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
우리는 직업엔 귀천이 없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사는 사람은 그
리 흔하지 않다.
나는 미군범죄 신고센터 일을 하면서 인간의 고유한 권리가 동등하게 존중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인권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이중 삼중
의 색깔로 그 ‘값’이 다르게 매겨졌다.
2년전 모대학에서 청강할 기회가 있었다. 특강이었는데 주제는 ‘매춘여성
의 삶’이었다. 그런데 초청된 강사가 매매춘 현장의 목소리를 마구 부풀리
고 거짓되게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기지촌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나로
서는 강사가 소개한 여성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현장에 어두운 학생들은 그 강의를 들으며 매춘여성들은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지울 수 없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용기 내어 그 과목 선
생님께 상의하였다. 강의의 문제점을 말하고 조정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유진씨의 말이 맞고 강사가 거짓말 한 것을 압니다.
하지만 매춘 현장을 모르는 학생들에겐 충격요법이 될 수 있으니까 괜찮습
니다.”였다. 나는 강사보다 그 선생님에게 더욱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천
시받는 여성들의 인권은 대학생의 교육 효과를 위해 얼마든지 더럽혀져도
좋단 말인가? 강사와 선생님은 매춘여성과 대학생의 인권을 동시에 짓밟은
공범자이다. 나는 그후에도 많은 ‘공범자’를 알게 되었다.
공범자들
국회내에 한미행정협정 개정 특위 구성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만난 적이 있
다. 오키나와에서 초등학생이 미군 3명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화제에 올랐
다. 그러자 모 국회의원이 자연스레 하는 말, 우리나라는 주로 매춘여성이
범죄를 당했기 때문에 미군범죄가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춘여성들
이 당한 문제가 여론화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순간 여러 생각들이 머리속을 어지럽혔다. 먼저 우리나라에서도 초등학생
들이 수차례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오키나와처럼 크게 여론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세기가 넘는 분단과 미군주둔, 반공이데올로기 등과 연관
이 깊다.
두번째 초등학생이 성폭행을 당하면 여론이 시끄럽고 매춘여성이 당하면
여론이 잠잠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누가 감히 인권을 저울질하는가?
초등학생과 매춘여성의 인권은 똑같이 보호될 가치가 있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오키나와에서 강간사건 발생 일주일 전에, 미군과
사귀던 여성이 그 미군에게 해머로 얼굴과 머리를 두들겨 맞아 살해된 끔
찍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미군과
‘교제’한 것이 피해자의 ‘결점’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범
죄를 당해도 별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슷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96년 동두천에서 이기순
씨가 뮤니크 이병에게 목이 잘려 살해되었을 때 경찰은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 “그런 여자들은 이미 그런 것 각오하고 기지촌에 간 것 아니냐, 강원
도에 잠수함 내려왔다, 미군 역할이 절실한 때다. 국가 안보를 생각해야한
다….”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 여성 피해자들은 수사과정에서 폭행,강간 등 사건
자체보다 원래 처녀였는지, 미군과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등의 질문에 시달
린다. 모멸감에 사건을 포기하고 연락을 아예 끊는 사람도 있다.
매춘여성들은 업주와 미군에게 불이익을 당할 우려때문에 신고를 주저한
다. 사건 해결도 의심스럽지만 그보다는 신고함으로써 겪게 될 고통이 더
욱 두렵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축소
그동안 미군범죄 피해자들은 반북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은 ‘안보’라는 공
룡에 눌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특히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멍에까지
지고서 이중의 고통속에 살아왔고 그 역사는 아직 진행중이다.
미군범죄를 얘기하면 그거 기지촌 여자들이 당하는 것 아니냐고 별 것 아
닌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진보적인 생각을 한다는 사람조차도 여
성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미군주둔이라는 중요사안을 여성문제로 축소시
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러한 견해가 오히려 인권문제와 미군주둔 의미를 희석시킨다고 생
각한다. 여성 인권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인간에 대한 구조
적인 폭력문제를 용인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다케시타 사에코(오키나와대학)의 지적처럼 “국가 폭력을 포함 모든 폭력
문제와 평화문제는 결국 현실을 사는 각각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안심하고
살 권리가 보장되는냐 마느냐의 기본적인 인권문제”이고, 살아있는 사람들
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보
탬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월… 윤금이씨 6주기가 다가온다.
그녀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존중받는, 그래서
더욱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따뜻한 곳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998년 10월 8일 목요일 제1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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