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위기에 놓인 출판만화시장 길 찾기 (김 이 랑 만화평론가)
출판만화시장은 지금 논란 중
한국 출판만화시장은 심각한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만화계 사상 최악의 불황’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올해는 시장 상황이 지난해보다 더 악화됐음을 피부로 절감할 수 있다. 이처럼 출판만화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주된 독자층인 어린이 및 청소년들의 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는데다 그나마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인터넷 등의 다른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독자들을 뺏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정 금액만 내면(예전에는 공짜도 많았다) 만화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온라인 만화사이트가 경쟁자로 성장했고, 초등학생들도 갖고 있을 정도로 일상화된 휴대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만화의 경쟁 상대다. 휴대폰의 일상화로 인해 청소년들이 만화를 보는 데 쓸 수 있는 용돈의 몫이 크게 줄었다는 이야기다.
출판만화시장이 이처럼 ‘외환’(外患)에만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외환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내우’(內優)다. IMF이후 출판만화시장이 빌려보는 만화대여점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권당 10만부 이상 발행되는 ‘대박만화’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권당 10만부 이상 발행되는 만화가 단 한 종도 없는 현실이다. ‘대박만화’의 부재보다 더 두려운 것은 눈에 띄는 신작이나 신인 만화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휴간 잇따르는 만화잡지들
지난해에는 <빅점프> <히트> <쎈> <코믹팬티> <코믹엔진> <코믹펀치> 등 다수의 만화잡지가 무기한 휴간 또는 폐간에 들어가 큰 충격을 안겼다. 특히 성인만화잡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던 <빅점프>의 무기한 휴간으로 이 땅에는 단 한 종의 성인만화잡지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올해 들어서도 만화잡지의 휴간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들어서기 무섭게 <나인>과 <화이트>가 연이어 문을 닫은 것. 비록 휴간 잡지의 수는 두 종에 불과하지만 만화계에 미치는 충격은 오히려 작년보다 더 크다. 그 까닭은 두 종 모두 안정된 고정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순정만화잡지였기 때문이다.
만화잡지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작품을 내놓고 있지 못한데다 속도를 요구하는 독자의 취향을 제대로 충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화잡지를 사서 보는 독자들을 계속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한 잡지에 독자가 보고 싶어하는 만화가 최소 서너 편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지 못한게 냉정한 현실이다. 또 다음 회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요구와는 달리 격주간지는 2주, 월간지는 한달을 기다려야만 한다. 참을성이 없어진 독자들은 이 기간을 기다리기보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한꺼번에 보기를 선호한다. 이처럼 독자들의 참을성이 없어진 데는 이미 완간된 일본만화 단행본들을 대량으로 수입해 소개한 만화출판사들의 역할도 컸고, 대량의 만화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인터넷 만화사이트들의 등장도 한몫을 했다.
종수 늘리기로 연명하는 단행본 시장
만화단행본 시장도 잡지시장에 비해 별로 나은 게 없다. IMF 이후 시장 침체가 계속되고 있는데다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의 수가 줄어들면서 판매부진이 가속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만화를 빌려 주는 만화대여점이 있다. 만화단행본 시장의 불황은 권당 발행부수에서 금방 확인된다. 권당 10만부 이상 발행하는 ‘대박작품’은 눈에 띄지 않고 초판 발행부수가 권당 1만부만 넘어서도 히트작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손익분기점에 해당하는 초판 5,000부도 발행하지 못하는 만화도 꽤 많다. 심지어 초판 발행부수가 3,000부도 안되는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출판사들이 이런 만화들을 찍어내고 있는 것은 일정 시장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일정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면 만화총판들이 버티지 못해 출판만화시장의 총체적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계속 종수를 늘려가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참고로 최근에는 월 평균 500종 정도의 만화단행본이 출간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만화가 너무 많이 나오다보니 만화가 안 팔리게 되고, 만화가 안 팔리니 더 많은 만화를 찍어내야만 하는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만화단행본 시장의 현주소다. 문제는 이러한 종수 확대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종수 확대의 ‘보고’ 역할을 해 온 일본만화가 밑바닥을 드러낸 것. 이미 웬만한 만화는 거의 수입해 더 이상 수입할만한 작품이 없다. 남아 있는 것은 포르노만화나 야오이만화, 로리콘만화 등 국민정서상 허용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최근 일기 시작한 옛날만화의 복간 붐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권당 2∼3만부씩 팔리는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에서 알 수 있듯 ‘썩어도 준치’라고 옛 히트만화는 기본부수를 보장해준다. 손익분기점인 5천부에도 못미치는 만화가 수두룩한 현실에서 옛 히트작의 복간은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만화출판사들이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옛 만화의 복간에만 신경쓰고, 신작 및 신인의 발굴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만화의 앞날은 더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다.
출판만화시장의 계륵 만화대여점
만화를 빌려주는 만화대여점은 현재 출판만화시장 유통의 핵을 이르고 있는 중심축이다. 90년대 중반들어 서점에서 만화가 팔리기 시작하면서 ‘사서 보는’ 만화시장이 형성되다가 다시 빌려 보는 대여점 중심으로 만화시장이 재편된 것은 지난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로 ‘19세 미만 구독금지’ 만화 즉, 성인용 만화를 판매하다 적발되면 모든 책임을 져야 됨에 따라 서점들이 만화를 기피하게 된데다, 11월 들어 갑자기 들이친 IMF한파는 만화를 서점에서 몰아낸 결정타였다.
그러나 만화대여점은 만화를 파는 곳이 아니라 빌려주는 곳인 만큼 만화시장의 양적 확대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즉 만화가 아무리 히트를 쳐도 부수 확대로 연결되지 않는데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이익이 만화가나 만화출판사가 아닌 대여점에게만 돌아간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만화대여점은 평균 매장규모가 7∼10평에 불과한 영세업체가 대부분인만큼 월 평균 500여종씩 쏟아지는 신간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보니 만화대여점은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는 인기작가의 작품이나 기존 히트작의 후속권만 선호할 뿐 신작이나 신인작가의 작품은 기피하기 마련이다. 설상가상으로 한때 25,000여개에 달하던 만화대여점의 수가 최근 15,000여개(추산)로 줄어들면서 만화계의 어려움이 한층 가중되고 있다.
최근 인터넷 만화사이트를 중심으로 이 만화대여점 존폐논쟁이 일고 있다. 폐지론자들은 “만화책이 서점·대여점용 구분없이 마구잡이로 대여되는 것은 만화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반면, 존속론자들은 “볼만한 국산만화도 그리 많지 않은데 300∼400원이면 볼 수 있는 기회를 막고 3,000∼4,000원씩 주고 사서 보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반박하고 있다.
만화대여점이 출판만화시장의 걸림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장 만화대여점을 없앤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만화대여점이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독자들이 만화를 사서 보지는 않을 것이고, 또 출판만화시장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는 만화대여점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면 출판만화시장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있다. 현재로서는 서점용/대여점용 만화의 구분 등 대여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서점 유통구조로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동시에, 음반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대여점이 아닌 창작자가 대여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사 위기에 놓인 출판만화를 되살리는 길은 만화가들이 독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재미있는 만화를 그려내는 게 첩경이다. 만화대여점 존속론자들의 “독자들이 구입할만한 국산만화를 많이 내놓는 게 먼저”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들이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한 작품에 모든 정열을 기울이라고 요구는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화가들이 재미있고 좋은 만화를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 만화가 회생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당장은 뼈를 깎는 아픔이 있더라도 고통을 감내하며 미래를 바라보고 투자를 해야만 한다.
한국만화의 살 길
우리 만화의 문제점 중 하나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원물이나 무협물, 판타지물, 학원 로맨스물 등 크게 몇 장르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다. 최근 들어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이 다양성의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의 하나는 ‘전문만화’의 육성이다. 전문적 지식에 만화적 재미를 접목한 전문만화는 우리만화가 나아가야만 할 길의 하나다. 그리고 이 전문만화가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탄탄한 구성력이 요구된다. 별도의 스토리 작가를 쓰는 방법도 있지만 만화가들 스스로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만화를 살릴 책임이 만화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화출판사 또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장 눈앞의 불끄기에 급급한 만화출판사들이 미래에 투자하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만화출판사들이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과제는 서점 재진출이다. 서점 재진출이야말로 한국만화가 살 수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좋은 만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출판사 자체의 노력도 절실하다. 만화시장에 마케팅 개념을 도입하는 것도 시급하다. 만화수출 또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의 하나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