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록]
변함없이 참신한 개념인 “민족”
국민주의(le nationalisme)에** 대립하는 “민족”(la nation)*
* 이 글은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최근 IMF 정
국이 닥치면서 이것에 반대하는 요구나 주장을 “배타적 민족주의”니 “국
수주의”니 하면서 비난하는 목소리가 요란합니다. 마치 그렇게 비난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덜어지기나 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민족주의고 국
수주의고 아직 정확한 의미조차 개념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
러면서 외국 즉 서구의 이론들과 그들 즉 초국적 자본의 주장을 직수입해
서 그렇게 말하고들 있습니다. 이 글은 이러한 “대세”에 추종하지 않고
민족이라는 문제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인간해방의 지향에 비추어 올바로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입니다.
** 국민주의는 국가주의, 국수주의와 맥이 통한다. 이것들은 모두 민족에
앞서 국가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며,(국민-국가가 민족을 만들
었다고 주장하는 스탈린주의 민족이론도 이것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국가 또는 국가-구성원의 이익(전자에 강조점을 두면 국가주의이고, 후자
에 강조점을 두면 국민주의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자
기 민족.민중의 이해관계나 타 민족.민중의 이해관계보다 상위에 위치하
는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대내적으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이기주의이고, 대외적으로는 편협한 자
국민-이기주의이다. 그리고 이처럼 매우 이기주의적이기 때문에 반인륜적
인 인종주의와도 친화성을 가진다.
서구에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e)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것을 말
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국민-(이기)주의 또는 국가-(이기)주의이
다. “일어나라 코리아” 같은 것이다. 그것의 극단적 형태가 대내적으로
수구적이고 대외적으로 배타적인 특성을 지니는 국수주의이다.
서구에서는 “민족주의”(nationisme)가 국민주의 및 국수주의와 심하게 혼
동되고 있으며 그래서 구별없이 내셔널리즘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에서는 민족(nation)의 형성이 국민-국가(nation-state)의 출현과 밀
접히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특수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은 하나여도 국가와 국민은 남과 북으로 둘이
존재한다. 그리고 국민국가가 민족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실적으로는 오히려 분단으로 인해 분열이 고착화되고 있다) 그 두 개의
국민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서부터 하나의 민족이 존재해 오고 있었다.
{편집자 주}
수많은 평론가들의 말에 의하면, 민족은 이제 폐기처분될 낡은 구조물일 따름
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것의 “초월”을 가속화해야 마땅한 폐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때때로 “포퓨리즘”(populisme)*으로 명명(命名)되기도 하
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e)이라는 무서운 것이 닥쳐온다고 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초월해야 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
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그 대답들이란 대체로 세계화에 대한 변호로, 또는 그
세계화라는 것의 변종인 “민중 없는 유럽”–주인인 민중은 존재가 없는 반면에
유럽-중앙은행이라는 진짜 정부만을 가지고 있는–에 대한 변호로 요약된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것은 숫처녀나 숫총각처럼 참신한 개념이다. 그리고 여
전히 그처럼 때묻지 않은 신선함을 간직하고 있다. 민족–그것은 민주주의가 이
루어지는 공간이며, 연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시장의 법칙’에 맞서는 ‘민
중의 저항’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진정한 국제협력을 위
한 토대이기도 하다.
베르나르 까상(Bernard Cassen)(<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기자)
* 포퓨리즘(populisme)이란 직역하면 민중주의 또는 인민주의이다.
그러면 피플(영어로 people, 불어로는 peuple)은 내이션(nation)과 어떻
게 다른가? 프랑스에서는 내이션과 피플은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격히 구
분하자면 피플이 같은 인종이나 종족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비해
서, 내이션은 종종 기원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피플 집단들이 언어, 종
교, 문화, 제도 등을 같이 하여 하나의 큰 정치집단을 이룰 때 이를 지칭
한다.
한편 이 피플–우리나라 말로 사전적(辭典的)으로 번역할 때에는 민중 또
는 인민이라고 표현되는데–은 때때로 비특권 대중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우리의 민중에 가깝다) 대체로는 자본가계급과 기층민중을 총
망라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서구에서 ‘인민전선’ (people’s front)이
라고 하는 것이나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고 할 때의 ‘인민’은 이 후
자의 의미이다. 이처럼 서구에서는 ‘인민’이라는 말은 오히려 매우 우경
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인민’
이라는 용어는 매우 좌경적인 용어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피플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민중 개념–‘민중’은 민족의 실체로서
민족 구성원 가운데서 비특권, 피지배적 지위에 있는 절대다수의 대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계급적 기준만을 적용해서 민중을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으로 구성되는 기층민중에게만 한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중운동
내의 일부에서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무계급적으로, 자본가와 노동
자를 총망라하는(물론 반동적인 독점자본 분파는 빼고) 개념도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민중’ 개념은 오히려 ‘국민’ 개념이나 서구의 ‘인민’
개념에 가깝다. 우리의 민중 개념은 ‘국민’과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계급
연합’의 의미만도 아니다. 즉 기층민중만도 아니고 인민(서구에서 쓰여지
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우리의 민중 개념은 2차대전 이후 신식민주의 지
배 하에서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중첩된 현실로부터 생겨난 것이
다. 그리고 이에서 나아가 “구조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가 아니라, “주
체-구성적으로” 대중을 인식하는 즉 실천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이다. 그래
서 여성도 포함되고 장애인도 포함된다–과는 그 뜻이 상당히 다르다.
이는 서구에서 내셔널리즘(국민주의 또는 국가주의)이라고 하는 것과 우
리가 쓰는 민족주의라는 것의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
다. 이처럼 서구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그대로 수입해서 쓰는 방법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다. 우리 운동을 실천적으로 인도
할 수는 더구나 없다.
“나냐, 혼란이냐!” 이것은 드골이 한 말이다. 가짜(사이비) 양자택일을 강요
하고 있는, 이 정치가적인 책략은 그가 활약하던 시절에도 이미 그 정도가 조금
은 심했다. 하지만 드골의 이 말은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혼란을 수습할
적임자로 자신을 선택하라는 주장을 웅변적으로 강조하는 : 역주) 하나의 수사
법(修辭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꾸며낸 드골의 인격과 개성이 짙게 배어 있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이 말은 [오만하다고 비쳐지기보다 오히려] 드골에게 위풍
당당함을 부여해 주었다. 그래서 드골의 이 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추억거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왕”일 뿐 아니라 거의 “하느님”이 되어 있는 ‘시장’, 그 시장의 전도
사들–그것도 성인군자인 체하는 사이비 사도(使徒)들인 위선자들–이 영위하고
있는 ‘속임수 승부'(jeu de des pipes : 주사위에 납을 넣어 승부를 조작하는
주사위 노름 : 역주)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은, 드골의 수사법에 대해서처럼, 나의 추억거리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장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째서 왕이기를 넘어서 거의 하느님에 가깝다고
보는고 하니, 시장에서는 “경제상의 인력의 법칙”(자연현상에서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사람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 필연적이고 숙명
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을 뜻한다. 초국적-자본의 이윤추구 활동, 보다 구체적으
로는 ‘세계화’를 비유적으로 그같이 말하고 있다 : 역주), 따라서 “하늘나라의
역학”–이 역학은 ‘세계화’이거나 아니면 ‘무'(無)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는 이미 “세계화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첫째 명제로>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는 천사들의 움직임 즉 ‘하늘나
라의 역학’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어떤 곳이 하늘나라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하
늘나라의 역학’ 이외의 다른 것은 그것과 함께 존재할 수가 없다. <둘째 명제로
> 그런데 시장에는 “인간이 어찌 해 볼 수 없는 역학”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그
역학은 ‘하늘나라의 역학’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시장에는 ‘하늘나라의 역학’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시장은 하늘나라이다. <셋째 명제로> 이와같이 시장은 하늘
나라이며, 하늘나라에는 ‘하늘나라의 역학’ 이외의 다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므
로, 시장에는 이미 세계화라는 [신성한] 역학–자본의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
는 이상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은 이것과 함께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시장이
라는 곳에서의 양자택일식 선택은 “세계화냐, 무냐!” 이다. 요컨대 선택의 여지
가 없는 것이다 : 역주)
*주) {{이 삼단논법은 알랭 맹크(Alain Minc)가 지은 평론 ‘흐뭇한 세계화'(La Mondialisation
heureuse), 플롱(Plon) 사, 파리, 1997년.에서 사용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책략의] 이보다 좀 덜 결정적인 판
(版)으로서, 날씨 좋은 날을 택할지 우박오는 날을 택할지를 고르라는 것이 있
다. 그런데 이런 식의 양자택일에 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선택의 여지(있으나
마나 한 선택의 여지! 누가 우박 오는 날을 택할 것인가? : 역주)를 ‘열려진 선
택’이라고 던져주면서, 이 명제(양자택일이라는 형식으로 그 중 하나를 강요하
는, 책략적인 명제 : 역자)는 지금 “세계화냐 내셔널리즘이냐”라는 것으로 되고
있다. 이리하여 프랑스라는 나라가 “이성의 써클”의 멤버들(지식인들을 말한다
: 역주)이라고 셈해주는 사람들 모두의 입에서 “내셔널리즘”이라는 욕설이 풀어
놓아지고, 유포되었다.
이렇게 되는 데 있어서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계화라는
것이 고작 인터넷으로 국한된다는 것(자본은 급속하게 세계화되지만 보통 사람
들은 고작 해야 인터넷을 통해 서로 접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 : 역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전형적으로 프랑스적인 놀이(핵심에서 벗어나게 문제를 제기하고서
열을 올려 논쟁하는 것 : 역주) 하나가 나타나게 된다. 영국 사람들이나 독일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질문을 [자기가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제기하지 않는다.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민족 만세!”*주)라는 함성–이 함성은 1792년 10월 20일 프랑스 대혁명 전쟁
의 제일 첫 번째 대전투가 벌어졌던 당시에, 그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인 빌미
(Valmy)에서, 이 도시의 군인-시민들이 프러시아군(반동적이면서 당시 최강이던
: 역주)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외친 구호이다–을 되살
려서 책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브 라꼬스뜨(Yves Lacoste)
는 그가 하나의 “지정학적 개념”–영토, 언어 및 권력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개
념인 만큼–이라고 부르는 것 즉 ‘민족 개념’의 운명을 분석하고 있다.
*주) {{이브 라꼬스뜨(Yves Lacoste)의 ‘민족 만세. 어떤 지정학적 개념의 운명’ (Vive la nation.
Destin d’une idee geopolitique), 페이야르(Fayard) 사, 파리, 1997, 140 F.를 참조.}}
그는 프랑스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해외로부터 들어온 이주민들을 공동체
의 일원으로 통합해 내는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개념
을 국민전선에 내맡겨 버리는 위험이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애쓰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금 오로지 르팽의 국민전선만이 민족에 대해 언급
하고 있는데, 이 국민전선은 이주민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무기로 삼고자 이 개념을 사용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자신의 출신(인종적으로나 지역적으로 : 역주)이 이유가 되어 민
족 구성원에 포함되지 못하게 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정체성”이라는
배후지–이같은 “정체성이라는 배후지는 프랑스 국적을 하나의 행정-상품으로
떨어뜨린다.(국적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표시가 아니라, 국가와 행정-서비스
수급계약을 맺었다는 표시로 된다 : 역주) 또 이러저러한 운동단체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이슬람 소수집단 내지 아랍 소수집단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인정
하라고 요구하도록 유도한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로 몰고 갈 수 있다. 르
팽-인종주의 테제(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 : 역주)의 확산으로 말하
면 그 전형적인 모습–이 점을 딱 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에 해당되는
데, 이 르팽-인종주의 테제가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프랑스 정치판에서는 유일
하게 “내셔널리즘”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제반 사정들의 결과로서 오늘날의 프랑스에서는 내셔널리즘
(nationalisme)은 내이션(nation) 즉 민족이라는 것과 합쳐져 있지 않다.(오히
려 인종과 합쳐져 있다 : 역주) 내셔널리즘은 “민족 문제”를 구실로 삼아서 집
권당을 공격하고, 그 집권당 대신 자신이 권좌에 오르고자 하고 있다. 그러기에
모리스 아귀롱(Maurice Agulhon) 들–영국의 격언이 이것을 “옳든 그르든 우리나라”라고 요약하고 있는–에 대해
반대할 수 있었다.
이 격언은 민족을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의 최 상위에 올려놓는다. 즉
민족을 “공화파적 애국주의”(공화파란 19세기 프랑스 정치에서 주로 중소 부르
조아 및 쁘띠부르조아 계급을 대변하면서 군주제에 반대하고 입헌공화제를 주장
한 정파로서, 공화파적 애국주의란 대내적으로는 노동자 계급보다 자본가 계급
편으로 기울어지면서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국가 이기주의로 또는 제국주의에 대
한 지지로 나아갔던 정치적 조류를 말한다 : 역주)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그런
데 이 공화파적 애국주의는 이 가치관(국가주의적인 : 역주)을 민족의 상위에다
올려놓는다. (이렇게 하여 민족과 국가는 그 위치가 전도된다. 그리하여 민족
주의 즉 내이셔니즘[nationisme]은 국가주의 또는 국민주의 즉 내셔널리즘
[nationalisme]으로 된다. : 역주)
내셔널리즘에 대한 최근의 초(超)-격하(민족주의와 국민주의를 혼동하는 것과
국민주의나 국가주의를 모조리 국수주의라고 매도하는 것 : 역주)에 대해, 그리
고 그것을 악마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자문(自問)하면서 삐에르-앙드레 타기예
프(Pierre-Andre Taguieff) 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이러한 초-격하
와 악마화는 모든 형태의 집단적(민족적, 계급적, 계층적 등 : 역주) 정체성에
대해 부당하게 마구 확대되고 있다 라고. 또 [초-격하와 악마화의] 이러한 무
원칙한 확대는 민족에 대해서 특히 심하다 라고. 그리고 마치 ‘반(反)-내셔널리
즘'(anti-nationalisme)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들은 실은 단지 ‘반-민족주
의'(anti-nationisme)에 불과하다 라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족적’ 또는 ‘국민적’인 것은 언론에 등장하는 평론가들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유행이 아니다. 언론을 타는 이 평론가들은, 국경 없는 지구촌 사회의 도
처에 널려 있는 자신의 일당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은 또 ‘여러 지역
(군구[軍區])으로 구성된 하나의 유럽’이라는 교의를 선전하는 이론가들로부터
도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단 하나–시장의 민
주주의뿐이다.”*주)
*주) {{삐에르-앙드레 따기예프(Pierre-Andres Taguieff)의 “국민전선”(Du Front national), ‘르 방
깨'(Le Banquet), 제10호, 1997년 상반기, 파리.를 참조. 이러한 개념은 ‘반-인종주의의 종말'(Les Fins d e
l’antiracisme), 미샤롱(Michalon) 사, 파리, 1995년.에서 이미 전개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이태리 북부동맹(이태리 안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인 북
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정파이다 : 역주)의 이론가인 지앙프랑코 미글리
오(Gianfranco Miglio)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네이션)은 존재하
지 않는다…. 유럽 통일은 공통의 이해관계에 의해 상호 결속되어져 있는 대-
지역들(이태리에서 북부지역과 독일에서 서독지역과 같은 것들 : 역주) 사이에
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망목표로 해야만 그 실현을 기약할 수 있다.” 라고.(이렇
게 되면 부유한 지역들이 하나로 뭉친 통일-유럽이 등장하고, 유럽 내의 그 밖
의 지역들은 이 통일-유럽의 내부 식민지로 될 것이다. 마치 오늘날 서독에 흡
수통합된 동독 지역이 그러하듯이 : 역주)
합(合)이 마이너스인 노름*
* 돈을 잃었다는 금액과 돈을 땄다는 금액을 합산하면 잃었다는 금액이 항상 더
많게 마련인 고스톱 판처럼.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엠마뉴엘 토드(Emmanuel 로하고 있다.*주) 이렇게 [경제에 관한] 환상을 폭로하면서 그는 민족이라는 집
단에 대해 신뢰하기를 거부하는 [현재의] 흐름 속에서 외관상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현상들–유럽주의, 세계주의, 분권화. 다(多)문화주의–사이에 연
결끈(사상적 연관성.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미궁의 길을 인도하는 실 : 역
주)이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즉 “80년대에 출현하여 서구사회 상류층들의 상상
력을 지배하고 있는, 극단적 자유주의(ultraliberalism)와 유럽주의
(europeisme)는 둘다 공히 민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며, 나아가
집단이라는 것을 더 이상 진실로 존재하고 있을 법한 실체로서 규정 [또는 인
정]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개인만이 실재[實在]하며 집단은 허구
나 가상[假象]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만이 신뢰할 수 있으며 집단은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 역주)
*주) {{엠마뉴엘 토드(Emmanuel Todd), ‘경제적 환상. 개발된 사회들의 정체(停滯)에 관한 평
론'(L’Illusion economique. Essai sur la stagnation des societes developpees), 갈리마르(Gallim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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