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비가 오는 가운데 일부 정규직 노조원과 계약직노조와 연대집회를 가졌던 114 조합원들
수량적 구조조정 극단… “약속한 1,600명만 줄이면 된다”
정규직 노조 외면 속에 ‘여성·비정규직’만 희생양으로 전락
일요일이었던 17일, 일방적으로 114 번호안내 사업의 분사강행 방침을 밝힌 지난달 3일부터 시작된 한국통신 114 번호안내원들이 농성 46일차. 분당 한국통신 본사는 아침부터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전날 밤 실시된 농성 계속여부를 묻는 자체투표에서 농성참가자 412명 가운데 74%인 306명이 찬성했기 때문에 집단 농성은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들 피곤에 지친 채 짐을 싸고 있지만 표정은 썩 밝지 못하다.
해산 하루 전날 한 조합원은 노조 홈페이지 게시판(http://slkttu.or.kr)에 “결과가 바라던 모든 것과는 차이가 나고, 45일간 투쟁한 결과 치고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속이 상해 우는 동료들도 있고, 화가 나서 한마디 말도 않고 돌아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어용성)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 쓰고 있다.
법도 상식도 없는 ‘이상한’ 구조조정
114 번호안내 조합원들이 업무를 마다하고 분당 본사에서 농성을 시작한 것은 5월3일, 회사쪽이 사내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114 안내 및 체납업무 분사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8~900여명에 달하는 114 조합원들은 분당 본사에서 밤샘 농성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서울, 경기 등 지역별 번호안내국을 돌며 114 분사의 문제점을 알려내며 회사쪽에 압력을 가해 왔다.
그러던 중 수원지법 성남지원이 이달 5일 114 번호안내 사업의 분사를 강행한 한국통신 이사회 결정에 대해, 효력정지 판결을 내리면서 114 분사저지 싸움에는 새로운 반전이 형성되고 있었다. 법원이 ‘노사간의 성실한 협상’을 전제로 ‘이사회 결의의 효력을 정지’한다고 판결한 것은 114 분사 방침이 노조와의 충분한 협의 없이 강행됐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7월로 예정된 별도 법인인 (주)KIS 출범에는 일정부분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법원 효력정지 판결 단 4일 만인 8일, 그동안 분사화 저지 투쟁을 방기하고 있던 한국통신 노사(사장 이상철·노조위원장 이동걸)는 장소조차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 협의에 들어가 9일 새벽, 114 안내 및 체납업무의 분사 및 분사조건에 대해 합의하고, 한국통신 사장을 대리한 정태원 인력관리실장과 노조위원장을 대리한 김호열 사무처장이 합의서에 서명했다.
법원의 가처분 판결로 새로운 희망을 찾던 114 조합원들과의 한차례 상의도 없이 갑작스레 이뤄진 직권조인은 114 농성대오들에게 또다른 투쟁과제를 던졌다.
직권조인 소식이 알려지자 본사에서 농성중인 114 안내 조합원 500여명은 직권조인 무효화와 이 위원장 퇴진을 요구하면서 10일 114 조합원들과 한통계약직노조, 유덕상 전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민주동지회 소속 정규직 노조원들을 주축으로 ‘공작적 노사관계 분쇄 및 분사철회를 위한 비상대책위(비대위)’를 꾸렸다. 비대위는 13일 농성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본사 앞에서 정규직과 계약직의 연대집회를 가지면서 이후 투쟁 강도를 높여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사쪽의 분사강행 움직임도 녹록치만은 않았다.
사측은 114 조합원들 농성 장기화로 소통율이 떨어진 114 안내업무에 현업 교환직렬 조합원들을 배치하거나, 일부 지방의 경우 교환직렬 뿐 아니라 통신기술, 선로, 기능직 등 전 직렬을 망라해 일방적으로 교육발령을 내리려고 시도했다. 또한 (주)KIS로의 전적에 동의한 정규직들의 수가 예상보다 적자, 각 전화국별로 할당량을 시달하고 114 안내원들은 물론 교환직렬, 기능직, 사무직들에게까지 고액의 명예퇴직금 지급 등을 운운하며 전적을 유도해 왔다.
이처럼 본사에서의 114 조합원들의 농성과는 별개로 회사쪽의 조합원 회유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13일 밤부터는 4월말까지 감축키로 약속한 1,600명 가운데 1,100명이 (주)KIS로 가겠다는 전적동의서를 썼고, 하루 이틀 사이로 1,600명이 채워져 사실상 자회사 출범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알려지면서 ‘분사철회’ 주장이 사실상 ‘허공에 메아리’같이 힘을 조금씩 잃게 되었다.
3천여명에 가까운 114 계약직, 또다시 철새
이러한 과정에서 114 농성조합원들의 동요는 더해져 이날 해산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해산에 앞서 송원중 노사협력팀장과 김형채 노조 사무국장 명의로 합의한 내용에 따르면, 노사는 △명예퇴직 또는 희망퇴직을 신청, 분사법인으로 전적 동의 △잔류희망 직원은 재교육 등을 통해 재배치키로 했다. 또한 농성가담자에 대해서는 징계를 최소화하고 이번 농성과 관련된 고소고발은 취하하기로 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전적동의서를 쓰지 않고 마지막까지 농성대오에 결합했던 114 안내원 400여명은 한국통신에 남기를 원한다면 가설접수 및 상품소개 등을 하는 100번 센터에 20여명 단위로 재배치된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한국통신 내에서의 고용을 유지하게 된 정규직과 달리 3천여명에 달하는 114 계약직원들은 또다시 철새신세가 됐다.
계약파기 압력과 (주)KIS로의 전환이 더 좋은 조건이라는 사측의 회유에 대부분 전적동의서를 쓴 이들 114 계약직들은 ‘분사회사로 넘어가도 역시 고용불안 및 임금저하에 시달릴 것’이라며 뒤늦게 한통계약직노조(위원장 직무대행 이춘하)에 가입하고 농성대오 및 집회에 참가했지만 농성해산 이후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6일 분사저지 농성을 끝났지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마무리 된 이번 분사화 저지 싸움은, 그 결과물은 물론이고 과정상에서도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우선은 일방적이고, 고용조정에만 집착하는 공기업 구조조정의 문제점이다.
한국통신은 지난해 10조의 매출액과 1조의 순이익을 올렸음에도 적자사업이라는 이유로 114를 분사시켜 안내요금을 현행 80원에서 220원으로 인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번호안내는 전화사업자가 운영해야 할 필수영역임에도 흑자공기업이 그 부담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올바른 구조조정이라 보기 어렵다.
또한 한국통신은 노사간의 충분한 협의가 없는 상태에서 기획예산처와 정보통신부의 인력감축 조치에 따라 1,600명의 인원을 감축하기로 결정하고 5월3일 노사간 구조조정특별위원회가 정회 중인 상태에서 사내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114 안내 및 체납업무 분사 계획을 발표했고, 4일 뒤 기습적으로 이사회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이같은 한국통신의 장단에 맞춰 114 조합원들의 투쟁과 요구를 외면한 현 이동걸 집행부에 대한 책임도 물어져야 한다. 이 위원장은 114 조합원들의 농성이 시작된 지 20여일 만에 직무대행체제에게 전권을 넘기고 사라졌다가 다시 일방적 복귀선언을 하면서 5월31일 폭력사태를 유발시켰는가 하면, 결국 이 달 9일 114 분사화를 인정하는 직권조인을 하면서 114 조합원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했다.
또한 최근 노조 게시판에 “위원장이 되기 전에는 전세 아파트 한 채밖에 없다가 위원장이 된 지 1년여만에 48명, 32평 아파트를 마련했다”는 등의 글이 올라오면서 회사쪽과의 담합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에 대한 속시원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결국 이같은 일그러진 구조조정과 노사관계 속에서 국민들은 조만간 한 통화에 220원이나 주고 전화번호 안내를 받아야 하고 자칫 2천만 가입자 정보가 사기업의 이윤추구 도구로 이용되면서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또다른 사생활 침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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