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 선지현 (노동자의힘 회원)
“운동사회 또한 일반 사회인들이 갖는 편견과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일반사회에서 지켜지는 상식적인 문제의 해결 또는 운동진영의 궁극적 목표가 기존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구조를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싸운다면 우리 내부에서부터 그런 기풍을 가져나가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 100인 위원회, 성폭력 사례를 공개하며 中
지금까지 변혁을 전망하는 운동진영 내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여성억압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둔감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둔감’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운동진영은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표명하고 실천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제공한 것이 바로 100인 위원회이다. 그런 점에서 100인 위원회의 활동을 가치없는 행위로 비난하거나 가십거리 수준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활동이 가져다 준 긍정성에 주목하고 이를 어떻게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100인 위원회 활동의 긍정성에 주목해야 한다.
100인 위원회 활동은 우선 100인 위원회의 활동이 운동진영에게 앞서 말한 과제인식에 대해 긴장감을 불어넣고 가부장적 사회 이데올로기와 성폭력에 대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했다는 점이다.
3달 전부터 떠돌던 가해자 명단과 관련된 이야기들, 정치활동 탄압을 둘러싼 서정영주의 주장과 반론 등에 대해 활동가들은 ‘이것도 성폭력인가’라는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데 대단히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남성활동가들 중 일부는 “나도 이런 적이 있었다”며 고백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가부장적 사회구조로 인해 남성도 억압당하고 있다”는 주장도 펼쳐졌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자리에서 토론의 주제로 떠올랐다.
여기서 100인 위원회를 비판했는가, 아니면 옹호했는가는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두 번째 의의로 설명할 수 있는데, 과거 이러한 문제들이 터졌을 때 비공식적인 논의, 소수 몇 사람들에 의해 해결되거나 혹은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듣고, 판단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게 되고 그 결과 ‘가부장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성폭력은 무엇인가’를 대중적으로 논쟁하면서 정형화된 것이 아닌, 대중의 논쟁 과정 속에서 비로소 정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갑론을박을 넘어 실천을 고민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100인 위원회의 활동이 충분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쉬운 그래서 고민되는 문제들…
나는 이 문제를 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운동권이라면 그런 문제들이 있으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고 무조건 폭로만 한다면 과연 그들이 같이 운동하는 동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도대체 운동권이 뭐기에 대화와 토론만으로도 감화 받고 교화되어 자신이 저지른 문제들을 바로 인정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운동권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이러한 단서는 100인 위원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이러한 상식에 동의하고 지지·지원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일반 가부장성에 물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그대로 적용하려 하고 있는가. 그것이 진보라면 나는 진보 안 한다”
100인 위원회의 ‘운동권이라면’이라는 단서는 마치 운동진영내 정화운동을 벌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더 나아가 도덕과 상식을 강조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에 취해 거짓으로 운동을 말하는, 그래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으로까지 왜곡되었다.
그 결과 많은 남성활동가들에게 관련되는 사안들에 대해 소극적이고 조심스럽게(침묵하는 것)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는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계속되는 ‘단죄’는 100인 위원회 활동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사실, 상식과 도덕은 너무도 우스운 것이다. 이 사회에서 돈 많은 놈은 자가용 타고, 돈 없는 놈은 지하철 타는 것이 상식이지 않는가! 결국 상식이라는 것은 현실사회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할 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닌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권이 아니라 이러한 성폭력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지되었던 우리 운동의 수준이다. 상식과 도덕으로 단죄되는 문제가 아니라 성폭력과 같은 성 억압 중에서도 가장 저열하고 치졸한 행위가 가능했던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100인 위원회가 운동진영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해 낼 것 인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협소화시키고 제한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덧붙여 나는 100인 위원회가 자신의 활동을 성폭력의 가해자를 폭로하는 것만으로 제한하지 않았으면 한다. 최근 성폭력 가해자 명단이 사이버상에 올려지면서 엄청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보수 언론에까지 100인 위원회가 발표한 내용들이 소개되는 등 파장은 더욱 커질 기세다.
또한, 이를 둘러싼 논란은 실로 대단하다. 반박 글에서, 소개된 성폭력을 부정하면서 법적 소송을 준비하는 사람들까지 과연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가 주목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명단공개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에 대한 평가와 내용에 대한 판단은 100인 위원회가 아니라 그 글을 읽는 독자들과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대상인 운동진영, 우리의 몫이다. 이를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논쟁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100인 위원회가 폭로로만 그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100인 위원회가 운동사회내 성폭력과 가부장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를 유지시키고 비호하는 사회구조와 기제에 대한 적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해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들, 그리고 사회적 기제들에 대한 투쟁을 벌여내야 한다. 예를 들어 ‘형님들’라는 단어를 사용한 학생들과 사례를 폭로했다면 이제 운동진영 내부에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 언어사용이 갖는 문제들에 대해 100인 위원회의 주장이 있어야 한다. 또한 가해를 하고자 가해행위가 은폐되어진 사실로부터 가해자를 발표했다면 성폭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부장성의 실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변혁운동을 질곡하는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주장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폭로도 의미가 있다.
폭로의 목표가 가해자를 벌주고 운동진영 밖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폭로를 통해 존재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성폭력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이러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폭로는 가해자에게 벌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의식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는 나아 갈 수 없다. 그리고 우리들의 논쟁도 이제는 여성억압의 다양한 국가기제들과 이데올로기들에 대항하는 우리의 관점과 실천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하나의 이벤트성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내부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이 소중한 논쟁이 논쟁으로만 끝나고 어떤 변화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마지막으로 나는 1차 폭로에 그치지 않고, 2차 3차로 예정되어 있는 폭로에 있어 100인 위원회가 고려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1차 폭로로 인해 많은 논쟁이 있고, 사실 이 논쟁의 다수는 ‘성폭력이냐 아니냐’ ‘사실이 맞는가 틀리는가’로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폭로가 갖는 의미와 행동의 변화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2,3차에 걸친 폭로가 1차 폭로 때 제기되는 논쟁을 넘어 생산적인 논쟁으로 가기 위해서는 1차 폭로 결과에 대한 보다 치밀하고 냉철한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2, 3차 폭로는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운동진영내부에 던지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보다 상승된 주장이 담겨져야 한다. 즉, 폭로와 더불어 행동과 의식의 변화라는 힘을 가지고 2,3차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추가 명단을 밝히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정말 벌주는 것으로 그치고 그 결과는 운동의 발전이 아니라 100인 위원회가 벌주는 권력기관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제, 운동진영이 이야기해야 한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신자유주의 공세는 전체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압살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 중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은 그 공세에 중심에 놓여 있다. 비정규직의 다수가 여성이고, 해고대상의 1순위가 여성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해고가 현실화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양보해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어떤 논문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물론 그래서 남자도 동등하게 해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리해고 철폐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장하면서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제1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여성문제하면 권리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를 해결하는 방식이란 여성할당제를 두는게 고작이다. 그리고 그것을 대단히 진보적인 것인양 말한다. 그러나 정작, 신자유주의 공세와 탄압의 그 곳에 왜 여성이 집중포화를 받는가는 주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동일한 공권력투입에서도 여성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일은, 성폭행과 성희롱 등의 부가되는 폭력이다. 이런 문제들에서는 언제나 여성단체연합과 같은 곳에서 분노하면 기자회견을 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곳에 우리는 없다.
100인 위원회 주장대로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를 넘어 진정한 해방’을 위해 투쟁하기에 우리는 이제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과 야만에 대항해야 한다. 그리고 변혁적 사회전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기생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가를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운동진영 조차도 자유롭지 않을 만큼,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이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이 자체의 모순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투쟁의 과제로 제기해야 한다.
여성운동, 변혁적 전망과 실천속에서 함께 가야한다.
나는 여성활동가모임이나 100인 위원회가 ‘단지 우리의 행동을 이해해 달라’를 주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활동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들을 해체키는 것이고 나아가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운동이 부문주의적으로 혹은 소수자 운동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변혁적 전망과 실천속에서 함께 가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치열한 논쟁을 할 수 있다. 활동방식의 문제가 아닌 사상과 실천을 가지고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바로 노동자정치운동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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