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계급성과 독자의 몰계급성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 때 문학청년이 아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한 때 꿈꾸었던 것을 영원히 꿈꾸지는 않듯이 모든 문학청년들이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작가가 된다.
자기가 꿈꾸었던 일을 자신의 업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작가는 행복한 존재들이다. 작가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글을 써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이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버려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하루하루 인간의 꿈을 새롭게 구축해가는 작가의 운명에는 다른 그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만한 마약성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동시대의 반영자인 동시에 자기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활자로 축조하여 문학이라는 바다를 이상과 예감으로 채워가는 독립적 존재들이다.
아직도 이 사회에서 작가에게 주어지는 존중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작가들이 지닌 정신적 독립성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존재의 전제와 마찬가지인 작가의 자유로운 ‘정신적 독립성’이 위기에 빠져 있음을 최근의 현실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작가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행한다.
약자에게 인격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강자들의 무례한 행위가 되풀이되어도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강자의 불의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동조한다.
총칼을 앞세운 권력에 의해서라면 차라리 괜찮겠다. 몇 권의 책을 더 판매하기 위해서 대중주의에 의탁하는 얄팍한 상술이라도 안스럽게 보아 넘겨줄 수 있겠다.
문제는 작가가 스스로 권력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데 있다.
그렇다. 엄격한 의미에서 작가의 정신적 독립성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라는 직업 역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계급구조 속에 있을 뿐이다.
자기 글을 판매해서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작가가 계급적 존재가 아닐 수 있겠는가.
자신의 판매활동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판촉활동을 해나가는 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상품을 더 효과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제조원의 상표, ‘레떼르’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적절하게 선전하는 행위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언론은 자신들의 노선을 뒷받침해줄 작가들을 지면에 활용하고 작가들은 그 지면을 이용해서 ‘레떼르’의 인지도를 높여 왔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문제는 이제 그 단계를 넘어서 이미 권력이 된 언론과 더불어서 작가 자신이 권력이 되어버리려고 하는데 있다. 결코 만족스러울 수 없는 현실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작업 대신에.
아니다. 작가들의 계급적 태도는 너무도 오래 전부터 명백했다.
대통령조차 눈치를 보며 어쩌지 못한 임기 없는 권력, 언론기업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자유수호’ 투쟁에 동조하는 작가들이 가족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시위현장에서 처절하게 짓밟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언론자유’를 위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독자들만이 너무도 오래 작가와 문학에 대해 몰계급적이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책장을 한 번만 둘러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런 태도를 갖게 만든 일등 공신이 언론이었으며, 단 하나의 언론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너무나 명백하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작가의 계급적 태도가 아니라 독자의 몰계급적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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