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와 석유회사들의 정략결혼

데이비드 바쿤(David Bacon)

6월 15일, 장군 사니 아바차(Sani Abacha)가 죽은지 일주일 후, 나이지리아를

지배하게 된 새 장군은 아홉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프랭크 코코리(Frank

Kokori)와 밀턴 다비비(Milton Dabibi)가 석방될 때까지 그들의 감금은 전세계

적으로 노조 탄압의 상징이 되어왔다. 나이지리아의 민중운동 진영은 그들의 석

방을 기뻐하며 전세계 노조활동가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석유노조 지도자인 다비비와 코코리는 나이지리아가 여전

히 자유롭지 않음을 처음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장기 구금은 인구밀도가

높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아프리카 국가의 정책뿐 아니라 미국의 정책에 석유가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연이은 쿠데타 이후, 그들은 땅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석유를 거대한 유

조선에 싣고 뉴저지와 텍사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정유소로 운반했다. 해마다

120억달러 상당의 석유가 퍼올려지고 그중 40% 이상이 미국으로 운반된다.

석유가 미국으로 운반됨과 동시에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 역시 미국의 몫이

된다. 그중 많은 부분이 장군의 외국은행 계좌로 들어가는 반면, 그들의 몫은

본국송환 이윤과 부채상환으로 줄어들게 된다. IMF(국제통화기금)에 의한 구조

조정 하에서, 나이지리아 전체 국고세입의 약 30% 가 300억불에 달하는 외채상

환에 사용된다. 즉, 수입의 많은 부분이 외국은행, 특히 미국은행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958년 이후부터 로열 더취 셸(Royal Dutch Shell)는 니제르 강 삼각지에서

얻어지는 석유로 300억불을 벌여들였다. 반면 삼각주에 사는 대부분의 오고니

부족들은 수도, 전기, 병원, 도로는 물론 학교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군부통치자들의 배후에는 다섯 개의 거대 기업들이 있다 – 셸(Shell), 이탈리

아의 AGIP, 프랑스의 엘프(Elf-Aquitaine), 미국의 거대기업 셰브론(Chevron)과

모빌(Mobil)이 있다. 그들은 나이지리아석유공사(Nigeria National Petroleum

Company, NNPC)와 수입을 반씩 나누어 가졌다. 석유공사는 외국회사들과 나이지

리아의 석유 채굴권을 함께 운영하기 위해 정부에 의해 세워졌다. 이 회사는

1994년에 정권을 잡은 군부 독재자이자 억만장자인 사니 아바차에 의해 운영된

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그의 군은 백만장자들과 결탁하고 있다.

1994년 석유와 관련된 부정사례를 조사했던 퇴역장군 엠마누엘 아비소예

(Emmanuel Abisoye)은 “석유공사 경영방식의 불문법은 모두는 각자를 위해, 하

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볕이 날 때 건초를 말려라, 그리고 약탈가능한 모든

것을 약탈하라 등의 내용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6월 8일, 아바차의 죽음은 스위스 은행 계좌의 수백만 달러와 정치적 탄압과

폭력만을 남겨 두었다. 국방장관이자 동료인 압둘살람 아부바카르(Abdulsalam

abubakar)는 군사정권의 세심한 선택을 통해 후계자가 되었다. 요하네스버그 메

일 앤 가디언(Johannesburg Mail and Guardian)에 따르면 심지어 나이지리아 최

고통치기관인 과도통치회의(Provisional Ruling Council)조차 아부바카르가 군

장성들이 참여한 회의에 들어와 그가 나이지리아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음을

발표할때 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부바카르는 북 나이지리아의 엘리트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후 군과 경찰

을 통솔해 왔다. 그는 미국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에서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은 바 있다. 아부바카르 정권은 아바

차와 마찬가지로 석유수출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석유회사들과의 공조관

계를 그대로 전수받고 있다. 10년전 추방당한 나이지리아자유운동(Free Nigeria

Movement)의 일원인 샌프란시스코 택시기사 리누스 오하(Linus Oha)씨는 “석유

수익금이 없었다면, 지난 28년동안 군부세력이 우리를 통치할 수 없었을 것이

다. 기업들과 우리 정부의 관계는 경유로 인해 축복받은 정략결혼이다”라고 말

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군 독재자들의 지배하에 있었

다. 나이지리아의 지배 엘리트들은 북쪽지방의 하우사(Hausa) 소수민족 출신으

로 그들의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의 통치는 1960년대 후반의 비아프

라(Biafran) 내전을 야기시켰다.

1990년대 초반 당시 독재자인 이브라힘 바반기다(Ibrahim Babangida)는 국민

투표에서 새로운 대중적 압력에 의해 민간정부 선출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93년 6월에 진행된 선거에 의해 부유한 기업가인 모슈드 아비올라(Moshood

Abiola)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바반기다는 정당한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대

신 형식적 인물로 에르네스트 쇼나칸(Ernest Shonakan)을 임명했다.

같은 해 11월, 바반기다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사니 아바차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쇼나칸을 축출하고 모든 민주화 과정을 중지시켰다. 아바차는 군통제하

의 과도통치회의를 만들고 이미 선출된 연방 및 주정부를 없애고 정치활동을 금

지시켰다.

아바차 통치하에서 석유와 관련된 부정부패는 점점 심해졌다. 94년까지 정부

가 운영하는 석유공사(NNPC)는 제휴한 외국 석유기업들에게 약 10억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석유회사들은 부채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고 회사들은 노동

자들을 해고시키기 시작했다.

정치적 탄압과 부패가 심해지자 아비올라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군사정권에

도전할 것을 결정했고, 94년 6월 그는 자신이 합법적 지도자임을 선언했지만 6

월 23일에 체포되어 현재까지 투옥되어 있다. 94년 7월 4일, 석유회사 노동자들

은 그의 석방과 그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나이지리아의 지도자임을 외치며 파업

에 들어갔다.

나이지리아에는 두 개의 석유노동자 노조가 있는데, 하나는, 보다 규모가 큰

NUPENG으로 프랭크 코코리가 이끄는 생산직 노조이고 PENGASSAN은 밀턴 다비비

가 이끌고 있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조이다. 수천명의 조합원을 가진 두 노조

의 힘은 조합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두 노조는 나이지리아 경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인해 그들의 파업은 힘을 실어 주었다. 석유는 서아프리카 국가의 외

화수입의 95%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산업화

된 나라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실상 두 노조는 달러화의 유입을 좌우할 수 있었

다. 코코리는 NUPENG 노조원들의 임금인상을 쟁취하기 위해 실제 그렇게 한 경

험을 가지고 있다.

두 노조는 나이지리아의 가장 큰 산업을 마비시키고 군사 정권의 중요한 외화

수입을 차단시켰다. 석유 노조는 민주정부가 몇몇 장군들의 사리를 채우기보다

국가 경제의 재건을 위해 부패를 청산하고 그들의 직업과 임금을 보호하고 부의

분배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합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업은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 되었다. 일

단 파업이 시작되자 노조 지도자들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이 시작되고 몇

주간 그들은 파업을 지도하기 위해 여기저기 숨어다녔고, 군지도자들은 그들을

찾기 위해 라고스(Lagos)의 본부와 지역 사무실을 수색하고 있었다.

파업은 나이지리아 산업을 마비시켰다. 공장들은 문은 닫고 정부는 하루에 석

유수익금의 3400만 달러를 손해보았다. 공공 노동자들은 연대파업을 벌였다. 나

이지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학생들은 도로를 차단하고 바리케이트를 세웠고, 군

대는 이를 야만적으로 해산시켰다. 석유의 부족으로 발전기와 발전소는 작동을

중단했고, 정전이 많아졌다. 비행기들은 연료를 보급하지 못해 운행을 중단했

고, 항공사 직원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친정부적인 나이지리아노동자회의(Nigerian Labour Congress)는 몇주간 애매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총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

었다. 나이지리아노동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하루만에 파업이 취소되었지만 많

은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탈리아의 AGIP와 프랑스의 엘프사의 생산량은 60%로 줄었고 각국 본토에 있

던 두 회사에 파업 노동자들은 효과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셸(Shell)사

는 평균생산을 유지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 있는 셰브론(Chevron) 사와 뉴욕

의 모빌(Mobil)사는 다른 방침을 취했다. 두 회사는 지속적으로 석유를 들여오

기 위해 파업파괴자들을 투입했고 대부분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유전

에서 120%에 달하는 석유를 채굴해 갔다. 이 회사들은 파업으로 인해 뜻밖의 횡

재를 했고, 석유의 부족으로 인해 유가는 배럴당 14달러에서 20달러로 인상되었

다.

이로 인해 그 회사들은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받았고 파업의 충격으로 흔들리

기 시작했던 아바차 정권을 구했다. 8월 17일 아바차의 과도통치회의에서 군장

성들은 그에게 아비올라를 석방하고 분쟁을 종식시킬 것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지배군벌들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아바차는 군으로 하여금 모든 노조사

무실뿐 아니라 노동자회의까지도 감시하도록 했다.

파업파괴자들로 인해 생긴 석유수입은 파업을 진압하는데 쓰여졌다. 다비비의

말에 의하면 군대가 회사의 요청에 따라 사무실을 점거했다. 석유노동자들은 파

업파괴자들의 배신행위에 대해 분노했고, 그들중 일부는 회사들이 보상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NUPENG의 대표 와리에비 아가메네(Wariebi Agamene)는 “우

리는 다른 나라들의 모든 시민들에게 호소할 기휘를 원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벌어질 사태에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화 과정을 저해하는 사람과

우리의 석유를 한도없이 훔쳐가는 비합법적 정부와 결탁한 사람들을 감시하는

우리의 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비비는 파업은 “석유사업을 구하고 붕괴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애국적 투

쟁이며, 경제적 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민주화와 책임있는 정부를 위한 정

치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8월 19일 오전 10시, 다비비는 친구의 함정에 빠져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다른 지도자들 역시 잡혀들어갔다. 얼마후 노동자들은 군의 협박과 6주간 임금

을 받지 못해 강제로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다비비는 95년 11월 미국 뉴욕시의 노동총동맹(AFL-CIO) 총회에 참가하여, 도

움을 요청한 후 96년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곧바로 투옥되었다.

95년 가을, 극작가이자 환경활동가인 켄 사로 위와(Ken Saro Wiwa)와 8명의

동료들이 사형되었다. 사로 위와는 오고니민족생존운동(Movement for the

Survival of the Ogoni People, MOSOP)을 일으킨 사람으로 셸(Shell)사의 유전

으로 인해 오염된 니제르 강 삼각주지역을 정화시키고 석유수입의 일부를 가난

에 찌든 오고니족을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 지역에서 2천배럴 이상의

석유유출이 있었고 2백만 배럴의 석유가 오고니족의 농지에 흘러들었다. 사로

위바의 사형집행 연루로 인해 셸(Shell)사는 국제적 제재운동의 타켓이 되었다.

나이지리아 석유노동자 탄압으로 어지러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몇 년동안 군

인들은 민주화를 위한 캠페인(Campaign for Democracy) 지도자인 베코 란소메

쿠티를 포함하여 수십명의 정치지도자와 인권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아바차

는 그가 쿠데타 음모를 포착했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이 군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믿었다. 23명의 군인들이 체포되었고, 비밀에 부쳐졌고, 그

들중 퇴역장군인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는 나이지리아 역사상

자발적으로 민간 정부로 권력을 이양한 유일한 사람이다.

코코리와 다비비의 투옥은 전세계적인 석유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96년 석유, 화학, 원자력 노동조합(Oil, Chemical, Automic Workers, OCAW)의

전국 총회에서 그들의 석방과 민주화를 위해 보이코트을 결의했다. 같은 해 국

제노동기구(ILO)는 코코리와 다비비 투옥 사건과 나이지리아의 또다른 노조 탄

압 사건들을 조사하기 위해 회원국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조치로 조사

위원회를 발족했다.

OCAW와 ICEM(국제화학노련)는 석유회사의 주주총회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해

봄 5월 15일, 두 국제기구는 모빌(Mobil)사의 매년 열리는 정치총회에 결의문을

제출했다. 이는 프랭클린 연구소(Franklin Research)와 발전재단(Development

Corporation), 서비스노동자국제노조(the 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 학술고문단(Master Trust), 그리고 뉴욕연금기금(New York City’s

pension funds)에 의해 제출되었고, 모빌사가 나이지리아와 같은 국가에 투자하

는 것을 재고하도록 요구했다.

모슈드 아비올라의 딸 하프삿(Hafsat)은 모빌(Mobil) 사의 주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96년 남편의 석방을 위한 캠페인을 하는 동안 암살되었

고, 아바차 정권에 저항하여 싸운 그녀를 추모하며 지난해 나이지리아의 유엔

사무소 앞 거리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의 딸은 석유로 벌어들인 돈이 자기어머니를 죽인 무기들을 사는데 쓰여

졌다고 말했고, 코코리의 딸 코르델리아(Cordelia)는 주주들에게 “나이지리아

정부는 석유를 먹고 숨쉬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활동가들 역시 나이지리아의 군장성들과

회사들의 재산증식을 막고 미국이 나이지리아에 지불해야할 석유값을 받기 위해

보이코트를 요구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대상은 아메리카 은행(Bank of America)

과 시티뱅크(Citibank)로 그들은 각각 셰브론(Chevron)과 모빌(Mobil)사의 주

거래은행이다.

이와같은 제재조치에 직면하여, 클린턴 행정부는 “건설적 합의(constructive

agreement)” 정책을 지지해왔다. 이것은 레이건이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

대하는 국제적 보이코트를 저지하기 위한 악명높은 계획에 붙인 이름이다.

국무부(State Department)는 나이지리아 정부의 인권침해에 대해 비난하고 있

다. 95년, 나이지리아 정부가 마약밀매에 군사적으로 공모한 사실을 둘러싸고

압력이 가해졌고, 미 행정부는 군사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코코리와 다

비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석방되었을때에 행정부는 모든 나이지리아인들을

도와 확실하고 개방적인 민간민주정부 이양을 위해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나이지리아의 석유는 한없이 채굴되었으며 이는 인권보다는 미국

회사의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건설적 합의는 “미국의

이념에 대한 모욕이며 나이지리아 민중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초봄에 아바차는 “민주주의로의 이양”을 선언했다. 나이지리아의 다섯 정당은

모두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8월 1일 선거에서 군 출신의 아바차는 나이

지리아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후 나이지리아의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인 시민자유기구(Civil Liverties Organization, CLO)는

이를 어리석은 짓이라 말하며 그의 뒤를 이은 아부바카르 장군을 비판했다. CLO

의 성명서에는 “많은 나이지리아인들, 특히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단체들

은 아부바카 장군의 임명과 아바차 장군의 기만적이고 거부된 이양 프로그램과

함께 하려는 그의 의도 모두를 거부할 것이다. 묘지의 고요함을 가능한 진보의

의미있는 계획과정의 평화와 안정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시민자유

기구는 민족단결의 정부를 요구했다.

1월 12일, 권력을 잡은지 하루만에 아부바카는 93년 5월 선거를 기리는 거리

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경포탄을 쏘고 군중을 향해

최루탄을 난사했다.

같은날, 추방된 극작가인 월레 소니카(Wole Sonika)는 국제사회에 똑같은 실

수를 다시 반복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이 변화는 ‘확실히 가능하다’고 주장했

다. “군이 원하는 것은 새롭게 국가의 정치적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만들기 위

한 시간을 버는 것이다. 나이지리아인들에게 새로운 권력이라는 것으로 인해 실

제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끝이 없는 바닥이다”

이와 같은 비난에 직면한 아부바카르는 정치범 석방으로 다소 숨통이 트인 셈

이다. 나이지리아 내외의 몇몇 단체들은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 환영한다.

ICEM 사무총장 빅 토프(Vic Thorpe)씨는 이번 석방을 나이지리아 노동조합의

자유를 향한 위대한 첫걸음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군이 아직 실

제적으로 두 노조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지 않음을 언급했다. 석방후 집으로 돌

아간 코코리는 “우리는 이 나라가 완벽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나이지리아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이룩할 것이다. 나이지리아 민중들은

현재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다. 결코 다시는 독재자들이 우리는 지

배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한다.

16명의 언론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정치범들이 아직 감옥에 남아있다. 추방된

나이지리아인들의 민주화를 위한 기구 나이지리아자유운동(Free Nigerian

Movement)의 대표 툰데 오코로두두(Tunde Okorodudu)는 연설에서 아부바카의 이

번 조치는 형식적인 석방일 뿐이며 자신의 권력을 공공히 하고 합법성을 부여하

고 지지를 얻기위한 전술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전 군독재자들 역시 권력

초기 정치범들을 석방했음을 말하며 이번 석방과 아비올라의 복권은 단지 국가

적 화해의 손길이라 말한다.

OCAW 부대표 캘빈 무어(Calvin Moore)는 “실제적 문제는 그들의 이익이 보장

되어야 하며, 미국의 정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판단할 것이다. 석유회사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이지리아 민중들을 위한 것인가?”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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