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제 : 냉전체제하 양민학사의 실상

-대만 50년대의 백색테러-

임서양 (대만대표단 단장)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북으로 천도한 국민당 정부는 49년 5월 21일 군사

계엄령(87년까지 지속)을 발포했다. 그해 말부터 위험분자로 간주된 이들에

대해 대량체포가 개시되었다.

내전을 반대하고 국공 평화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

선하라는 주장이나 언론은 무조건 공산당 간첩, 파괴분자, 음모분자로 간주

되었다.

한국전쟁이후 미국이 대북의 국민정부를 전면 지지하게 되자, 국민당 정부

는 절호의 기회를 틈타 50년 하반기부터 대규모의 ‘붉은분자 색출, 숙청’이

라는 백색테러를 감행했다. 아직까지 국민당 정부가 정식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대략 10년 동안 체포된 인원이 8만에서 10만을 헤아리고 그

가운데 사망자는 5천에서 8천명에 이른다.

체포되어 취조, 심판, 집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법절차는 무시됐으며, 징

역형 정도에 해당하는 이들이 사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러계통

의 특무기구는 상호경쟁속에서도 “백명을 잘못 구속하는 일이 있더라도 잡

아야 될 한 명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공동의 구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실상을 살펴보면,

1. 취조는 무기한으로 허용되고 잔혹행위는 일반적이었다.

2. 군법회의로 이송되면 처음에는 기소장도 없었고, 변호사나 방청객도 없

었다. 때로 판결문도 없었다. 상소는 불가능했고, 사형도 1심에서 확정되어

즉각 집행되었다.

3.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형기가 만료되어도 계속 감옥에 구금당했고,

보증인이 없으면 형기가 만료되도 석방되지 않았다.

4. 석방 후에도 엄격한 감시, 통제하에서 정기적으로 군경기관에 근황을 보

고해야 했으며, 원거리 시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5. 석방 후에도 정식으로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

다.

마수아(대만지구 정치수난인호조회 부녀대표)

50년대 백색테러에서 정치범에 대한 체포와 심판은 완벽하게 비밀리에 실

시되었다. 여성 수난자가 전체 수난자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적지만, 2

백여 명 정도의 여성이 정치범으로 구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 정치수난자들은 보통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는데, 수

사관들은 수난자들의 수면과 휴식을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혼미한 상태에서

미리 작성된 사건 정황에 따라 날인을 하도록 강요했다.

한 여선생은 학생들의 명단을 말할 것을 요구받으면서 고문을 당했다. 수

사관들은 바늘로 손발톱 끝을 찌르는 고문을 한달 가량 지속했으며, 그녀

앞에서 남편이 각혈할 때까지 형구로 구타했다.

심지어 구리솔로 음부를 찌르고 바늘로 유두를 찌르는 등 상상할 수 없는

형구를 사용했다. 결국 이 선생은 처형당했고, 남편은 ‘알고도 신고하지 않

은 죄’로 7년형에 처해졌다.

출감 후의 생활은 ‘조그만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모든

정치범이 출소한 뒤 반드시 관할지역 경찰 또는 정보부서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정치범은 비교적 형기가 길기 때문에 출소 후 나이가 많은데다 수감

되었던 경력으로 인해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거주지, 직장을 가

리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감시 때문에 출옥 후의 양심범들은 크나

큰 상처와 곤경에 빠지게된다.

대만의 백색테러는 끝나지 않았다. 1949년 5월 20일 계엄령 실시 이후, 근

40년 만인 87년 7월 15일 계엄령이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일부 법령이 수

정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대만과 대륙이 계속 분열된 상태로 대립하고 있

는 상황에서 그 잠재적인 행위는 지속되고 있다.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양조훈 (제밀일보 전편집국장)

제주 4·3의 도화선은 47년 3·1절 시위에서의 발포사건이었다. 이후 제주

도에서는 3월 10일부터 민관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고, 미군정은 본

토에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

다.

경찰과 서청 단원들은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

게 연행·투옥·고문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4·3 발발 직전까지 1

년간 2천5백명이 구금되었으며, 48년 3월 모슬포 등지에서 잇따라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는 등 긴장은 계속되었다.

48년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남로당 제주도 조직은 4월

3일 ‘단선 반대’의 슬로건을 내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5월 10일 전국에

서 일제히 실시된 총선 결과, 제주도의 2개 선거구에서 과반수 미달의 보

이코트로 선거가무효 처리됨으로써 제주도는 남한 내에서 유일하게 단독선

거 거부지역이 되었다.

이렇게 5·10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 병력과 함께 응원경찰대도 크게 증강

됐다. 48년 10월 17일 토벌대는 해안선에서 5Km이상 떨어진 지대를 통행

하는 자에 대해 전원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제주도에서는 해안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들이 이에 해당되

는데, 들판이든 마을 안이든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겠다는 무시무시

한 작전이었다.

가장 참혹한 희생은 48년 11월부터 약 5개월간 집중되었다. 토벌군은 게릴

라들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1백여 곳의 중산간 마을

을 모두 불태웠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三

盡)작전은 한라산 기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49년 1월 17일 해변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두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흥분한 군인들이 마을의 온 가옥에 불을 붙

이고 남녀노소 약 300명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은 이튿날 대대

본부로 주민을 집결시켰으며, 그 가운데 1백명 가까운 사람들이 ‘빨갱이

색출작전’에 휘말려 총살됐다.

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

의 남자들을 총살했으며, 젊고 얼굴이 고운 여자들을 불러내 성폭행한 뒤

총살했다.

토벌대는 또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그 부

모·형제를 대신 학살했다. 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된 가시리 주민

76명은 호적을 일일이 대조당한 뒤 집단 학살됐다.

48년 제주도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다. 희생자의 숫자는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3

만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당시 섬주민을 25만명으로 본다면 8명 중 1명이

희생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쟁 중에는 적군과의 교전 중이더라도 상대방이 전투를 계속할

능력이 없을 때는 함부로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기본 철칙마저 완전히 상

실되고 있었다.

초토화작전의 실행 배후에는 미군이 도사리고 있다. 4·3 발발 직후 제9연

대장이었던 김익렬 장군은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폭동을 신

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또 제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 씨는 “CIC 소령이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

했다.

– 여순사건의 회고 –

김계유(사학자)

48년 10월 19일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미리 반란을 준비

중이던 신월리 14연대는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령하고 3개 대대 병력을 장

악한 뒤 20일 새벽 여수 시내를 장악했다.

이어 21일 여수군청을 비롯해 시내 금융기관과 중요기관의 사무를 인계받

았으며, 23일에는 우익진영의 주요인사 14명을 처형하는 등 88명의 경찰과

민간인을 처형했다. 그러나 14연대는 25일 국군의 대규모 공격을 피해 지

리산으로 입산했다.

26일 무차별 공격과 함께 시내로 진입한 진압군은 4곳의 수용소로 시민들

을 끌어모았다. 이로부터 3일간, 반란에서 살아남은 경찰관과 우익진영 요

인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처형대상을 골라냈다. 그들이 사람들의 얼굴

을 훑고 다니다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바로 뒷뜰로 끌려가 즉결

처분되는 광경이 목격됐다.

28일부터는 40세 미만의 남자들을 모두 종산국민학교에 수용하고 반란 가

담여부를 가리기 시작했다. 대상자는 약 5백명 가량이었는데, 근 보름동안

진행된 가담자 색출작업은 천인공노할 인간 도살이었다.

쌀쌀한 초겨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알몸으로

종일 학교 마당에 앉혀 놓았으며, 한사람씩 조사실로 불러들여 장작으로

매타작을 하면서 억지자백을 받아냈다.

장작개비에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마치 동물의 마지막을 알리듯 울부짖음

을 토하거나 생똥을 싸면서 까무라쳤다. 누구는 매질이 무서워 자백을 하

고 또 누구는 삶 자체가 싫어져 그저 자백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해서 4개 수용소에서 즉결처분된 사람과 종산국민학교에서 처형된

사람의 인원수가 당시 계엄사령부의 발표에 의하면 여수 1천2백명, 순천 1

천1백34명에 달했다.

1998년 8월 28일 금요일 제11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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