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유연화 착취'(Flexploitation)와 노동자 계급의 저항
– 영국의 경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세계 연대
(fHUMAN : for Humanity and Against Neoliberalism)
런던 위원회(London Committee)
☞ 1997년 7월 25일 ∼ 8월 2일까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2차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대륙
간 회합’에 제출된 영국 대표단의 보고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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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80년대 이래 영국에서는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총자본은 노동자계급을 투쟁에서 패배시키고, 조직적으로 해체시키고, 나아가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분해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 전략들을
대대적으로 펼쳐 왔던 것이다. 그 결과 노동과정은 대폭 유연화되었고, 노동자
는 대거 임시직 노동자화 되었으며, 이로 인해 착취의 정도가 필연적으로 매우
강화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유연화 착취”라고 부르려 한다.
이러한 “유연화 착취”는 우리들 모두에게 ‘불안정’, ‘굴욕’, 그리고 ‘노동규
율의 엄격화’를 강요하고 있다. 예컨대 실업에 처해진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실
업 급여금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임금노동과 유사한 활동을 하도록 요구받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공세는 해고 노동자들과 ‘행동주의
적'(캠페인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대중행동을 위주로 하는–역주)
인 환경운동과 ‘노동강요 형(型) 복지제도'(workfare : 노동자에 대한 재교육
등에 의해서 실업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노예적인 노동이라도 이에 순응하면서
열심히 일하도록 훈련함으로써, 실업급여를 비롯한 사회보장 급여를 대폭 축소
하려는 정책 또는 제도를 말한다–역주)에 대한 반대운동 등의 동맹 즉 비록 맹
아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동맹의 등장에 의해서 점차 도전 받고 있다. 이 새로
운 집단체들은 임금노예적 노자관계의 틀 안에 구속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려
는 지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지향에 기반해서 신자유주의로 악명 높은 영
국 사회에서 계급 대립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의 생활양식(way of life)을 보다 인간적인 대안적(代案
的) 생활양식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흐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 흐름은 아직은 대단히 분산되어
있고, 신자유주의 정부의 공격을 감당하기에는 그 힘 또한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신(新)노동당 정부(블레어 수상의 노동당은 이름은 ‘노동’당이지만
‘자본’의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적극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정
당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신 노동당이라고 부르고 있다–역주)는 ‘노동시
장의 유연화’를 영국 전체에서 나아가 전 유럽적 차원으로까지 거침없이 확대.
관철시켜 나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 만큼 보다 많은 사람들과 보다 먼 미래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운동을 건설해 내는 정치적 상상력이 무엇보다도 절
실하다. 영국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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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순서 >
1. ‘의사(擬似) 고용된 사람들’의 맹아적인 동맹
2. “유연화 착취” 전략 : 노동조합의 순응과 노동자들의 저항
3. 리버풀 부두 노동자들의 모범적 투쟁
4. 임시직화에 반대하고 있는 여타의 노동쟁의들(가구, 병원, 학교)
5. 장래의 전망 : 더 많은 세상을 포괄하는 저항운동을 향하여
⊙ 지면 부족으로 글 뒷부분 3, 4, 5. 부분은 다음 주에 계속 싣습니다.
1. ‘의사(擬似) 고용된 사람들’의 맹아적인 동맹
1997년 4월 12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회정의를 위한 시민의 행
진'(People’s March for Social Justice)에 참여하여 런던 중심부를 가로지르면
서 춤을 추며 행진하였다. 이 행사에는 각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임금노예적 노동’의 세상을 넘어서 ‘인간화’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 행사는 이러한 사회운동 세력들 간에 맹아적인
수준이지만 동맹관계를 한 걸음 진척시켰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사회운동 세력들 간의 동맹은 역동성을
보이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운동세력들이 동
맹을 이루어 가는 이같은 역동적 흐름은 진보운동의 고식적(姑息的)인 범주들
(‘노동조합운동’, ‘임금노동자’, ‘실업자’ 등)에 대해 그 지반을 허물어뜨리면
서 ‘의사 고용된 사람들’과 같은 새로운 범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행사는 명목상으로는 ‘사회 정의를 위한 인민의 헌장'(People’s Chart for
Social Justice)을 지지하기 위하여 개최되었다. ‘사회 정의를 위한 인민의 헌
장’은 다양한 계급.계층.집단에 의해 제출된 요구들을 길게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이 행사에 동원된 인원
수는 10,000-20,000명으로서 유럽적인 기준에서 볼 때 적은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국의 실정에서는 반(反)독점자본주의 시위로는 지난 수년 동안을 통틀
어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행진은 애초에는 ‘리버풀 부두 노동자를 지지하는 런던 그룹'(London
Support Group for Liverpool Dockers)–1995년에 리버풀에서 500명의 부두 노
동자들이 해고되었는데 이들을 후원하고자 결성된 단체이다–에 의해 발기되었
었다. 그런데 이후 환경운동 단체인 ‘거리를 되찾자'(RTS : Reclaim the
Streets) 운동 그룹이 이 시위와 “동시병행적으로”, 같은 집회 장소에서 출발하
는 행진을 가지겠다고 천명하고 나섰다.
4월 12일 행진에서는 해고 노동자 그룹(부두 노동자, 병원 노동자, 가구 노동
자 등)들이 선두에 섰다. 그리고 여러 노동조합들의 깃발이 이를 따랐다. 그러
나 각 노동조합 깃발의 뒤에는 따르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리 많지 않았다. 터키
인 또는 쿠르드인들이 조합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조 지부들의 경우만
이 예외적이었다. 이들은 의류산업 또는 식품산업과 같이 노동조건이 극히 열악
한 부문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열악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
지고 있거나 일자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범주의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기업주들이 파업 노동자들을 대규
모적으로 해고하고 그리고 / 또는 그들의 노동력을 임시직 노동자화 함으로써)
이 노동조합 운동을 대표했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모습이라 할 만했다.
이 행진에서 대부분의 시위 대오는 각종 정치 캠페인의 기치 또는 축제적인
구호(“그들은 싸움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춤을 원한다”와 같은) 주변에 결집
하거나 또는 아무 깃발도 없는 곳에 무리 지어 모였다. 춤추고 노래하면서 이들
은 ‘화이트 홀(영국의 중앙 관청가) 투리스트-랜드'(Whitehall Tourist-land)를
카니발 축제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길을 행진해 가면서 소 그룹들이 경찰 통제선에 대담하게 도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면 다른 그룹들이 이들의 선도를 따라서 경찰 통제선에 도전하는 데
에 함께 했다. 어떠한 공식적 지휘계통도 없이 이런 일이 진행되었다.
행진이 끝날 때쯤 RTS 자동차(‘거리를 되찾자’ 운동에서 제작한, 자동차 엔진
소음을 없앤 차량이다) 한 대가 대담하게 경찰 저지선을 돌파했다. 아주 상징적
인 장소인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이 돌파
덕분에 많은 군중이 그 상징적인 장소에 진입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 여러 시간
동안 축제를 가졌다. 경찰은 행사를 해산시키려고 수차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행사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
지 기술적인 요소가 필요했음과 아울러 활동가들 사이에 집단적인 계획이 필수
불가결하게 요청되었다. 활동가들은 이러한 요구에 책임감 있게 응답했다. 나아
가 활동가들은 정부당국의 의표를 찌르는 경험들을 풍부하게 개발해냈다.
‘거리를 되찾자’ 운동은 간혹 ‘환경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시큰둥하게 평가
하기도 하지만, 공공 장소를 탈(脫)사유화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공공적인 공간
으로 그것의 구조와 기능을 바꾸는 데 있어서 독보적인(unique) 역할을 하고 있
는 운동단체이다. 예전에 이 단체와 그 지지자들은 간선도로를 점거하고 그 곳
에서 축제를 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러한 행사를 제지할 수 없었
다. 이들은 심지어 고속도로의 일부를 점거하기까지 했다.
이 단체는 그 뿌리가 1980년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 ‘시티를 정
지시키자'(Stop the City)운동의 활동가들은 ‘런던 시티'(City of London : 런
던의 상업.금융 중심지구–역주)의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일시적으로 완전 마비
시켰었다. 그리고 ‘런던 시티’의 투자들로 인해서 야기된 환경의 파괴와 사람들
의 죽음 문제를 여론에 크게 부각시켰었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이 맹아적 동맹은 1996년 여름부터 시작되었었다. 당
시 런던 지하철 운전사들은 경영자측이 주당 노동시간 단축을 실시하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파업에 들어갔다. 경영자측은 일년 전에 그렇게 하기로 노동
자측에 약속했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파업은 ‘비판적 대중'(Critical Mass)이라는 운동단체에 의해서 지지를 받
았다. 이 단체는 ‘거리를 되찾자’ 운동(RTS)과 연계를 맺고 있는 단체로서 자전
거 타기를 실행하는 그룹이다. 이 단체는 지하철 파업 당시에 교통을 교란시키
기 위해서 대규모적으로 자전거 타기를 벌임으로써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했었다.
그러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그냥 지원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단
체의 활동가들은 대중교통 체제를 세우는 데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지 아니 하
고, 대중교통 체계를 사유.사영화하고, 나아가 대중교통 부문의 노동력을 약화
시키고 있는 정부의 정책과 자신들의 고유한 운동적 관심사인 환경문제를 긴밀
하게 결부시켜서 문제제기했던 것이다.
1996년 9월, ‘거리를 되찾자’ 운동(RTS)은 일년 전에 해고된 리버풀 부두 노
동자들이 조직한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동원했다. 이를 계
기로 노동조합 운동의 활동가들과 환경운동 단체의 활동가들은 도시라는 전장
(戰場)에서 자신들의 항의 행동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 처
음으로 공통의 인식에 도달했다. 다시 한번 그들은 계급적 쟁점과 환경적 쟁점
들을 연결시켰다.
그런데 해고된 부두 노동자들은 이전에 유독(有毒) 쓰레기의 수입을 저지한
선례(先例)가 있었다. 그래서 부두의 경영진은 그 당시 노동자들의 하역 거부라
는 장애물을 우회하려 하고 있었다. 부두를 경영하는 회사는 쓰레기 처리 회사
와 그 이사진들이 서로 겹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특별한 이해관계를 가
지고 있었다. 싸우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몇 달 후인 97년 1월 20일, 세계 여러 곳의 부두 노동자들이 리
버풀에서 오는 배들의 하역을 봉쇄하거나 지연시켰다. 이날 ‘그린피스'(Green
peace) 활동가들은 리버풀 항의 하역 크레인을 점거했다. 그럼으로써 몬산토
(Monsanto) 사의, 유전공학적으로 보존되고 처리된 콩이 영국과 유럽에 도착하
여 배에서 부려지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확 띄게 만들었다. 이 때에 부
두 노동자의 지도자들은 환경운동가들의 지원에 공개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명했
으며, 우리들의 식량을 공급하는 문제라는 보다 폭넓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했다. 이렇게 하여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동맹이 처음으로 가시화
되었다.
이 다양한 행동들이 모아져서 97년 4월 12일 행사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것
이다. 이 행동들은 국가와 자본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위한 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행동들은 그 행동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집단체를 창조하고 있다.
이 행동들은 또 평소에 공공(公共) 장소를 지배하고 있던 상업을 밀어내고서,
그런 비인간적인 것들을 대신해서 새로이 창조된 이 집단체가 공공 장소의 주인
역할을 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 행동들은 참여자들에게 도시 환경을 개조할 기
회, 즉 ‘인간화’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행동들은 또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가지각색의 힘들을 ‘고용관계 상의 지
위'(정규직이냐 임시직이냐, 시간제 근로자냐 ‘자가 고용’ 노동자냐 하는 구별
들–역주)를 뛰어넘어서 하나로 통일시키고 있다. 이 맹아적인 동맹은 종래의
고정관념에 따라서 “피고용 노동자와 실업자를 단결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기 않는다. 그보다는 신자유주의 세상의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입각하여서, 각종 방식으로 ‘의사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제 그들이 어디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또 그들을 단결하게 한
기초는 무엇이었던가?(또는 무엇이 기초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노동과 생활에
관해서 그들은 어떤 미래상(未來像)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주장하고 있는가? 하
는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유연화 착취” 전략 : 노동조합의 순응과 노동자들의 저항
영국은 1970년대 중반이래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이었다. 영국의 국가는 포드주
의-케인즈주의 시대(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이며, 이것을 담
당하는 주된 계급이 산업노동자인 시대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이른바 석유
파동이 터져나온 197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국가독
점자본주의의 국가개입 정책에 힘입어 서구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이 순조롭게
진행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황금시대는, 자본은 거대하
게 집적되고 집중되어 초국적자본화한 반면에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 안에서 착
취할 노동력은 더 이상 공급이 늘어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함으로 인해서 위기
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위기에 대한 초국적자본의 돌파구로서 반동적인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 범위에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을 전면화하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에릭 홉스봄, ‘극
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까치 및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필립 암스트롱
외, 두산동아. 를 참조하시오–역주)를 상징하는 존재인 산업노동자 계급에 대
해 그 조직을 해체시키고 계급 자체를 분해시켰다. 국가는 산업노동자 계급에게
역사적인 패배를 안겨 준 것이었다.
이렇게 노동자 계급에게 패배를 안겨 주기 위해서 국가는 여러 가지 무기를
구사했는데, 그러한 무기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탈(脫)집권화, 사유화,
유연화(flexibilization), 법치화(criminalnalization) 등을 들 수 있다. 이러
한 과정을 거치면서 ‘임시직 노동'(casual labor)이 더욱 일상화되었다. 예전에
는 ‘공공 부문’으로서 공적으로 소유되고 경영되던 기업체들이 신자유주의 공세
로 사유화된 곳에서 이러한 양상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들 사유화한 공공부문
기업체들은 자신이 고용하는 노동력을 정규직에서 임시직으로 바꾸기 위하여
하청회사(subcontractor)나 용역회사(employment agency)를 흔히 이용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의 유연성’은 자본가의 작업규율에 반대하는 노동자측
의 교섭 무기가 되어 준 적이 간혹 있었다.(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할 것을 요
구하는 경우가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역주) 그러나 1980년 이후 ‘노동의 유연
성’이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유력한 무기라는 것을 자본측이 새삼
발견하게 되면서 경영자측에서 이것을 적극 도입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의
유연화’는 “유연화 착취”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유연화 착취” 전략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공장의
작업규율과 같은 유형의 엄격한 규율을 일상생활 속에다 강요하고자 한다. 그렇
게 함으로써 자본은 ‘고용된 노동자’와 ‘의사 고용된’ 사람들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들은 불안정한 ‘의사 고용’ 상태에서, 때로는 임금을 벌지도 못하
면서, 더욱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리고 있다.
이와 나란히 보수당 정부는 자가(自家) 주택의 소유를 대대적으로 증대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공적으로 운영하는 영구 임대주택 수를 대폭 축소하고 그 대
신 자기 집을 소유하도록 주택 구입비를 융자해 주는 정책을 말한다. 가난한 사
람들에 대한 주거권 보장비 지출을 줄이는 동시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주택 구
입비를 마련하고 융자받은 주택자금의 원리금 상환액을 벌기 위해 정신없이 일
을 하도록 강제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고서 보수당 정부에서 이를 적극 추
진했다–역주)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채의 덫’에 걸리게 되었으며, 이 덫은 노
동자들로 하여금 빚에 쪼들리게 함으로써 그 생활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저항 의지를 심하게 저하시켰다.
2.1. 고용의 유연화
영국의 신자유주의는 노동당 정부가 ‘통화-테러주의'(moneterrorist : 인플레
이션을 억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통화공급을 극도로 억제함으로써 의도적
으로 경기를 악화시키고, 이 인위적인 불경기를 계기로 실업자를 양산하고 노동
조합을 약화시킴으로써 노동에 대한 공격을 전면화하는 자본의 전략을 말한다.
그래서 ‘통화’에 ‘테러주의’를 복합하여 ‘통화-테러주의’라 부르고 있다. ‘1945
년 이후의 자본주의’, 제17장 “합의의 역전”, 필립 암스트롱 외, 두산동아.를
참조하시오–역주) 정책과 ‘재정 긴축’ 정책(이것은 주로 공기업 부문에 대한
투자를 삭감하고 사회복지 지출을 삭감하기 로 하기'(보수당 정부는 노동법을 개악하고는 이 악법을 어기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기소하여 제재를 가함으로써 노동운동을 무력화했다. 이것을 우리나라의
모 대통령 후보가 본뜨고 있다–역주) 전략을 실행했던 1976∼1977년경에서부터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의 이러한 전략은 곧바로 노동자 계급의 거센 저항에 직면
했다. 그래서 노동당 정부는 1979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정권은 보수당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보수당 정부가 노동당 정부를 이어서 그러한 전략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했다.
보수당 정부 하에서 1980년대를 경과하면서 대규모의 조합원을 포괄하고 있으
면서 조직력이 강한 사업장들은 무수히 파괴되거나 약화되었다. 이렇게 노동자
의 조직력이 강한 대단위 사업장을 파괴 내지 약화시키는 수단으로서는 국가보
조금을 깍아내린다거나, 국가소유의 기업체 또는 공공 서비스 부문을 민영화한
다거나, 공장을 폐쇄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주로 동원되었다.
노동력의 공급은 일자리의 임시직화 즉 ‘계약 노동제’ 또는 ‘부분-시간 노동
제’, ‘하청 주기’, 용역회사에 의한 ‘파견근로제’ 등에 의하여 더욱 ‘유연화’되
었다. 또 임금을 받는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자기 고용’이 늘어나는 현상이 뒤
따랐다. 그런데 이 ‘자기 고용’이란 실은 ‘자기 착취’와 ‘노동보호 법규의 회
피’를 둘러서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가내공업 같은 경우
가 대표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영국에서는 보수당 정부 하에서 이러한 노동자들
이 거의 두 배 가량 늘어나서 전체 노동력의 12%에 이르게 되었다. 앤 그래이
[Anne Gray], “노동의 유연화와 노동자의 생활조건에 대한 공격 :
Flexibilization of Labor and the Attact on workers’ Living Standards”, ‘커
몬 센스 : Common Sense’ 제18호 [1995년 12월]을 참조하시오–역주)
실업이 광범위하게 만연하면서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시간
외 근로가 부쩍 늘어났다. 그런데 이러한 잔업에 대해서 잔업수당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임시직 노동자의 경
우에는 잔업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시간외 근로에 대해
아예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사용자들은 각종 방법으로 노동자에게 작업량을 늘이도록 강요했다. 예
를 들어서 일하는 사람의 수효는 줄이면서 작업량은 줄이지 않으면 한 사람 당
작업량이 자동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노동조건을 개악시키는 이 모든 나쁜 경향들은 법령의 변화에 의하여 한층 더
강화되었다. 보수당 정부가 도입한 새 노동법에 따르면, 어느 노동자가 그 일자
리에서 근속한 햇수가 2년을 초과하지 못할 경우, 불공정하게 해고당하더라도
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악법 조항은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게 특히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 노동법의 이 ‘해고 자유’ 조항은 사용자들로
하여금 신규채용한 노동자들을 2년이라는 ‘해고 제한 기한’ 안에 해고시켜 버리
게끔 만들고 있다. 이 법 조항은 사용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특별 유인을
제공하고 있다. 2년 안에 해고하면 해고수당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노동법원
에 불려 다닐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고의 자유’가 법제화됨으로 인해서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얻은 후
일년 안에 그 일자리를 다시 잃게 되는 경우가 태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노
동자들의 고용조건은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 고용기간을 짧게 정하고 있는
‘계약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정규 노동자들의 고용까
지도 이 법규로 인해서 불안정해지고 있다. 이들도 언제 계약 노동자가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 여타의 ‘고용’ 관련 법률이 또한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에 대해 제
약과 벌칙을 과했다. 노동조합의 파업은 민사재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
는 대상이 되었다. 또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려면 어떤 경우이건 반드시 파업 찬
반투표를 하도록 파업의 요건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법한 파업이
아니어서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 사용자는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몽땅 해고할 수 있도록 보장되
었다. 말하자면 정리해고가 자유롭게 허용된 것이다.
반면에 노동자들이 ‘2차 행동’을 하는 것은 불법으로 금지되었다. 타 기업체
의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을 지지하여 자신의 고용주가 아닌 타 사업체의 사용
자를 투쟁의 상대로 하여 파업, 태업, 피켓팅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이 불법화된
것이다. 즉 연대투쟁이 금지된 것이다. 그 결과 사용자들은 자신의 법인체를 여
러 개로 조각 냄으로써(우리 나라의 경우로 비유하면 ‘위장 분할’이다–역주),
그리고/또는 일부 공정을 같은 공장 안에서 하청화(우리 나라의 경우로 비유하
면 ‘사내 하청’ 또는 ‘소사장제’이다) 함으로써 노동자의 단결을 깨뜨릴 수 있
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모든 형태의 연대투쟁은 ‘2차 행동’으로 규정되어 불법
화되기 때문에 사업장을 뛰어넘는 단결.투쟁은 물론이고 한 사업장(하나의 법인
체가 아니라) 안의 노동자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투쟁하는 것조차 원천적으로 불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몇몇 노동조합들은 자기 자신의 조합원들을 단속하기 위해서 이러한 ‘고용’
관련 법률을 들먹이거나 활용하였다. 예컨대 보수당은 ‘고용’ 관련 법률에서 하
나의 파업 사업장에 대해 규찰 활동을 할 수 있는 규찰대원의 수를 법적으로 제
한했었는데, 노동조합들은 이 법률을 빙자하여 집행부가 ‘공인한’ 규찰대원에게
만 규찰대원 완장을 지급했다. 그럼으로써 경찰로 하여금 ‘비공인’ 규찰대원을
쉽게 찾아내서 체포할 수 있도록 방조했던 것이다.
더 최근에 와서 몇몇 노동조합들은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을 사용자가 대
량으로 해고하는 것에 대해 이를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이 노동조합들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해서 “파업을 했으므로 더 이상 피고용자가 아니다” 라는 자본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관료화하고 그래서 어용화한 산별 노동조합들은 경영자측과 이면(裏
面) 거래를 모색하면서 기층 노동자들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침해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당의 ‘고용’ 관련 입법은 ‘반 노동조합적'(anti-trade union)인 기능
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반(反) 단결적'(anti-solidarity)인 기능
즉 기층 노동자들의 단결을 파괴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결과로 되었다. (영.미
계통의 산별노조들은 그 동안 심하게 관료화되고 그 결과로 어용화되어 조합원
들의 최소한의 이익조차 대변하지 못하고 심지어 일본의 기업별 노동조합들처럼
자본의 노무관리 기구로 전락하는 경우조차 있었다–역주)
법률과 관행에 있어서의 이 모든 변화들은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여 노동자 계
급의 저항을 해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몇몇 노동조합들은 노동자
계급이 패배하는 데 편의를 도모했다. 어떤 노동조합들은 심지어는 노동자 계급
을 패배시키는 데 자본측에 가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어용 노동조합들은 ‘새
로운 현실’이라는 논리 즉 “세상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경영
자측의 ‘동반자’ 연(然)하며 실질적으로는 들러리를 서는 역할을 적극 맡아 하
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말할 것 없고 ‘현
장 활동가'(shop-stewards) 조직들까지도 현장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 갔
다. 심지어는 조직적인 자주성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상용(常用)으로 고용되고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 조직화된 노동자들(또는 그들의 일자리들)을 점차 삭감
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들 정규직 노동자들을 임시직 노동자로 대체시켜 나갔
다. 최악의 경우에는 파업을 유도하고는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악
랄한 수법을 구사하기까지 했다. 또 이런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만약 새로
운 노동자들이 지금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 충원될 수 있다면, 정규직 노동자들
은 안정된 일자리를 당분간 동안밖에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최상의 경우
였다.
어떤 경우, 사용자들은 고용 노동력의 일정 부분을 임시직 노동자로 남겨 두
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해서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임시직
노동자들은 단체교섭 과정에서 교섭 당사자에서 제외되며 또 단체협약의 포괄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린다. 이 장치는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회사 밖이 아니
라 회사 안에 ‘산업예비군’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얼마나 편리
하고 ‘유연’한가!
2.2. ‘의사 고용'(quasi-employment)의 강요
노동력을 유연화하기 위해서 국가는 피고용자뿐만 아니라 실업자에 대해 유연
화하는 것까지 추구하고 있다. 실업자들은 국가로부터 실업 급여금(給與金)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고용노동과 유사한 활동들(work-like activities)에 부
지런히 종사는 것을 급여금 수령의 요건으로 요구받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의사
(義似) 고용’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의사 고용’이 횡행하는 속
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은 낮고, 고용계약 기간은 일시적이면서(temporary), 부분
-시간(partime)만 일하는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되고 있
다.
즉 공식적으로 실업자로 등록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훈련’이 의무화되
고 있는데, 이 훈련은 노동자들에게 회사 규율에 대한 복종심을 강요하고, 임금
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기대하는 임금의 수준을 낮추게 하는 등의 역할을 해 왔
다. 이같은 공식적인 ‘훈련’ 계획(training schemes)을 받기를 거부하거나 ‘고
용조건이 적절한 일자리'(reasonable jobs)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에 대
해서 정부는 ‘소득 보조금'(실업 급여금) 지급을 지난 10여 년 동안 점차 철회
해 왔다. 이렇게 하여 실업 급여금 수령으로부터 배제되는 사람의 숫자가 날로
증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실업 급여금을 계속해서 청구할 권리가 있는 노동자들로 하
여금 급여금을 청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기를 꺾었으며, 어쩔 수 없이 ‘의사
고용’된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의사 고용’된 사람들의 저수
지를 크게 팽창시켰다.
1996년 10월부터 ‘구직자 급여'(JSA : JobSeekers’ Allowance. 보험금 납입에
의한 실업 급여 대상을 줄이고자 1996년부터 도입되었다. 이 제도 하에서는 실
업급여를 받으려면 급여수령자의 자산에 대한 조사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당장 일하지 않고 버틸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실업급여에서 제외시키
고 어떤 열악한 조건에서라도 기꺼이 일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실업급여를 일
시적으로 지급하고 있다–역주)를 받으려면 실업자로 된 달로부터 석 달이 지난
후에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즉 그 분야가 임시직이든 저임금이든지를 불문하고
반드시 일자리를 가지도록 요구하고 있다. 실업자들은 또 16주일 이상 교육과정
(실업자들 가운데서 선발해서 실시되는데)을 계속 밟고 있는 경우에는 정부가
실업 급여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은 많은 실업
청년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술자격 및 기술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박탈
하고 있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구직자 급여제'(JSA)는 그 급여의 지급 수준을 마구
깍아내렸다. 또 실업 기간이 6달에서 12달 사이에 이르는 사람들 모두에게 대해
서 실업보험금에 기초한 급여의 지급을 자의적으로 철회했다. 또 급여를 계속
수령할 수 있기 위해서 급여 청구자들이 지켜야 할 요건을 훨씬 더 엄격하게 만
들었다.(영국의 실업급여 수준은 남자 가장(家長)의 경우를 보면 노동자 평균임
금의 20.1%에 불과하다. 이것은 유럽연합 평균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
이 수치는 1992년을 기준으로 한 계산인데 이는 1979년의 26.2% 보다 한참 떨어
진 수준이다–역주)
나아가서는 1996년에 들어서는 ‘복지급여를 받기 위한 노동’ 계획
(‘work-for-benefit’ scheme) 즉 ‘노동 숙제 제도'(Project Work)가 몇몇 분야
에서 도입되었다. 노동당 정부는 이 계획을 새로운 ‘일-복지'(workfare : 정부
에서 실업자에게 일정한 급여를 지급하여 소득을 보장해 주는 방식과 반대로 무
슨 일이든 일을 하게 만들어서 소득을 벌게 하고, 그렇게 해서 굶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을 그 정신으로 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노동을
강요하는 복지’ 제도이다. 이 제도의 원산지는 미국이다-역주) 형(型) 계획으로
확장할 구상을 가지고 있다. (아래의 제5, 1 항을 참조하시오)
이렇게 하여 영국의 실업급여 체제는 케인즈주의적인(Keynesian) ‘사회-복
지'(wellfare) 모형으로부터 멀리 이탈하여 ‘일-복지'(workfare) 모형으로 전환
되었다. 이 새로운 모형에서는 실업자들은 급여를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단기
간 이상 놀고먹어서는 아니 되고 어떤 나쁜 조건의 일이든 반드시 ‘일'(work)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요구되고 있다.
복지 체제의 이러한 변화는 사회-복지를 받을 권리를 공격함으로써 노동자들
로 하여금 는'(job-seeking) 데에 더욱 애를 쓰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는 노
동자들'(job-seekers) 상호간에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교섭력(bargaining power)을 크게
저하시켰다. 자본의 입장으로 보면 임금도 깎고 사회보장비도 깎는, 꿩먹고 알
먹기가 된 것이다.
2.3. 굴욕에 대한 거부
많은 ‘급여 청구권자’ 그룹들은 실업급여에 대한 총자본의 이러한 공격에 반
대했다. 그러한 업 알선 사무소의 단기(短期) 직업들 가운데 몇몇 부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화했다. 그리고 일-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복지 규정들
이 자신들의 직무에 미치고 있는 부정적 작용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공무원
들의 투쟁을 지지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업자들의 이러한 연대활동들은 취업 노동자들로부터 거의 되돌아오
는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은 ‘노동 숙제(宿題) 제
도'(Project Work)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비록 반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미하
게 대응하거나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일-복지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은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 되어 본 적이 없는 것
은 말할 것 없고 영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해 본 경험 자체가 없는 젊은이들을
이 운동에 많이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임금노동제 밖에서 행해지는
활동 즉 임금노동제가 아닌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들에 대
해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실업급여를 자신들의 의미 있는 사회
활동 또는 임금노예적이 아닌 대안적 생활방식을 영위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최
저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일-복지 계획은 이들 ‘임금노동제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존립하고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
를 위협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이래 노동자들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제반 조건들과 노동
강도의 강화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굴욕의 강요와 / 그리고 또 낮은 임금에
대해 즉 “유연화 착취”에 대해 점점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96년
여름에는 런던의 지하철 기관사들이 파업을 했는데, 이들은 사용자측이 주당 동시간을 단축하기로 약속했다가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파업에 돌입
했다. 사용자측은 일년 전에 이를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체신 노동자들도 파업을 했는데 이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기존의 ‘작업 팀’을 새로운 ‘작업 팀’으로 교체하면서 작업 부하(負荷)
를 높이려는 사용자측의 계획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했다.
식품 제조업 노동자들과 의류 제조업 노동자들도 파업을 했다. 이들은 주로
터키 계 또는 쿠르드 계 노동자들인데, 1996년에 런던 북동부 지구에서 연쇄적
으로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파업 노동자들은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일을
시키는 ‘무보수 잔업’ 및 ‘강제 잔업’에 반대하고, 정식 노동계약서를 작성할
것과 노동조합 결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떨쳐나섰다.
노동자들이 일괄 정리해고되는 경우에도 몇몇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이를 그대
로 수용하지 않고 쟁의를 제기하고서, 이 쟁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
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노동조합과 독립적으로 또는 심지어는 소속 노동조합과
대립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아래 제3항 및 제4항을 참조하시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결국 전임제 정치활동가들이 되고 있는 셈인데, 이렇게
전임제 활동가로 살아감에 있어서 이들은 자신의 생계를 노조에서 지급하는 파
업자 수당 및 외부로부터의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은 종종 자신이 속한
노동조합의 정치적 통제를 따르지 않고 교묘히 이를 피해 나가고 있다.
이들은 또 자신들의 종전의 일자리를 되찾을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거기에
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이들은 착취가 ‘유연화’된 직장이 됨으로써 잃어버리게
된,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을 투쟁의 근본적인 요구로 삼
고 있다.
이들의 파업은 노동조합 밖에 있는 여러 운동세력들, 예를 들어 무정부주의자
들과 자치주의자들 및 환경주의자들(위에서 설명한 바 있는)에 의하여 지지.지
원을 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안에 있는 좌파 핵심부에 의해서도 암암
리에 지지.지원을 받아 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이들 운동세력의 활동가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또 나아가 노동조합의 조합원이기도 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
치적 귀속감을 관료화된 노동조합에 바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정치적 일체감은
자본의 “유연화 착취”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임금노동의 비인간화된 규율에 대한
대안적 모델 즉 ‘인간화된 노동과 생활’의 모델을 개발하는 사람들 쪽에 두어져
있다.
대안적 모형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생존전략’ 이상으로 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생활을 보다 창조적이 되게 하려는 열
망을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이 써클들 안에서 몇몇 활동가들은 자발적인 내핍
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정치적’인 쟁점을 개인의 ‘도덕
적’인 선택의 문제(예컨대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여행을 하고 하
는 등의 문제로)로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개인
의 도덕적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들은 대개는 극복되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새
로운 사회적 선택지(支)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집단적 수단들을 움켜쥐는 방향으
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유연화 착취” 전략은, 그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자들이 의도했던 것
과는 무관하게, 각종의 다양한 국외자 집단들 즉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입각할
때에는 ‘고용 노동자’라고 볼 수 없는 ‘의사 고용’된 사람들을 피고용 노동자들
과 하나로 동맹하게끔–다양한 통로를 통해서–작용을 미쳤다. 그 결과로 고용
된 노동자들과 ‘의사 고용’된 사람들의 새로운 동맹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동맹체의 단결은 그 동안은 그 수명이 매우 짧았다. 파업 노동자들
은 전통적인 ‘노동자주의적’ 어법을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일할 권리’ 같은
구호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에 파업 노동자들의 동맹자인 ‘의사 고용’된 사
람들은 ‘노동’이라는 것을 본원적으로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그 무엇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마치 노동해방이란 ‘노동 소외의 극복과 노동의 인간화’
가 아니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듯이–역주)
이처럼 이 두 상이한 흐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삶을 영위하겠
다는 자신들 공통의 열망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들 공통의 언어를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또 그들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
는 정치적 ‘일’을 묘사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조차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그
들은 아직 ‘인간해방’이라는 근본지향과, ‘온 세상의 인간화’라는 실천적 목표
에 입각하여 하나로 통일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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