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라는 날벼락을 맞아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경제주권을IMF에 넘겨준 지도 1년이 지났다. 길지는 않지만 좌절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30년 이상 지칠 줄 모르고 고도성장에 익숙해진 우리 체질로선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기간이었다. 혹독한 불황과 구조조정의 돌개바람 속에 대마 불사·은행불사 신화들이맥없이 무너지면서 평생직장이니 연공서열이니 하 는 유장한 전통과 질서도 ‘좋았던 시절’ 의 유물쯤으로 전락됐다. 우리 경제를 떠받치는제도와 관행, 그리고 가치관은 사정없이 매도됐다. 패자가 겪어야 하는냉혹하고 서글픈 자기부정의 과정이었다.

IMF시대 1년 동안 우리는 분명히 많은 것을 잃었다. 대기업·중소기업 할 것 없이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연쇄부도로 무너졌고 1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질소득이 대폭 감소했고 1만달러 소득을 되찾는 데 적어도 5년은 걸릴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다. 여기서 만약IMF시대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 경제 또는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지 한 번 상상해 보는 것도 황당한 기분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될지모른다.

한 가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가상해 본다면 기업들은 여전히 무모한덩치 키우기 경쟁에 몰두해 있을 것이고, 근로자들은 어떻게든 적게 일하면서 많 은 보수를 챙기려 머리띠를 더 단단히 조여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치솟는 임금과 폭발하는 노사갈등으로 산업현장은 골병이 들고땅값·집값이 올라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들의 무절제한 과소비는 도를 넘어 세계 만방에 ‘어 글리 코리안’ 의 위세를 떨치고 있을 것이다.

정치권은 정경유착에 탐닉하고 관료집단은 무사안일에 파묻혀 가당찮은 선진국 타령을 늘어놓고 있을 공산이 크다. 은행과 기업은 빈껍데기가 되어 도 개인은 살찌는 도덕적 해이가 치유불능상태로 악화됐을 것이 확실하다.

근거없는 자만과 환상 속에 거품과 비효율은 독버섯처럼 자라고 우리 경제 는 또다른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IMF시대가 당연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한경쟁의 무대 위에 올려진 우리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실감하고우리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 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자리의 소중함도 깨닫게 됐고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제와 절제의 미 덕도 조금씩 발휘하기 시작했다. 양(量)이 전부라는 물신주의 미망에서벗어 나 질(質)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생산성과 효율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형키우기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도 눈을 떴다. 외환위기의 고통 속 에서 얻게 된 작지만 소중한 변화들이다.

IMF의 졸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희망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선진경 제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허구와 위 험으로 가득찬 정치논리에 기대어 위기를 넘겨보려는기회주의는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왕 당하는 고통이라면 미래를 위한 보약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게 IMF시대 1년을 맞아 가져보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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