는데, 요즘은 영화, 드라마, 의도적인 캐릭터 상업화를 위한 포켓몬류의 만화 등의 전반에서 보여진다. 어쨌든, 상업적 가치를 고려할 만큼의 세련미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소용돌이가 영화화된 것으로 봐선 충분히 대중성을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작품은 소용돌이 매니아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 소용돌이의 희생자인 슈이치의 아버지는 수집광에서 시작해 눈동자나 혀로 소용돌이를 연출하고 급기야는 몸을 말아서 죽게되는데 죽은 후에 화장한 연기도 소용돌이 모양으로 톰보 강에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아버지와 반대로 슈이치의 어머니는 소용돌이의 공포에 시달리며 지문을 오려내고 결국은 달팽이관을 없애서 현기증에 시달리며 죽게 된다.

여성을 삼킨 소용돌이의 저주

이렇게 소용돌이의 저주는 소용돌이의 강한 이미지인 ‘흡인력’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흡인력은 사람들의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된다. 그러한 욕망이 여성에게 있어서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심리로 발전하는데 머리카락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자라나서 그것을 거부하게 되면 목을 조르고 결국은 몸의 모든 기를 빼앗아 파멸시키게 된다. 여기서 그러한 파멸에도 불구하고 더욱 주목받기 위해 두 여성의 머리카락이 경쟁하는 장면은 현실에서 여성들의 선택되어지고자 하는 욕망과 흡사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욕망은 결혼, 취업 등 여성의 능력이나 지위를 평가하는 사회적 요구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이러한 여성권의 박탈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기형적인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임산부들이 한여름에 우르르 병원을 찾는다. 그 시기에 마을에선 웬 모기떼들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몰려다니기도 하는데 병원을 찾은 임산부들은 하나같이 드릴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모기에 심하게 물려 있다. 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은 그녀들이 밤마다 사람들의 몸에 드릴을 꽂아 흡혈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흡혈로 사람을 죽여서 모두들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얻게 되는데 그 이후로 이상한 버섯요리가 나오게 되고 모든 환자들은 피 냄새가 나는 그 버섯에 현혹된다. 그 버섯의 정체는 태어난 이후로도 아기들의 배꼽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태반이었고 아기들은 다시 엄마의 뱃속에 들어가길 원한다. 소용돌이의 저주에 걸린 의사는 아기들의 요구대로 도로 엄마의 자궁 속으로 아기를 집어넣는 수술을 하게 된다. 이런 식의 잔인한 발상은 모성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여성이 임신 후부터 얼마나 치열하게 아기를 키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결국엔 아기에 의해서 몸이 지배되어 자신을 상실해나가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슈이치의 어머니의 공포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달팽이관을 스스로 없애게 주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네의 모습을 한 아버지의 유령이다. 자신을 따르라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강요와 그에 대한 순응인 것이다.

현실을 삼킨 소용돌이와 미래의지

소용돌이의 마지막 장면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화려하고 완결적이다. 물론, 완결적이라 함은 이토 준지식의 완결인데, 끝은 맺지 않고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을 독자에게 양보하는 식을 말함이다. 작품전체에서 다양한 사건을 연출하는 소용돌이의 저주란 과연 무엇일까. 소용돌이 자체가 인간이 현실을 살면서 겪는 인간성의 말살로 치닫는 무한생존경쟁의 삶이 아닐까. 가장 엽기적이고 기발한 내용으로 꼽는 달팽이 인간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 달팽이 인간의 삶이 시사하는 것은 결국 생존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의 끔찍한 삶이 아니겠는가. 조금씩 느려지다가 결국 달팽이가 되고 회오리바람을 탈 줄 아는 새로운 기술을 익힌 나비족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운명… 이후엔 소용돌이의 저주에 걸리지 않은 주인공들도 살기 위해서 이를 먹게 된다.

이 마을의 톰보 강은 소용돌이의 근원지였고 마을의 모든 흉가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소용돌이는 직접 사람들을 말살하진 않는다. 사람들의 무수한 욕망에 접근해 애초에 계획된 것 같은 소용돌이의 저주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흉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하게 된 것도 사람들 스스로가 건물을 증축해 나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소용돌이의 마지막 완성태였다. 그 소용돌이의 완성태는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할퀸 사람들의 자취들을 고스란히 담고 모든 사람의 얼을 빼놓을 만치 아름다운 소용돌이의 유적을 드러내게 된다. 그 유적에 광채를 내며 새겨진 소용돌이 유적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증오와 반목에서 비참하게 내몰린 젊음과 사랑(카즈노리와 요리코의 이야기), 모든 사람의 시선이나 인기를 얻으려 몸부림치다가 자멸한 사람들(아자미, 세키노, 야마구치), 엄청난 광선을 뿜어대는 등대를 보고 멋진 로봇이라며 현혹되어 타죽은 아이들, 옆집을 몰래 들여다보려는 관음증적인 행위로 온몸에 송곳이 생겨나 죽은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비좁은 공간에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옆 사람이 하나둘 죽어가고 그 시체를 내다버리며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그 소용돌이의 유적인 것이다.

끝까지 저주에 걸리지 않은 슈이치와 키리에를 보자. 슈이치는 모든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원인이 소용돌이의 저주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을의 절망적 미래를 예견하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떠나거나 하지 않으며 소용돌이의 저주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쓰면서 현실에 맞서는 편이다. 키리에는 좀더 적극적인 유형으로 가족을 구하기 위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소용돌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순과 유사하다면 슈이치는 그러한 사회현상을 분석하며 고뇌하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않으려는 지식인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처음 소용돌이에 오염된 부모를 가졌다는 점을 보아 이전세대의 모순성을 짐 진 채 행동하지 못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그에 비하면 키리에는 마지막에 가족을 구하러 간다는 일념 하에 탈출의 결단을 내리거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러나 결국 이들도 소용돌이의 유적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보니, 마지막의 슈이치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소용돌이의 유적이 마치 살아서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자신은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유적이 눈을 뜨기 전까지는 새로운 마을이 다시 태어나고 모두 행복할 것이라는 결말로 작품은 끝이 난다. 유적의 의지란 현실을 사는 우리들이 소용돌이의 저주에 걸려서 상실한 무엇이거나 모든 마을이 소용돌이의 저주에 휩싸였을 때 파멸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는 노아의 방주 같은 미래일 것이다.

아니면… 현실에 대한 증오에 똘똘 뭉친 작가가 창조해낸 이상향일지도…(실제로 이토 준지는 음울한 학창시절과 성장과정을 보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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