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로이드를 먹은 시민 케인

-[인 디즈 타임즈] 6/25 마틴 A. 리-

이탈리아에서는 정권교체가 매우 흔한 일이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월 13일 억만장자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당선은 특별히 주목할만하다. 2차 대전 이후 59번째 정권교체를 기록한 그의 당선은 아무리 훌륭한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극단주의와 결연한 화려한 선동정치가인 베를루스코니는 공개적으로 인종주의와 신파시트트 정당을 자처하는 극우 성향의 대중선동주의 동맹의 대표로 출마했다. 이 이탈리아 언론계 거물 정치인은 스스로를 나폴레옹에 비교하고 에이즈 희생자들을 조롱하기를 즐겨하는 것은 물론, 루퍼트 머독과도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위증, 회계 장부 위조, 탈세, 뇌물공여 등의 이유로 네 차례나 기소된 바 있는 베를루스코니는 아직 계류중인 몇 건의 형사고발 사건과 함께 불미스러운 행적을 가지고 있다. 마피아와의 연계 의혹, 그리고 그가 축적한 재산에 대한 많은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위 정치관료로 당선되었다.

이권 분쟁시마다 중심적 인물로 등장하는 베를루스코니는 사실상 이탈리아의 모든 대기업의 지분에 손을 대고 있다. 그는 세계 최대 재벌 중 한 명으로 이탈리아 최대 출판사, 유수의 광고기획사, 최대 자산의 백화점 체인, 주요 투자회사,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 최강의 축구팀,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이탈리아 3대 민영방송을 포함하여 140억 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재계 거물이다.

이제 총리로서 이탈리아 3대 공영 방송에 대한 통제권마저 쥐게 된 베를루스코니는 사실상 이탈리아 시청자의 90%를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된다. 세계 여섯 번째 선진국의 모든 방송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수중에 놓여 있는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 정치학 명예교수이자 오랜 기간 이탈리아 정치를 관찰해온 지오반니 사르토리는 “서구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베를루스코니는 마치 ‘스테로이드를 먹은 시민 케인’처럼 어떠한 민주국가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막강한 정보 권력을 누리고 있다. 그가 방송 전파를 지배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 인사로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아 에미텐자'(‘전파왕’)로 널리 알려진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경쟁자를 악마로 묘사하고 정치적 야심을 한층 촉진시키기 위해 그의 여론형성 TV와 인쇄매체를 준비시켰다. 베를루스코니 소유의 방송국들은 노골적으로 편향된 보도를 내보내면서 사실상 그의 출마를 과대 선전하는 선거용 홍보물이나 보도자료와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베를루스코니는 선거운동 기간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그의 경쟁자들은 기껏해야 형식적으로 다뤄졌을 뿐이다.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은 정치 광고는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세 개의 전국방송이 선거 광고를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의 경쟁자들은 어쩔 수 없이 베를루스코니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홍보를 하거나, 광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정당이 선거운동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에게 돈을 내야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이탈리아 중도좌파에 참여하고 있는 주요 정당인 좌파민주당 국회위원 기세페 길리에티는 말했다.

베를루스코니의 극우연정은 다른 후보의 20배에 달하는 선거비용을 들여, 전국 언론에 대한 독점적 접근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의회 양원에서 절대적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루스코니 소속 정당인 포르자 이탈리아당은 이탈리아 최대 득표 정당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주요한 통치 파트너인 지안프란코 피니는 올해로 49세가 되는 상냥한 인상의 정치인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운동(MSI)의 지도자로 경험을 쌓았다. 베를루스코니는 MSI 당수가 조직을 새롭게 단장하여, 1995년 민족동맹으로 당명을 바꾸기 전에 이미 피니와 공공연하게 제휴했었다. 민족동맹은 11%의 득표율을 올림으로서 차기 정권에서 피니가 부총리에 오를 것임이 확실시된다.

피니는 자신이 현재는 주류 보수주의자이지만 자신의 당은 여전히 과거 파시스트 유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니는 국민전선의 가장 극렬 분파들과 거리를 두려하고 있지만 이 당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다.

피니의 절친한 동료이자 국민전선 라지오 지구당 위원장인 프란세스코 스토라세는 학교 교과서를 개정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의 말을 따르자면 이탈리아 역사가 레닌주의적 관점으로 기울어있다는 것이다.

포르자 이탈리아당은 또한 뻔뻔스러운 파시스트 분파인 트리콜로르 불꽃당과 함께 시실리에서 선거 연합을 했다. 스킨헤드족과 네오나치주의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트리콜로레 불꽃당은 베테랑 지하 테러주의자인 피노 라우티가 이끌고 있다. 라우티가 만든 네오파시스트 집단인 신질서의 성원 4명은 지난 1969년 16명이 사망하고 84명이 부상당한 밀라노 폭탄 테러 사건으로 최근에 재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움베르토 보시가 이끌고 있는 외국인 혐오주의 세력인 북부동맹은 단 4%의 득표율을 차지했지만 이탈리아 하원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 노골적이며 지속적으로 이민이라는 미끼를 사용하고 있는 보시는 베를루스코니가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축하인사를 한 오스트레일리아 극우파 지도자 외르크 하이더와 매우 흡사하다. 보시는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불법 이민자 수송선에 대해 해군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반이민 선동은 베를루스코니 선거 운동의 주요 테마이기도 했는데, 그가 소유하고 있는 방송사는 이탈리아가 외국인 범죄로 들끓고 있다고 묘사하면서 대중적인 불안감을 조성했다.

베를루스코니 관련해 진행중인 여섯 개의 형사 사건에 대해서 그의 방송사들이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이 법적 공방이 그가 소유한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전부 다루어졌다면 아마도 베를루스코니에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퍼부을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혐의가 공산주의자들이 꾸며낸 중상모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가막힌 것은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은 어린아이도 먹는다”고 하거나, 이탈리아를 구원하라는 명을 받은 자신을 좌익 판사들이 필사적인 음모로 해치려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를루스코니는 기존의 기업계와 싸우는 아웃사이더라고 자처하면서 성공적인 기업가로서의 자신의 에너지와 기술을 이용해 ‘이탈리아 기업’들로 이 나라를 운영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신화가 베를루스코니 신비화에 중심적인 요소이지만,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같은 것은 없다. 지중해 순항선의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베를루스코니가 기업 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 권력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부패한 구(舊)지배집단의 파수꾼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무소속 신출내기 정치인으로 보여지기를 염원하겠지만 사실, 그의 성공은 경제적, 정치적 막후 권력자들의 음침한 네트워크 덕택이다.

1970년대 말 베를루스코니는 흔히 이탈리의 음모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파시스트 경향의 엘리트 비밀 공제조합 지부인 프로파겐더2(Propaganda Due, 이하 P-2)에 비밀리에 참여했다. 이탈리아 판사들이 ‘국가 내 (불법) 국가’로 표현하는 P-2는 이탈리아 정보기관, 군대, 주요 자본가 및 실업계 거물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P-2 소속의 인물들은 네오파시스트 폭탄테러 사건, 쿠테타 음모, 무기와 마약 밀반입과 관련한 굵직한 사건 등 1960년 중반 이후의 거의 모든 주요 정치 스캔들에 연루되어 왔으며, 바티칸 은행이 소유한 간판 기업을 통해 돈세탁을 하고 있다.

1981년 터스카니에서 경찰이 P-2를 급습하면서 입수한 P-2 가입자 명단에는 베를루스코니도 있었다. 1963년의 P-2 가입자 명단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인사들이었다. 이 명단에는 또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몇몇 수상쩍은 인물들도 있었는데, 전직 대통령인 후안 페론 장군, 암살대로 악명 높은 아르헨티나 반공주의 연맹(AACA) 의장 호세 로페스 레가, 1070년대와 1980대 초 소위 ‘진흙탕 전쟁’ 당시, 3만 명이 실종된 군사 정권 하에 참여한 에밀리오 마세라 제독 등이다.

자신의 P-2 전력에 대한 허위 발언으로 유죄가 확정된 베를루스코니는 1980년 중반 이탈리아 총리가 된 베티노 크락시 사회당 당수의 스캔들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크락시는 베를루스코니가 두 번째 결혼할 때 신랑 들러리였으며 두 사람 모두 유리한 정치적 보호 체제와 전후 이탈리아에 만연해 있던 불법적 뇌물 공여에 정통했다. 크락시는 베를루스코니가 언론 장악을 확장해 가던 초반 무렵에 이를 억제하려는 시도들을 훼방놓는 작업을 도왔으며, 베를루스코니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크락시를 적극적으로 띄워주었다.

이 기간에 크락시와 이탈리아의 다른 우익 정치 지도자들은 상당한 규모의 이탈리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가운데 부패 투성이인 이탈리아 정치 질서를 떠받쳐온 워싱턴이 자신들을 주저없이 지원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은 끝나자 공산주의의 위협은 사라졌으며 이탈리아의 전체 정치 체제는 하룻밤 사이에 힘없이 무너졌다.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 판사들이 주류 정당들 내에 만연한 부패와 마피아의 영향력을 폭로하며 소위 ‘깨끗한 권력(clean hands)’ 운동을 하면서 수백 명의 공직 관료들이 구속됐다. 크락시는 교도소 수감을 피하기 위해 튀니지로 도피했다. 결국 밀라노 검찰은 베를루스코니 소유의 피니베스트사에서 나온 6백만 달러를 추적하여 지난 해 망명 중에 사망한 크락시의 외국 은행 계좌로 흘러들어 갔다는 것을 밝혀냈다.

베를루스코니는 일련의 법적 소송을 피하면서 이탈리아 양대 우익 세력인 기독민주당과 사회당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형성된 공백을 채우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의 사업적 성공에 절대적 역할을 해왔던 당의 보호가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베를루스코니는 직접적으로 정치 경쟁의 장으로 들어설 필요가 있었다. 이 때, 그는 6년 6개월 간 흐리멍텅한 정치를 한 중도좌파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전인 1994년에 잠시 동안 정권을 잡았던 포르자 이탈리아당을 발견했다.

중도좌파 연정의 정치적 파산은 부분적으로 베를루스코니가 컴백한 데 원인이 있다. 중도좌파 정부는 베를루스코니의 언론 자산을 해체시키려는 강력한 반독점 조치들을 취하기보다는 유럽연합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대량 삭감하고 엄격한 경제적 처방을 내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는 한편, 고질적인 실업율은 계속해서 만성화되어 갔다. 아래로부터 불만들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소위 ‘올리브나무’ 동맹이라 불린 중도좌파는 필요성이 제기되자 ‘민족 단결’ 정부에 베를루스코니의 당을 포함시키는 것에 관한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려 했다.

노벨상 문학상 수상자인 다리오 포는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베를루스코니의 기업들과 가지각색의 전력이 그를 정치적으로 취약하게 할 것이라고 오판한 올리브나무 동맹의 근시안적 전략에 대해 탄식했다. 포는 “좌파는 철저히 비굴한 태도로 베를루스코니를 게임에 참여시켰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이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상황이 이렇게 되버린 유일한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를 과소평가했던 사람들은 이제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 마틴 A. 리는 네오파시즘에 관한 책인 [환각의 꿈과 깨어난 짐승]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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