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 – 김흥현 전국노점상연합회 의장
“고인 물은 흘러야 한다”
월드컵을 앞두고 또다시 자행되는 무차별적인 노점상 강제철거에 맞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 고실업 시대 100만에 육박하는 노점상 상인들의 생존권을 어깨에 걸머지고 투쟁을 이끌고 있는 전노련 김흥현 의장을 14차 6·13투쟁대회를 마친 바로 다음날 전노련 사무실에서 만났다. <엮은이글>
장흥 출생인데 부산에서 노조 결성을 시도하다 해고되신 이력이 있으십니다
15살 때 출세도 하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데 이곳에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돈 400원을 훔쳐들고 무작정 부산행 열차를 탔다. 잠깐 중국집 배달원도 해보고, 곧 고무공장에 취직을 하기는 했는데, 잠잘 곳이 없어서 공사장 드럼통에 들어가 잠을 청하곤 했다. 그때는 ‘숙식’이 해결되는 잔업, 철야 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고무공장 노동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위장 취업을 했던 한 형을 만났다. 그 형과 지내면서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다. 직접 노조결성을 주도하는 등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게된 계기는 85년 12월 경 이었을 것이다. 부산 금사공단 ‘세창산업’이라는 신발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신문에도 났었는데 이 불로 6명의 여공이 사망했다. 그 중에는 모녀가 모두 사망한 경우도 있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손톱으로 벽을 긁는 바람에 손톱이 모두 뒤집혀져 있었다. 그런데 이 참혹한 죽음을 자본가들은 고작 180-200만원의 보상금으로 끝내려고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당시 함께 모임을 하고 있던 동지들과 노조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활동을 하다 사전에 발각돼 해고됐다.
부산 활동을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운동이 아닌 노점상 운동을 시작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해고 뒤 몇 군데 다른 공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부산 어디에서도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어디를 가건 형사가 따라붙는데 어떤 회사가 나를 받아주겠는가? 결국 부산을 떠나 양산으로 옮겨 5일장에서 민물새우를 팔면서 근근히 생활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87년 6월 대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아내는 임신 7개월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함께 그 길로 부산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시위대에 결합해 투쟁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다시 취직을 하려고 했으나 상황은 여전했다. 결국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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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무를 만지는 일밖에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결국 처가의 도움으로 잠실 쪽에서 노점을 벌였던 것이 노점상 인생의 시작이었다.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역 노점상 협의회의 존재를 알게됐고, 가입하면서부터 여하튼 열심히 싸웠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송파지역노점상연합회 사무국장으로, 지역장으로, 전노련 부회장에서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96년 총선에 무소속 민중후보로 출마하신 경험도 있고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대해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노련 의장 선거 때 제출한 공약에도 ‘올바른 정치세력화 모색’이 있던데…
‘정치세력화란 이것이다’라는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제는 전노련이 조직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민중연대전선을 강화하는 가운데 올바른 정치세력화에 대한 고민이 진척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정 당에 들어갈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다음문제이다.
전노련 의장선거에서 많은 표차로 당선되셨습니다. 의장님에 대한 전노련 회원들의 기대의 반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지난 몇 년간 조직 내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물이 고여있는 채 흐르지 못해 썩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역할은 이 고여있는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가부장적 조직기풍을 척결하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고 그 결정을 힘있게 집행하는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이후 전노련의 중심이 될 후진들이 맘놓고 성장할 수 있도록 그 길을 닦아 놓고 싶다. 의장이 되고 나서 고독하고 힘들 때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직 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고… 올 4월 5월을 정점으로하는 강력한 투쟁을 조직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조직 내적인 문제들 때문에 놓치고 지나가 버린 것들이 많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월드컵을 앞두고 노점상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노점상 탄압은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데도 진상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노점상에 대한 탄압 양상은 뭐라고 해야하나… 한 마디로 인권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울 정도이다. 언제나 생명에 대한 위협을 목전에 두고 싸워야하는 상황이니까. 월드컵을 앞두고 진행되는 현재의 탄압 국면은 꼭 월드컵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이 궁지에 몰리거나 혹은 정권 교체기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노점상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었다. 서슬퍼런 공권력의 존재를 선명하게 확인시킬 수 있는 기재로 노점 탄압만큼 좋은 것이 없지 않은가? 여론을 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 방송, 언론에서 노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일이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노점문제를 내보내면 우리는 그것이 ‘탄압의 서곡’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는 반드시 탄압이 있었으니까. 물론 노점상에 대한 치떨리는 만행 현장을 폭로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노점 때문에 보행이 불편하다,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야기 외에는 나오지 않으니까.
지난 13일 제14차 6·13 투쟁정신 계승 대회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구호가 주로 외쳐졌습니다. ‘정권퇴진’ 전면화를 놓고 각 운동세력의 입장이 상이한데 전노련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을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청년층이 많이 늘어 서울에 연고를 두고 있는 동지들이 많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지역 노점상의 70-80%가 호남에 연고를 두고 있는 분들이었다. 때문에 김대중에 대해 뭐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김대중 정권의 반민중적인 작태를 보면서, 몸으로 느끼면서 정권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다. ‘김대중 퇴진’ 구호는 기층 동지들이 이 정권에 가지고 있는 분노의 반영이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청년진보당에 한 말씀 부탁합니다.
<청년좌파>를 매번 꼼꼼히 읽어본다. 패기 있고 원칙적인 면에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청년’이라는 수식으로 스스로의 폭을 좁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울산의 경우 청년진보당과 울산노점상연합회가 유기적으로 서로 도와가며 모범적인 투쟁을 벌여가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실천적인 연대가 많이 확대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흥현 의장 약력>
59년: 전남 장흥 출생
86년: 노동운동 / 부산사상공단 ‘세창산업
노조민주화 추진위’ 활동 중 해고
90년-93년 : 송파지역노점상 연합회 지역장
역임 강동송파민주시민협의회 공동의장
94년: 전노련 부회장
95년: 전노련 수석부의장
96년: 4.11총선 민중후보 출마
97년: 전노련 부의장
98년: 전노련 집행위원장
99년: 전노련 집행위원장
2001년 : 전노련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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