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999년 벽두에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1999년이 시작되었다. 1999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해일까? 특히 역사적 전

망 속에서 볼 때. 신문들에서는 벌써 21세기, 나아가 2천년대의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1월 1일자 <문화일보>는 “21세기는 ‘인류

단꿈 되찾는 시대’로”라는 제하의 이어령 교수의 특별기고를 싣고 있다. 1월 1

일자 <한국일보>는 ” ‘새 천년 새로운 한국’ 만듭시다”는 제하에서 영국 그리니

치 천문대 옆 템스강 가에 건설 중인 ‘밀레니엄 돔’을 화보로 싣고 있다. 1월 1

일자 <중앙일보>는 영국 켐브리지 대학 존 런 교수와의 전화대담을 ‘밀레니엄

인터뷰’라고 이름 붙여서 싣고 있다.)

물론 1999년은 달력상으로 볼 때에는 여전히 20세기에 속한다. 20세기의 마지

막 해일 뿐이다. 하지만 21세로, 나아가 새로운 천년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위치

한 해이기도 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신년사에서 “21세기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혁명기”라고 하면서 금년을 21세기와 결부지어 말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1999년을 20세기와 서기 1천년대를 마감하고 21세기와 서기 2

천년대로 넘어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20세기는 어떠한 세기였을까? 서기 1천년대는 어떤 시기였을까? 다소 막연하

게 느껴지는 이런 질문을 1999년에는 꼭꼭 되새김질해야 할 것 같다. 올해는 20

세기, 서기 1천년대를 마감하고 새 세기, 새 천년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해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세기, 새 천년대를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난

세기, 지난 천년대를 올바르게 회고하고 반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

제로 한데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대라는 말은 무성하면서도 지난 세기와 지난

천년대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 * *

서기 1천년대의 전 기간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16세기 이후의

5백년 간은 적어도 그 시대적 성격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구 문

명―기독교를 세계관의 기저(基底)로 하는―의 전 지구적 확장의 시기였다고!

그리고 이 서구문명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생활양식

이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그러면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장 과정은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

다 주었는가? 행복인가? 번영인가? 기쁨인가?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이라는 점

을 인정하면서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우리는 그것들이 인류에게 행복보다는 불

행을, 번영보다는 궁핍을, 기쁨보다는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것

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절멸시켰고, 아프리카를 노예사냥터로 만들었으며,

아시아 민중들을 빈곤과 혹자는 이렇게 말할는지 모르겠다. 서구문명과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물질적

향상―현대식의 풍족한 소비생활―을 가져다 주었으며, 전근대적인 미신숭배로

부터 근대적인 과학.기술 문명으로 개화시켜 주었다라고. 그러나 서구 이외의

세계는 결코 미신숭배에 빠져 있지 않았다. 이슬람교가, 불교가, 유교가 미신인

가? 하나님 숭배는 과학이고 조상숭배는 미신인가?

또 물질적 향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결코 서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것

이야말로 인류 보편적인 경향이다. 그리고 16세기에만 해도 물질적 생산력은 아

시아 지역이 서구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또 서구와 맞닥뜨렸을 당시

에 비(非)서구 세계의 물질적 생활수준이 서구에 비해 반드시 뒤떨어졌던 것도

아니다. 엥겔스의 기록에서 보듯이 19세기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구와 자본주의가 비 서구에 대해 분명하게 앞선 것이 있다

면, 그것은 물질적 생산력―민중의 물질적 생활수준이 아니라―이며, 그 가운데

서도 특히 총검 생산력이었을 뿐이다. 그러했으므로 서구와 자본주의는 총검이

아니고서는 비 서구 세계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외교는

포함외교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구는 비 서구 세계를 “문명화”한 것

이 아니라 “정복”한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 천년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지난 20세기에 극에 달했

다. 그들은 20세기에 들어서는 정복전을 한 단계 높여서 제국주의화했고, 그 말

년에 들어서는 이 비극을 전 지구화(Globalization)했다. 이 분명한 역사적 사

실에 대해 눈을 감고서 서기 1천년대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엄청난 죄과에 대해 서구문명과 그것의 산물인 자본주의는 인류 앞에 회개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21세기는 인류에게 ‘희망의 세기’가 될 수 있다. 그래야

만 2천년대에 인류는 절멸되지 않을 수 있다. 첨단 과학.기술 문명으로 무장한

동물적 야만이 판을 칠 때 과연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 * *

그러면 서구는 어째서 이런 엄청난 죄과―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를 범하

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에서 구해진다. 즉 기독교 세계관과 자

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서구 문명은 기독교와 분리할 수 없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든 아니든 기독

교는 서구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다. 아직도 창조론과 진화론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보라! 그런데 기독교는 유일 배타적 신관(神觀)에 따라―여타의 모든

신을 부정하는! 물론 이슬람교도 유일신을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만큼 배타적이

지는 않다! 마녀사냥은 서구에만 있었다!―자신들의 종교와 그것에 기반한 자신

들의 문명을 절대 우월시하고, 자신들을 우월한 선민(選民)으로 간주한다. 그러

면서 여타의 인류 문명들을 미신을 숭배하는 야만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종’으

로 개종시켜 문명화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한다. 고대 그리스의 노예제 도시국가

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문명과 야만의 인식구도―그것은 고대 중국에서

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는 기독교의 의해 극복된 것이 아니라 오

히려 더욱 철저하게 내면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오만함을 가짐으로써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그들의 문명

을 말살시켰다. 절멸과 개종을 병행했다.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정복하는 힘이

충분치 못하여 그렇게 만들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의 이러한 오만과 그 오만이 저지른 야만성은 서구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을 창출해 내고,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빠르게 발달시킨 데에 힘입어서 더욱 확

고해졌다. 즉 서구는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하나가 된 근대 서구문명을 만들어내

고, 이로써 자신의 물질적 및 정신적 우월성을 확신하면서, 더욱 무모하게 정복

을 전개했던 것이다. ‘서구식 근대화’를 강요한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성찰해야 할까? 마르크스가 자

본주의를 생산양식의 발전과정이 거쳐야 할 한 단계로 묘사했지만, 그것이 과연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과학은 인간

의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필연이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산업사

회(공업과 도시화를 주된 특징으로 하는)는 생산력의 발전에 있어서 거쳐야 할

단계인지 모르겠으나(이것조차도 미지수이다. 앞으로 인류는 절멸되지 않기 위

해 생산력의 발달을 후퇴시킬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인간사회가 반드시 거

쳐야 할 단계인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도 윤리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 자연을 대하듯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

위를 대하듯이 “성찰”적으로 대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먼저 생겨났고, 이후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었다. 이 자

본주의는 인류의 물질적 생산력을 비상하게 고도화시켰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

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 번영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이룩한 번

영은 그 수혜층이 재산과 지식을 가진 자들에게만 제한된 번영이다. 또 전 지구

적으로는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 국한되는 번영이었다. 즉 그것은 물질

적 풍요의 조건을 창출한 것은 사실이되, 모든 인간의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일하는 기계로 만드는 속에서 달성되는 번영이다. 그래서

“임금노예”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말이다. 오늘날 자본주

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인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보라. 일거리를 찾아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동물화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번영이다. 물질적 쾌락을

위해 한없이 소비하는!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존엄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소비주체’로 파악되고 있다. 그것은 또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파괴하는 지점에까지 나아가는 방식의

번영이다. 그리하여 “지속될 수 없는 번영”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이룩한

성과는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다. 인간은 능히 그보다

나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

1천년대의 후반은 이렇게 자본주의화한 서구 문명이 자신의 문명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전 지구적으로 이식하고 강요한 시기였다. 기독교도 자본주의도 공

히 이런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의 결과는 정복전쟁이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하였으나 실은 그 공격 과정에서 야만성을 거침없이 발동하였다.

그러면 20세기는? 20세기는 서구 기독교 문명과 자본주의가 최전성기를 맞이

한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단순한 확장

이 아니라 제국을 형성하는 팽창이었다. 그리고 이 팽창과정에서 상호간에 그리

고 예속 민족과 종족들을 상대로 처참한 살육전을 저질렀다. 물론 과거에도 전

쟁과 살육은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만큼 대규모적인 전쟁과 살육은 보기 드물었

다. 자기나라 던 것이다. 게다가 과학.기술로 대량살상 도구를 고도화하고서.

그렇다고 그들의 복음처럼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는가? 그들을 흉내내는

일제 식민통치가 우리 민중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는가? 얼마간이라도

물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면 식민지 민족과 민중의 투쟁의 성과일지언정―제국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일 지언정―그들의 식민지화가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다.

켐브리지대(大) 존 런 교수는 “한 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인간이 악행을 르는 능력과 선행을 하는 능력을 함께 성장하는 걸 보게 됩니다. 지금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라며 서구 자본주의 시

대를 긍정하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이처럼 지난 1천년대와 20세기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들이

내세운 문명화는 결코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반면에 야만이 더

욱 번창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99년,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할 마

음의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모든 문제를 매우 크고 깊게 즉 총체적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1천년대, 그리고 그것의 극치인 20세기를 어떻게

부정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성찰”의 초점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지점을

제껴놓고서 21세기를 이야기하고 밀레니엄을 이야기하는 장밋빛 시나리오들을

모두가 공허하다. 아니 기만이다.

기독교 문명에 대한 극복의 방향은 무엇인가? 그들의 배타성, 선민의식을 타

파해야 한다. 그들의 하나님과 무속에서 숭배하는 우리의 조상신들 사이에서 그

들의 하나님에게 배타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그들의 성령과

무속의 신내림에 우열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각 민족은 자기의 신이든,

스승이든 받들 수 있어야 한다. 예수든, 마호메트든, 석가모니든, 공자.맹자든,

최수운이든! 그리고 그렇게 받드는 것은 가능한 한 관념적으로 절대화된 “신”이

아니라 “스승”이어야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을 덜 절대화할 것이기 때문이

다.

요컨대 서구문명과 서구인들을 겸허해지게 만들어야 한다. 진실해지게 만들어

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21세기에도 인류에게는 정복―무력의 정복만이 아니라

정신의 정복이 더 야만적일 수도 있다!―의 시대가 끝나지 않을 것이고, 평화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절멸의 위기가 올 것이다. 선진문명임을 자랑하는 기독

교권과 서구권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보라!

그들은 지금 문명충돌론을 내세워 타(他)문명에 대한 자신들의 정복활동이 마

치 필연적 경향인 양 호도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문명충돌은 진행되고 있

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 경향이 아니라 그들의 오만한 정복이 빚어내는 결과

물이다. 이 기만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타 문명이 서구 문명을 공격함으로써

문명충돌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구 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서구화 및 자본주의화하려는 것이 비극의 근

원이다. 그 아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첫째 자본주의―돈 본위의 생산 생활양식인!―는 인간사회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연적 단계라는 사고방식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시장은 존재할 수 있

지만―그것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다―인간(노동력이든 성(性)이든)을 상품

화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자유시장은 아니어야 한다. 시장이 통제되지 않으면 인

간의 노동력이 상품화되고 인간은 기계화 물질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유시장

하에서는 인간은 상품을 소비하는 존재로 재생산되며,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동물적 욕구가 무한히 충동질된다. 섹스와 폭력이 헐리우드 영화의 주무

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자유시장을 기초로 하는 이익사회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빈곤층을

늘릴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인간은 생산요소로 취급되고 소비하

는 동물로 키워진다. 따라서 이익사회(시민사회)에서 공동사회(공동체)로 무게

중심이 옮겨져야 하고(이익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다! 최종심급에서 사

적 이익의 자유로운 추구가 가치기준이므로!), 자유시장경제에서 집합적으로 생

산 분배하는 경제로 무게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일지―어떠

한 종류의 진보적인 공동체경제일지―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한 나라 안의 차원에서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국제적으로는 이익공동체적 경향이 우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자유주의에서 또는 자유주의에서 설파

하는 것과 같은 런 점에서 “돈이 으뜸”이라는 의미에서의 자본(資本)-주의가 아닌 그 무엇–사

람본위, 즉 인본(人本)–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새 천년대 인류의 역사적 과제는 탈(脫)서구화와 탈(脫)자본

주의화이다. 이것을 전제로 인류가 공존 공영하는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

* * *

20세기는 우리 민족에게는 서구와 자본주의―제국주의 단계에 이르기 전과 후

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세기이고(일제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류이다. 비(非)

서구가 아니라 아(啞)서구이다.), 그 후반기는 민족상잔과 분단의 반세기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20세기 내내 서구화와 자본주의화가 폭력적으로 강요되었다.

물론 우리 민족 내부에서 서구화와 자본주의화를 지향하는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부의 지향성이 아니라 외부의 강요가 압도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민족주의―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 수도 있

다. 그러나 민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까지 그렇게 평가할 수는 없다. 지식인들

은 흔히들 ‘잘못된 세계화’는 문제가 있지만 세계화 자체는 피할 수 없을 뿐 아

니라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것이 전 지구적인 동

일화, 서구 문명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것에 대해 한 마디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차라리 민족들 간에 세

계적으로 서로 다양화하는 것이 생물 종(種)의 다양성처럼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 자본주의 식―영 미 식이든 유럽 식이든―으로 동

일화하는 것이 대세처럼 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각 민족들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앞서 가는 것이다. 미래지향

적인 것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민족을 강조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도

저히 말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은 지극히 중요한 그 무엇이다. 아직

인류가 참된 공동체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지금(즉 근원적 가치관을 공유하고서

일체화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공통되는 최고의 가치기준을

공유하고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통일적으로 운영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자연사적 과정이어야 한다고 볼 때, 사회

생활의 기본 단위는 민족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본단위조차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당한 이래 재구성

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는 인류 공동체의 형성에 한 몫을

하며 참여할 수조차 없다. 유엔 총회에 가서도 서로 싸움질을 해야 하는 판이

아닌가? 따라서 민족적 가치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이다.

그리고 찢겨진 민족을 재통일시키고 자주적인 민족공동체로 재생하는 것은 21세

기 우리의 최우선적인 정치적 과제이다.

우리는 21세기에는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자주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21세기는 우리 민족과 노동자계급(임금노동자

만이 아니라 노동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언론에서는 그리고 정치인들도 모두들 대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찢

겨진 나라의 통일을 전망하지 못하는 대전환은 실로 공허하다. 심하게 말하면

기만이다. 그것을 빼놓고서 도대체 무엇이 대전환이고 무슨 “혁명의 세기”란 말

인가?

민주화나 계급투쟁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의

연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탈서

구화와 탈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더

구나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체제를 형성하고 굳히려는 초국

적 자본 세력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금! IMF

신탁통치로부터 경제식민지로 넘어가려 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그러나 한국사회의 민주화도 진보도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경유해서야만 참된

완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분단조국―비록 평화공존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에서 민주화가 얼마나 충실하게 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인간해방으로의 전진이

힘차게 이루어질 수가 과연 있겠는가? 분단조국 하에서 한국은 경제식민지를 면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 분단조국 하에서 북한 민중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21세기는, 아니 지금 바로 1999년은 우리 노동자 민중에게 이런 중차대한 숙

제를 던져주고 있다.

* * *

1999년은 20세기의 마지막 동자계급은 20세기를 서구문명과 자본주의의 침략으로 인해서 무수한 고통을 겪

으며 신음해야 했다. 그렇다. 그것은 신음이었다. 이 신음을 끝장내지 못하고

우리는 한 세기를 보내려 하고 있다. 또 한 세기를 맞으려 하고 있다.

1999년은 결단의 해가 되어야 한다. 다음 세기에는 기필코 끝내야겠다는 결단

을! 21세기에 대한 준비는 역사적 투쟁을 결단하는 준비여야 한다. 그것을 빼

놓은 준비는 모두 공허하다. 우리의 결단이 뚜렷하고 확고하다면 성취의 시기는

앞당겨질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넋을 빼앗기고 허우적거린다면 또 한 세기조차

도 우리의 후손들은 신음을 계속하며 보내야 할 것이다.

허깨비 같은 장밋빛 밀레니엄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서구 문명의 오만과

독선, 선진 자본주의의 깡패짓은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제2의 세계

대공황의 가능성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그런 대공황이 아니더라도 전 지구

적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지금 심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확

실하게 수세에 처하였다.

그러나 정신 차리지 않는 자, 몸을 던져 실천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한계는

한계로 다가오지 않고 의연히 숙명적인 제약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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