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기저귀 교환대가 없는 화장실의 세면대에서 한 주부가 어렵게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다. 출처 : 여성신문 >
성남에 사는 이혜정씨(32·회사원)는 직장이 시청이라 지하철 출퇴근 시간이 길다. 그렇다 보니 지하철역 화장실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화장실에 벽걸이가 없거나 떨어져 나가서 목에 무거운 가방을 걸고 두꺼운 겉옷까지 들고 볼일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문 사이가 벌어져 밖이 훤히 보이는 곳도 많아, 밤늦은 퇴근시간 혼자 화장실에 있자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홍제동에 사는 이정화씨(38·주부)는 집밖에서는 아예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쇼핑을 하러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센터에 들르면 여성고객들이 많은 식품매장이나 숙녀복매장의 여자화장실 수가 다른 층과 별 차이가 없어 항상 만원일 뿐만 아니라, 가끔 공연장이나 극장에 가도 여자화장실은 북새통을 이뤄 곤욕을 치른 적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화장실에 들른다는 건 그야말로 ‘전쟁’그 자체였다.
최근 각 시·도·구청에서 공공화장실 개선운동이 활발하다. 아셈정상회의, 2002년 월드컵경기와 아시안게임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지난 해부터 ‘화장실을 바꾸자’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재정자립도가 15%밖에 되지 않는 한 지방자치단체가 도청의 화장실문화혁신운동 시상금 10억원을 탐내 3억원짜리 호화판 화장실을 짓는가 하면 다른 지자체에서도 고급 화장실을 건립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같은 화장실 개선운동이 ‘사람’을 고려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고 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자체들의 ‘전시행정’만 있을 뿐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걱정은 더하다. “고급 장식재와 시설 등 화려한 화장실 한 동을 짓는 비용으로 가뜩이나 부족한 여자화장실 수를 늘리는 게 낫지 않느냐”“남자라면 노상방뇨까지 해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만큼 남성들은 어디서 소변을 보느냐에 크게 구애받지 않지만 아무데서나 소변을 볼 수 없는 여성들에겐 화장실 문제는 큰 문제다.”
화장실로 인해 불편을 겪어 보지 않은 여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여성들의 불만의 목소리는 높다.
여성신문사가 “공공화장실의 달라져야 할 점”을 묻는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장 많은 여성들이 여자화장실 수를 늘려 달라(36.36%)는 요구를 했고, 거의 비슷한 수치로 좌변기에 일회용 위생시트를 설치해 달라(35.61%)는 요구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를 앉히거나 휴대품 놓을 시설이 필요하다(11.36%)는 주문이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데 비해 공공시설의 여자화장실 수와 시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다.
행정자치부 여성정책담당관실의 정부효 사무관(39)은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화장실 사용시간이 길다는 것이 많은 조사에서 밝혀졌는데도 보통 여자화장실 수는 남자화장실 수보다도 같거나 더 적다”고 지적했다. 정 사무관은 “행자부가 있는 세종로 종합청사만 해도 남자화장실이 두 곳인데 비해 여자화장실은 한 곳밖에 없다. 현재 공무원과 민원인 수가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아 비율상으로 보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공무원 수를 늘리는 추세므로 화장실 수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수분뇨 및 축산폐수 처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서는 공공화장실 설치기준을 “전체면적 33㎡ 이상으로 하고 대변기 11개(남자용 3개, 여자용 8개) 이상, 소변기 5개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설치장소 여건상 면적 확보가 어려운 경우에는 확보 가능한 면적에 적합한 수의 대변기를 설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두고 있어 변기 수에 대한 규정이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여자화장실의 부족한 변기와 부실한 시설 때문에 괴로운 건 여성뿐만 아니다. 남성도 아내나 여자친구와 함께 공중화장실을 이용했을 때 먼저 나와 한참을 기다린 경험이 많을 것이다. 한 남자교수는 학교에서 1주일에 한 번은 여자화장실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필요한 청소도구가 여자화장실에만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어린 딸과 산책하기를 좋아하는데 밖에서 공중화장실에 가면 기저귀를 교환할 공간이 없어서 난처한 경험이 많았다.
공공화장실에 반드시 있어야 할 편의시설로 여성들은 어린 자녀를 위한 기저귀 교환대나 유아용 의자, 짐을 얹을 수 있는 선반이나 벽걸이, 그리고 좌변기용 위생시트 등을 꼽는다. 어린 딸을 둔 이수영씨(32·번역작가)는 “드물게 볼 수 있는 화장실 안의 기저귀 교환대나 유아용변기들이 예외없이 모두 여자화장실에만 있어 불만”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사회 문화가 화잘실에도 반영된 것”이라면서 이러한 공간이 양성공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어린 자녀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화장실을 만든 곳이 있다. 목동에 있는 백화점 ‘행복한 세상’은 설계 당시 고객 모니터를 실시하면서 여성고객들이 제안했던 것을 반영, 보통 화장실보다 1.5배 정도의 가족화장실을 만들었다. 백화점 직원은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썼다며 감탄하는 고객들이 많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남성이기 때문에 화장실 설계시 ‘여성’을 고려하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화장실 밖까지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발을 동동 굴러본 경험이 없는 남자건축가들이 어떻게 여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게 한 여성건축가의 말이다.
한국여성건축가협회 박연심 부회장(51·장원건축 대표)은 “건축설계시 화장실은 구석진 음침한 공간에 배치해 왔는데, 여자화장실에서 성추행·성폭력이 흔히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방재·방범을 위해 화장실은 환하고 트인 공간에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대 민선주 교수(42·건축대학원)는 “여성들의 공간 활용도나 신체구조 등을 고려하면 여자화장실이 더 넓어야 하는데도, 건축가들이 편의적으로 설계하다 보니 남녀화장실 면적도 기계적으로 똑같이 배치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그는 건축가가 설계할 때 건물 사용자나 방문자의 성별 비율, 건물용도 등을 구체적으로 고려해 화장실 수를 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운동경기장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라고 생각했던 건축가가 여자화장실을 충분히 설치하지 않았는데, 경기장이 콘서트장으로도 활용되면서 여자화장실이 턱없이 부족해 큰 혼잡을 빚은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남녀공용 화장실도 큰 문제다. 중소 상가건물, 음식점이나 술집 등에서 남녀공용 화장실을 이용하다가 불쑥 이성이 들어오는 바람에 당황해 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화장실문화시민연대(대표 이정자)가 지난 7월 서울시내 25개구 264곳의 재래시장 화장실을 조사한 결과, 전체 56% 화장실이 남녀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았다. 표혜령 사무국장은 “현재 화장실 관계법은 전혀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최저수준과 조건을 명시한 의무조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도영 교수(38·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는 “화장실처럼 가장 내밀한 공간이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언어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송 교수는 화장실 개선운동에서 사용자인 여성들이 모니터하고 개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여기저기서 시상하는 좋은 화장실을 선정할 때도 여성과 관련한 평가 항목들을 넣도록 요구해야 하고, 여성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자기 주장을 펼칠 기회가 없는 고령자나 유아들 그리고 장애여성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고 송 교수는 제언했다.
이김정희 기자jhle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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