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음란범’이라 부르지만,
나는 ‘훌륭한’ 미술 교사라 부르마 !
교사이자 예술가, 그리고 시민인 한 남자
이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주민 천 여명에 티켓 다방이 아홉 개인 한 시골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 곳의 조그마한 중학교에는 예술가이자 교사인 40대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교육 민주화를 위해 5년이라는 시간을 희생할 정도로 ‘참교육’의 꿈을 잃지 않은 선생님이다. 또한 그는 ‘중앙미술대전’과 ‘신세계미술대전’에 입상했을 정도로 미술판에서도 알아주는 역량 있는 작가다. 따라서 그는 꽤 오랫동안 미술교사이자 예술가로서 시골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호흡해왔다.
하지만 40대 중견작가이자 미술교사였던 그의 삶은 한 학생의 홈페이지 방문이라는 평범한 행위를 통해 세상 속으로 ‘아우팅'(outing)되었다. 제자는 우연히 찾아간 선생님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선생님 부부의 나체사진을 보았고, 이 사실이 학부모에게, 다시 학부모 회장에게, 그리고 교장과 교육청 장학사에게 곧 바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의 스토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곧바로 교장에게 불려갔고, 학부모들은 홈페이지에 실린 작품, 구체적으로는 나체 사진과 성기그림이 교육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홈페이지 폐쇄를 요구했다. 당장 폐쇄하지 않으면 등교거부 등 집단행동을 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는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부모들이 원하지 않으시니 학생들은 입장을 삼가달라는 메시지를 띄울 수 있다”라고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학부모들은 교사나 예술가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며 (홈페이지 폐쇄를 통해 교사로 남으라고) 강요하였고, 결국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그를 대검찰청 사이버수사대에 고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음란물 유포’와 ‘청소년보호법 8조 1항’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긴급 체포되었고, 다행히 며칠 후 구속적부심에서 영장이 기각됨에 따라 풀려났다. 하지만 지금도 검찰에 의한 일방적인 조사는 계속되고 있으며, 매스미디어는 사건의 맥락을 애써 무시한 채 오직 선정적인 상품으로 그를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그를 둘러 싼 음란성 시비는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
또 음란이야?
충남 서천의 비인중학교 김인규 미술교사의 이야기는 이렇게 사회화되었다. 물론 “시골 정서를 이해해야지….”, “그까짓 이미지 하나 가지고 뭘 그래 삭제하면 되지!”, “표현의 자유도 좋지만 교사가 그래서야….” 등의 한 마디를 통해 흔하데 흔한 음란성 시비로 흘려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설픈 중재는 갈등을 감추고, 감추어진 갈등은 언젠가 증폭하여 폭발하는 법이다. 더욱이 한국 사회에서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는 ‘음란의 잣대’는 이제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는 수위에 다다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한 남자를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지지하고자 한다. “철없는 녀석”이라는 점잖은(?) 꼰대들의 손가락질을 즐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음란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상과 표현이 검열 가능한 한국 사회에 온 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그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끼면서….
먼저 어긋난 출발이자 잘못된 오해인 ‘음란’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되는 그 음란이란 위대한 개념 말이다. 음란이란 용어가 한국 사회에서 지나치게 추상적인 잣대라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적어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헌법재판소마저 음란이란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음란이란 인간 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전체적으로 보아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1998. 4. 30. 선고95헌가16결정)
그렇다면 과연 김인규 교사 부부의 나체사진을 음란물로 볼 수 있을까? 우선 “예술, 미학, 어쩌고” 하는 어려운 말은 논외로 할지라도 그의 홈페이지를 한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사진이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성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는 경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문제가 된 김인규 교사 부부의 나체사진은 오히려 몸에 대해 상업적이고 남성 편향적인 우리 사회의 “외설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제기에 가깝다. 즉 임신한 부인와 함께 한 그의 평범한 나체사진은 홈페이지에 게재된 다른 사진들과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신데렐라(상품화 된 육체)가 될 수 없는 우리의 몸”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우리 사회의 일상적 음란성을 폭로하고 있다. 즉 역설적이게도 김인규 교사의 사진은 음란물이기보다는 음란물에 둘러싸인 사회를 비판하는 작업에 가깝다. 어떻게든 신체를 상품화하여 불특정 다수를 꼬드겨 보려는 시도와 김인규 교사의 작업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욱이 성문화에 대한 ‘에로틱 아트’나 ‘바디 아트’와 같은 현대 미술의 접근은 이미 문화예술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 신체의 부위가 “얼마나 보이고 안 보이는가” 하는 것은 결코 음란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과 신체의 표현 방식에 대한 비평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자 기본적인 상식이기 때문이다. 즉 적나라하게 보여진 “거시기”가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동시대의 문화적 의미, 미학적 가치, 사회적 관습이 신체를 둘러싸고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에 눈을 맞추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기의 노출이나 나체의 이미지 자체는 결코 예술작품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만에 하나(한국에서는 백발백중이지만) 사회적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전문성을 비롯한 다각적인 논의를 통해 충분히 평가하고 검증한 후 합의해 나가는 합리적인 과정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김인규 교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권력이 자의적이고 보수적인 미학(그것도 미학이라면….)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판단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사법적 권력을 휘두르는 세상에서는 21세기가 아니라 31세기가 되어도 문화예술의 창작성, 표현의 자유, 삶의 다양성에 대한 보장이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교사와 예술가는 공존할 수 없다?
다음으로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보여준 사회적 쟁점을 살펴보자. 학부모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삭제하거나 교사를 그만 두라”는 주장을 쉽게 펴고 있다. 즉 음란도 음란이지만 “교사라는 점이 더욱 괘씸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이번 마녀사냥의 주된 논리이다.
하지만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매우 비논리적인 발상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그로 하여금 작가의 양심과 사회인으로서의 신분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매우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김인규 교사가 지금까지 매우 열성적이고 창의적인 미술교사라는 평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즉흥적이고 비교육적인 주장이며 동시에 교권에 대한 일방적인 침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논리는 신체를 주제로 하는 예술가들은 비교육적이라는, 그래서 모든 작가는 교사와 같은 사회권이 박탈되어야 한다는 식의 신체와 성에 대한 모든 표현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청교도적 순결주의가 낳은 편집증에 불과하다. 즉 미술교사에게 있어 교사라는 주체와 예술가라는 주체는 결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발상 자체가 가장 비교육적이고 파행적인 예술교육을 이 땅에서 재생산하고 있는 이유이다. 말로는 “창조성”, “다양성”의 부재를 현실 교육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정작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교육 방식이나 이를 실천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한국의 문화보수주의와 경직된 교육풍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바로 미술교사의 예술적 창작행위와 교육활동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근거 없이, 모든 성적 표현을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규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청소년 보호라는 외피를 쓴!)와 일부 학부모들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선입견이 존재한다. 만약 김인규 교사의 사진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단지 나체사진이기 때문에 금기시 되어야 한다는 논리라면, 어느 학교 미술실에서나 볼 수 있는 ‘다비드’ 조각상을 비롯한 모든 나체상은 모두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음란범의 기원으로 미술사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즉 김인규 교사의 개인 홈페이지를 음란이라는 잣대로 구속하기 위해서는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에서 행해졌거나”, “명백히 현존하는 악영향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김인규 교사의 홈페이지에는 이러한 혐의가 전혀 없으며, 오직 몸에 대한 반성적 성찰만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규 교사와 그의 홈페이지를 비난하는 수많은 주장들은 아직까지도 음란성에 대한 구체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인신 공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그러했듯 오직 “음란하다” “음란하잖아”라는 억지만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인규 교사의 활동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의 작품이 청소년에게 유해할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단정 지은 후 음란물 유포죄로 긴급 체포한 경찰, 나아가 영장기각의 쪽팔림과 긴급 체포의 당위성을 위해 일방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검찰, 성적 표현에 대한 어떠한 전문성도 없으면서 홈페이지 폐쇄 전문가가 되고 있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의 섣부르고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막가파식 행동은 더 이상 용납되어질 수 없다.
“저는 게시판에 있는 몇 가지의 글 중에서 자식을 선생님께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감정적인 말에 대하여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소중한 아이를 세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선생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이번 사건 직후 김인규씨의 홈페이지에 남겨진 어느 제자의 이야기이다. 과연 음란범으로 체포된 교사에게 참교육을 배웠다는 그녀(그)의 역설을 경찰과 검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아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의 작업을 음란물로 규정하고 폐쇄를 종용한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그 고상한 청소년 보호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음란’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성적 표현물을 억압하던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그 어떤 법 조항보다도 결국 타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의미하고, 이는 문화적 다양성과 주체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에게는 뛰어나고 감동적인 표현이 다른 누구에게는 가장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주관적 판단에 있어 오류의 가능성은 존재하며, 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섣부른 규제와 처벌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가를 반증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소수의 똑똑한(?) 관료와 건전한(?) 어르신들에 의해 자행되는 일방적인 판단과 규제가 아니다. 인터넷을 비롯해 무수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사상과 표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자유와 관용, 나아가 사회적 이해이다.
문화개혁을위한시민연대 정보팀장
이원재 (redgang@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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