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섹스는 놀이’ 화두에 대한 한 페미니스트의 이야기

‘재미있는 놀이법’과

‘재미없는 놀이법’을 구분해 보자

여기 사진이 몇 장 있다. 일범 재킷 사진이다. 그는 굵은 시가를 물고 검은 양복을 입고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그녀(아마도 그의 여자라는 뜻의 준말)는 등이 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카드 네 장을 뒤로 숨긴 채 인형 같은 미소를 띄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피부색은 하얀색. 카드는 공교롭게도 세종대왕 만원짜리와 같은 초록색이다. 다음다음 장에서는 좀더 노골적인 이미지컷.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한 손은 그의 허벅지를 잡고 있다. 그는 세 장의 달러화를 손에 들고 있다. 다음다음다음 장. 그는 중국의상을 입고 중국풍의 고급의자에 앉아서 중국옷을 입은 백인여자의 안마를 받고 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이 장면들은 정말로 공교롭게도 달러화를 손에 쥐고 국제섹스관광을 다니는 동양의 한 작은 나라의 섹스에 미친 변태원숭이들과 닮았다. 혹은 부산 앞바다에서 “백마” 한 번 타보고 싶다며 안달하는 마초 선원들과도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박진영씨는 이 사진들의 의미를 한마디로 일축한다. “놀이”라고. 아. 그런 거였어? 긁적.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나 보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섹스는 놀이다라는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매춘은 놀이다” 혹은 “남성에게 있어 성욕은 바로 지배욕이다”라는 명제로 보인다. 오해인가? 하긴 나는 너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데. 오해받고 싶지 않았으면 성역할을 한번쯤 바꿔보았어도 좋았으련만. 저래 가지고야 오해하는 사람 탓을 할 수가 있나. 오해받게 만든 사람 탓이 크지. 이번 앨범에 대한 박진영씨에 대한 첫 느낌은 대충 이러했다.

하지만, 박진영씨가 “즐거운 섹스”를 말하는 것에 대한 이견은 없다. 가사집을 들여다보면서 노래를 들으면 매우 에로틱한 기분이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논쟁의 핵심은 “섹스는 놀이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박진영씨가 토크쇼에 나와 섹스에 대해 말하면서 인터넷에서는 연일 박진영씨의 발언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여념이 없었다. 박진영씨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질투형. “그래, 너 섹스 잘하냐? 정력좋아 좋겠다”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면서 그를 “동물”취급한다. 그러나 이런 유형들의 특징은 힘이 센 수컷을 부러워하는 태도를 마냥 감추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빠지지 않는 말은 박진영씨가 공익근무요원이었다는 점이다. 그보다 그보다 힘센 수컷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 질투형의 수컷들은 현역근무의 신체적,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두 번째, 사대부집안형. 이들은 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공공연하게 하고 다니다니 남사스럽다며 성을 다시 음지의 음담패설의 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세 번째, 일부일처제 옹호론이다. 재미있는 섹스와 자유로운 표현도 좋지만 엄연히 조강지처인 부인이 있는데 “난 여자가 있는데”라며 다른 여자의 유혹에 대해 공개적으로 떠드는 것은 부인에게 상처를 준다는 의견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두 번째 사대부 집안형과 세 번째 일부일처제 옹호론이 결합되어, “숨어서 피우는 바람”은 용인되지만 “떠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압축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박진영씨가 공개적으로 즐거운 섹스와 욕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있다는 입장이다. 섹스는 그저 욕망의 해소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어떤 남자들에게 박진영씨의 말은 위협적인 효과를 거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인과 하는 섹스보다는 청소년 성매매를 통해서야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어떤 남자들에게 박진영씨의 말은 부인과 좀 더 즐기도록 노력은 해봤냐는 엄중한 충고로 읽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논쟁 이면에는

청소년 성매매의 “가해자”가 무죄판결을 받는 등 여전히 남자의 성적 욕망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남자의 성적 욕망은 “억압되어 있어 구원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박진영씨처럼, 남자의 성적 욕망이 반드시 따먹고 먹히는 삽입 중심의 폭력적 섹스가 아닌 터치와 성적인 몸언어를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다고 다르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섹슈얼리티를 보는 여성주의적 관점은 성에 관한 언술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이러한 남성중심적 성담론은 질병, 범죄, 금기 그에 따른 억압과 처벌이라는 성을 둘러싼 규범 내에서 남성을 성욕만을 정상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고 성욕 있는 여성은 유혹자 혹은 창녀라고 보면서 여성의 성을 범죄화해 왔다. 여기서 성욕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여성은 기혼이든 미혼이든 간에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여성이 이러한 ‘원죄’를 극복하는 길은 성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뿐이었는데, 이것은 정숙한 여성/창녀라는 여성의 이분화와 연관된다.

게임의 룰이 편파적이다

섹스를 즐겁게! 라는 박진영씨의 구호가 박진영씨 부인에 대한 동정으로 바로 연결된 것은 흥미로운 일인데, 왜냐하면 결혼한 여성은 정숙한 여성이어야 하고, 정숙한 여성은 성욕을 드러내는 것이 용인되지 않으므로 “즐거운 섹스”의 상대자는 혼인관계 이외의 여성이라고 자동적으로 연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때 박진영씨의 “기혼남성”이라는 위치는 “부인의 보호자”라는 위치와 동일시되면서 “성에 대해 말하면 안되는 여성의 보호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구성한다. 그동안 남성성욕은 성에 대해 독점적인 담론을 구성해온 동시에,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이 독점적 담론을 사적화하는 견고한 방어기제를 구축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독점적이고 획일적인 담론에 박진영씨가 균열을 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섹스는 놀이다”에서 더 나아가, “재미있는 놀이법”과 “재미없는 놀이법”을 구분해내고(이것은 성관계와 성폭력을 구분하는 여성들의 언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혼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에서 즐거운 섹스와 자유로운 표현, 책임있는 관계라는 균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참. 그리고 혹시라도 여자들에게 “섹스는 놀이인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래”라고 해봤댔자, 순결이데올로기를 역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수없이 겪은 여자들로서는 쉽게 고개가 끄덕일 만한 믿을 만한 경험적 근거가 너무 없다. 섹스는 워낙 남성의 놀이였다. 섹스가 이제 모두의 놀이가 되려면, 게임의 룰이 지나치게 편파적이었다는 것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스탭이 엉키지 않도록 하나하나 처음부터. 자. 렛츠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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