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초점]

대공황과 노동운동의 대응

– 지금 즉각 총파업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제공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1998년 1월 7일 발표)

7. 4. 세 번째 질문 : 무엇을 요구하고 주장할 것인가

(3) 민주대개혁에 관하여

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노동자.민중의 대안이 아니다.

<3> 정리해고제는 재벌개혁과 맞바꿀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1. 정리해고제 도입, 재벌개혁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정리해고제 도입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국민회의, 자민련, 한나라당의 원

내총무와 임창렬 부총리는 5일 회담을 갖고 1월 중순에 임시국회를 열어 금융산

업에 대한 정리해고제 도입을 입법화하기로 합의했다.이에 앞서 작년 연말에 3

당은 2월 2일 임시국회를 열어 금융산업 뿐 아니라 전산업에 정리해고제 도입을

입법화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런데도 다시 1월 중순에 임시국회를 열어 금융

산업 구조조정과 관련한 정리해고제를 도입키로 한 것은 미국-초국적 자본을 의

식한 김대중 당선자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당선자는 그 날

짜도 깡드쉬 IMF총재가 방한하는 12∼13일경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날짜는 아

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1월 중순에 금융산업에 대해 정리해고제를 먼저 도입하

고, 이어 노.사.정 합의 과정이라는 모양을 갖추어 2월초에 전 산업에 대해 정

리해고제를 도입한다는 일정이 확정된 것이다.

정리해고제 도입은 이미 대통령 선거 직후부터 김대중 당선자측에 의해 기정

사실화되어 왔다. 김대중 당선자는 당선 직후인 1월 21일 미국 재무부 차관인

립튼과의 면담에서부터 정리해고제 수용 의지를 천명했다. 대선운동 기간 중에

6개월간 임금동결-해고동결, 노동시간 단축 및 순환휴직제를 통한 대량실업 방

지를 내걸었던 공약을 불과 3일만에 폐기처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미국-

촉국적 자본의 압박이 작용했다. 미국-초국적 자본은 대선 직후 국가 부도 직전

까지 가는 파국을 조성하고 이를 무기로 국내 지배세력의 완전항복을 받아냈다.

이 당시 일차적으로 목표했던 것은 자본시장의 완전자유화, 제일은행.서울은행

을 넘겨받는 것 등이었지만 그들은 그와 더불어 정리해고제 추진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김대중 당선자측은 12월말 임시국회에서 금융산업 정리해고

도입을 입법화하려 했으나 금융노동자들의 반발 등에 의해 일단 한발 물러선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술적 일보 후퇴에 불과했다. 김 당선자측은 금융산업 정

리해고제 도입을 잠시 유보하는 대신 전 산업 정리해고제 도입과 노.사.정 합의

를 통한 도입이라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이렇게 해서 전산업 정리해고제 도입은

기정사실화되어 왔고 이제 그것이 바로 코 앞에 닥친 것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정리해고제와 더불어 재벌개혁 문제가 전면에 부상했

다. 물론 재벌개혁 문제도 이미 IMF와 합의한 사항이다. 그리고 미국-초국적 자

본은 그 일정을 앞당길 것을 요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연말까지만 해도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가 느닷없이 핵심현안으로 부상한 것이다. 공정거래위의

재벌개혁안 발표에서부터 시작된 재벌개혁 문제는 김대중 당선자가 4, 5, 6일

연이어 재벌개혁 문제를 강조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5일 국민회의 시무

식에서 김 당선자는 “경제난국의 책임자 중의 하나인 재벌이 자기개혁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면서 “만약 기업이 자기 개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재벌개혁을 강력히 밀고 나갈 것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비상경제대책위원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등에서 재벌 계열사 상호지급보

증 금지, 출자총액 폐지와 지주회사 설립 등을 내용으로 한 재벌개혁 방안이 공

론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재벌개혁 문제도 기정사실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2. 재벌개혁-정리해고제 맞바꾸기 이데올로기 공세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

다.

그런데 이 두가지 문제, 정리해고제 도입과 재벌개혁 문제는 별개의 사안으로

기정사실화되는데 그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정리해고제를 관철하기 위한 주

요한 무기로서 재벌개혁이 제기되고 있다. “노동자에게만 희생을 요구할 수 없

다. 경제파탄의 책임자인 정부와 재벌부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소위 ‘상호주의 원칙’, ‘형평의 원칙’의 양 축으로서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도입과 재벌에 대한 개혁이 한 묶음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놓고 말

하자면 재벌도 개혁할테니 노동자들도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이라, 그러면 공평하

지 않느냐고 노동자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국민회의에서는 재야.노동계 출신들이 앞장을 섰다. 재야.노동계 출신들은 작

년말부터 정리해고를 도입하려면 재벌개혁도 병행해야 한다면서 분위기를 조성

해 왔다. 민주노총과의 접촉창구역을 맡고 있는 방용석 의원은 “아무리 보완대

책을 마련한다고 해도 노.사.정 합의문에 정리해고제 도입을 명문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우려하면서 특히 “노동계는 정리해고제 도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왜 재벌은 놔두고 노동자만 갖고 그러느냐’는 불만이 많다” “재

벌 개혁과 정부의 고용안정-실업자 대책을 병행해 가면서 노동계를 설득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입장을 대변했다.*주1) 신년 구상을 마친 김대중

당선자도 5일 국민회의 시무식에서 “나는 과거와 같이 일부에게만 희생을 강요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먼저 청와대부터 고통분담을 할 것이다. 그 다음 오늘

의 사태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큰 기업이 고통을 감내하고 자기개혁을 해야 한다.

다음에 노동계.국민들이 고통분담에 동참해야 한다. 억울한 사람, 특권을 누리

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고 하여 이러한 재야.노동계 의원들의 주장에 화답하고 나섰다.(이것이 짜고치는 화투놀이임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재벌개혁과 정리해고제 도입 맞바꾸기는 공식적인 논의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에 일찌감치 맞장구를 치고 나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수구세력의

대변지인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논객 중의 한 명인 유근일 논설주

간은 “쌍방향 고통”이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나 왜 밤낮 근로자와 못사는 사람들만 번번이 일방적 양보를 해

야 하느냐는 ‘이유있는 항변’이다. 정리해고제를 불가항력적으로(불가항력적이

라니? 그들은 이미 노동법 개악 당시 정리해고제를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던가!

:필자 첨가) 수용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는 적어도 이 절박한 물음에 대해서만은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답변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장 절실한 것은 재

벌개혁이다. …이유는 그야말로 간단하다. IMF, 해외경제주체들, 그리고 정리

해고 당할 사람들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상호주의 원칙

과 형평의 원칙상 뭐라고 논박할 여지가 없다.(저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공평무

사했단 말인가! : 필자 첨가) 우리가 정리해고 당한 판이라면 당신들도 응분의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개혁하라. 이 요구는 수학공식만큼 정확하고도 과학적

이다…. 앞으로 있을 노.사.정 합의에서는 그런 이야기(사과와 개혁의 다짐:

필자 보충)가 반드시 먼저 나와야 한다”고.

한마디로 줄이면 “재벌이 먼저 개혁을 한다면 정리해고에 대해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보답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재벌만 개혁한다면 정리해고도 참을

만 하다니! 참으로 공평하다!

이렇게 국민회의로부터 조선일보에 이르기까지 지배세력은 재벌개혁과 정리해

고제 맞바꾸기에 대해 한목소리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국민회의나

조선일보만 그런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민주노총은 그런 입장과 확연

히 대립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민주노총 방침에 따라 금속산업연맹 입장으로 재정리한 “노.사.정 합의를 위

한 요구(안)”을 보면, 그 첫 항목이 ‘재벌체제 개혁’, 둘째 항목이 ‘고용안정’

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재벌개혁과 관련해서는 첫 번째로 들

고 있는 것이 상호지급보증 금지, 결합재무제표 작성, 집단소송제도 도입 등

‘IMF 합의사항 이행’이다.(민주노총 요구내용의 첫째가 IMF합의사항 이행이다!)

거기에다 사외 이사.감사제 도입, 재벌총수 재산 헌납, 재벌 신문사 소유 금지,

부패방지법 제정 등이 덧붙여지고 있다. 재벌 총수 재산헌납을 빼고는 국민회의

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점을 찾기 어렵다.

‘고용안정’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정리해고의 문제

를 인수합병.구조조정에 관련한 근로기준법 개정이나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리해고 반대의 입장을 확실하게 하지 못

하거나 설사 반대하는 입장을 세우고도 몸을 던져 투쟁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구안에 보면 근로자파견제와 관련해서도 “기존의 불법용역 시

정, 공공 직업소개 기능 확충 등의 선행조치를 취한 뒤, 노.사.정 합의로 근로

자판견법 도입 여부를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요구안이나 실제 민주노총이 움직임을 보면 재벌해체를 전제로 한 정리해고

제, 근로자파견제 도입이라는 큰 틀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속전속결로 밀어부치는 지배측에 맞서 힘있는

투쟁을 조직할 수 있겠는가?

3. 정리해고제를 재벌개혁과 맞바꾸는 것은 사기협잡이다!

지배측이 밀어부치고 있는 ‘재벌개혁-정리해고제 도입’ 맞바꾸기는 얼핏보면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한다. 유근일이 말하는 소위 ‘상호주의 원칙’과 ‘형평의 원

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공세에 대해 우리 노동운동에

서도 확고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고 동요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과

연 그런가?

이 점을 따져보려면 재벌체제란 도대체 무엇이고 우리가 요구해 온 재벌해체

는 어떤 의미와 내용을 가지는 것인지부터 헤아려 보아야 한다.

재벌체제는 핵심적으로 말해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 체제이다. 물론 재벌은

국가의 특혜를 통해 자원을 독점하고 인플레와 부동산투기, 저곡가 등으로 일반

민중, 나아가 중소기업까지 초과수탈해 왔다. 그리고 국가권력과의 결탁 과정에

서 부정비리를 일삼아 왔다. 이러한 점들이 재벌에 대한 주요한 비판지점의 하

나인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혹은 핵심인가? 아니다.

재벌체제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에 의거한 축적체제라

는 점이다. 극도의 저임금, 세계 제1의 장시간 노동, 세계 제1의 산업재해 등이

이를 상징한다. 기업 내에서의 초과착취뿐 아니라 독점 하에서 일반적으로 노동

력의 사회적 재생산을 지원하는 사회임금 부분, 즉 교육, 의료, 실업 등에 대한

사회보장도 사실상 전무했다.

이러한 초과착취 체제는 첫째로 대외적인 종속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기술,

장비, 자본 등을 외국에서 도입해서 저임금 노동력에 의해 가치를 생산하고 다

시 국제시장에서 이를 실현하는 관계 속에서 초과착취가 이루어져 온 것이다.

둘째로는 대내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에 의한 노동자계급의 배제에 기초하고 있

다. 파쇼권력과의 압, 언론 장악에 의한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등이 그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초과착취는 이러한 대내외적 관계와 제도, 관행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결과이

고 그것이 바로 재벌에 의한 천민적 축적의 원동력이었다.

이 두가지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천민적 초과착취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요구한 재벌해체는 이러

한 초과착취 체제에 대한 구조적 개혁을 의미했다. 대외적으로 종속성을 탈피하

는 것,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를 해체시킨 위에서 산업민

주화와 정치민주화에 의한 노동자.민중의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자

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경제권력을 통제할 수 있고 자본주의 하에서

의 정상적인 착취의 수준이나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과착취 체

제에 대한 저항으로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요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개혁은 어떠한가? 그것은 한마디로 초과착취 체제에 대한 구조

적 개혁은 없고 신자유주의적 유연화 착취가 접목, 첨가된 개혁이다.

우선 초국적 자본이 외적 규정성(종속성) 정도를 넘어 내적인 경제적 지배력

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식민지성). 이 초국적 자본은 중화학 부문에서도 고도

화된 기술을 가지고 경쟁하는 부문은 성장을 억제시킬 것이다. 결국 중하위 기

술수준의 중화학 공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초국적 자본에 의한

착취와 수탈이 더해진다고 하면 초과착취는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재벌개혁 문제는 어떠한가?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는 재벌개혁의 내용

은, 첫째로 경영구조의 합리화이다. 상호지급 보증 금지.해소, 결합 재무제표

작성 의무화, 부당 내부거래 금지 등이 그것이다. 계열사에 의존한 차입과 그것

을 통한 선단식, 문어발식 경영, 중복.과잉투자 등의 비합리성을 없애는 것이

다. 그리고 둘째로는 출자총액한도를 폐지하고 지주회사 설립을 유도하는 것이

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소유관계는 유지된다. 재벌 일족들은 지주회사를 통해

상당수의 계열사를 거느리게 될 것이다.

이 두가지 개혁을 하고 나면 재벌은 지주회사를 통한 수직적인 결합관계만 남

고 계열사간의 횡적으로 서로서로 지탱해주는 관계는 많이 약화될 것이다. 다른

계열사에 기대어 돈을 빌리는 것이 어려워지고 계열사간의 독립성이 증가할 것

이다. 그리고 은행도 재벌계열사의 보증이 아니라 해당 회사의 경영상태를 보고

대출해야 하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독립성, 투명성이 높아지면 기존 재벌이 다소간 합리화된 형태로 유지되는 가운

데 다른 한편으로 초국적 자본이 재벌의 알짜 계열 회사들을 사냥하는 것이 훨

씬 쉬워질 것이다.

이러한 개혁에는 노동자에 의한 산업민주주의적, 정치적 통제가 강화되는 내

용은 전혀 없다. 더욱이 지주회사들은 노동자를 임금노예로 생각하는 기존의 천

민적, 전근대적 속성을 온존한 채 자회사들을 통제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재벌개혁은 민주적 개혁이 아니라 천민적인 것을 부분적으로 완화시키면

서 신자유주의적인 것을 접목한 개혁이며, 그래서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노

동법 개정이 민노총을 합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아니라 노사관계, 노동

조건에 대한 전반적인 개악이었듯이. 이번 개혁도 재벌을 다소간 합리화시킨다

고 하더라도 개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개악된 것이다. 기존의 소유.지배관

계와 천민적 속성을 그대로 지닌 채 초국적 자본의 하수인으로 재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개혁을 가지고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와 맞바꾸자는

말인가? 개선된 것이 있어야 고려라도 할 것이 아닌가?

정리해고제 문제는 단지 실업자가 조금 늘어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저들도 이야기하듯이 평생직장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직장은 없어져도

평생고용이 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거리가 많이 있

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용직도 일거리만 많으면 평생고용이 될 수 있듯이.

이것은 흔히 생각하듯 기업이 어려울 때 인원을 정리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고용의 안정성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데 있다. 그

야말로 고용관계의 패러다임과 관행, 패턴을 자유해고제로 바꾸는 문제인 것이

다. 이 경우 노동자들은 기업에 대한 어떠한 귀속관계도 가질 수 없다. 기업은

전적으로 자본의 배타적인 소유물이 된다.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발언권이 없어

지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가 일용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법원 판

례로 정리해고가 되는데 그것을 법으로 만든다고 뭐 다를 것이 것은 사안의 본질을 완전히 헛짚은 것이다.

이것은 유연화 착취제도를 만들어낸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도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대량해고, 임시직 노동자의 대량 도입, 임금삭감, 노조약화를 통해 초

과착취를 실현하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경제

적 현실과 고용관행이 또 다르다. 예컨대 그들은 정리해고의 수단으로 일시해고

(lay-off)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한 번 해고는 영구해고이다.*

주2)

특히 우리나라가 그들보다 기존 고용관계가 경직되어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

지 않다. 정부의 통계만 보더라도 그러한 주장은 거짓말임이 드러난다. 계약기

간이 1년 미만인 임시직과 1개월 미만인 일용직 노동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 97

년 3/4분기에는 전체 노동자의 47.2%에 이르고 있다. 파견근로 역시 불법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의 보고에서도 3,753개 업체에 22만 5천 명에 이르고

있다.*주3)

※ 자료 : 통계청 [97년 3/4분기 고용동향]

┌───────┬────┬────┬────┬────┬────┐

│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 상 용 직 │ 58.7 │ 57.8 │ 58.0 │ 56.6 │ 52.8 │

├───────┼────┼────┼────┼────┼────┤

│임시직+일용직 │ 41.3 │ 42.2 │ 42.0 │ 43.4 │ 47.2 │

├───────┼────┼────┼────┼────┼────┤

│시간제 노동자 │ 6.6 │ 6.6 │ 6.3 │ 6.3 │ 7.6 │

└───────┴────┴────┴────┴────┴────┘

주 : 시간제 노동자는 취업자 대비 비중임

이런 상태에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가 법으로 도입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야말로 전체 노동자가 날품팔이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들은 이렇게 전체 노동자가 날품팔이 되는 것을 재벌개혁하고 바꾸

자고 하고 있다. 그것도 재벌해체가 아니라 재벌살리기, 개선이 아닌 개악인 개

혁을 내세워 상호주의니 형평이니 생색을 내면서 날품팔이 인생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주고받는 거래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시야를 넓혀 초국적 자본과의 관계에서 보면 문제는 더욱 확연하게 드

러난다. 재벌의 개혁.약화와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모두 초국적 자본의 요구이

다. 그들은 재벌을 약화시켜 알짜 기업들을 먹어주고,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

고, 근로자파견제 등 유연화 착취를 강제하려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보면 그들

과 노동자.민중 사이에는 거래의 가능성조차 없다. 재벌개혁이라는 표면적 이해

관계의 일치가 있을지 모르나 재벌을 해체함으로써 초과착취 체제를 해체시키려

는 노동자계급과 재벌을 개혁하면서 오히려 더 고도화된 유연화 착취를 부과하

려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는 정면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더 강한 지배

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재벌을 약화시킨단 말인가? 지난 시기에는 재벌과 권위주

의 정권 사이의 정경유착이 초과착취를 유지시키는 힘이었다면, 지금은 초국적

자본이 국가를 압박해 초과착취를 강제하고 있지 않은가! 단적으로 이번에 정리

해고제가 누구 때문에 도입되려 하고 있는가?

이렇게 볼 때 지금 김대중 예비정권은 초국적 자본의 충실한 집행자로서 역할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숨기고 마치 자신들이 무언가 대단한

결단을 내려 재벌을 개혁하는 양 폼을 잡으면서 그것을 구실로 노동자들에게 정

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수용하라고, 그렇게 거래하자고 ‘설득’하고 있다. 이

것은 명백한 사기극이다. 거래가 아닌 것을 거래라고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만

약 진정 거래라고 강변한다면 차라리 재벌을 그대로 두어도 좋으니 정리해고제

를 도입하지 말자고 요구해 보자.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대답은 너무나 뻔하다.

초국적 자본의 요구 때문에 재벌은 어차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혁할 수밖에 없

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사기극에 놀아나면서 그들과 ‘거래’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운명, 민족의 운명을 팔아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이 엄청난 상황 앞

에서 온몸을 던져 투쟁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노동자의 호민관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자격이 없다!

□ 주 ———-

1) 조선일보 1월 6일자.

2) 이병희에 따르면 미국의 일시해고제 하에서는 이른바 선임권 우선의 원칙을

준수하여 근속연수가 짧은 노동자부터 해고하고 재취업시에도 근속연수가 긴

노동자부터 재취업시키는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그 반대라고 한다. 그래서

부양가족이 많고 생활비가 많이 드는 50대 이상이 해고확률도 높고 일단 해고

되면 재취업이 어렵다는 것이다.

3) 이병희, “노동시장의 유연화”,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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