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민생·개혁 입법 촉구
지난 5일 3시 15분. 박준규 국회의장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보좌진에 둘러싸여 국회 본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본회의장에서 서로 잡담을 하거나, 30센티미터 정도되는 서류더미에 턱을 괸 채 졸던 1백49명의 국회의원들은 김봉호 국회 부의장의 개회선언에 주목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외된 채 국회 정족수 1백50명을 채운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이 때부터 무려 70개 법안을 속사포처럼 처리해갔다. “의사일정 제70항 정부의 한국영화의무상영제 유지촉구 결의안입니다. 이의없습니까.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1개 법안이 통과되는 데 는 짧게는 5초 길게는 10여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의원들은 그래도 마음이 급한지 안건이 채 상정되기도 전에“이의 없다”고 보채기도 하고, 법안이 다 통과되기 전에 미리‘보따리’를 싸는 의원도 눈에 띄었다.‘부실국회’의 현주소다.
하지만 이는 파국의 전주곡일 뿐이다. 다음날인 6일과 임시회 마지막 날인 7일에는 몸싸움, 멱살잡이, 철야농성 등 국회의장석을 선점하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치뤄야했다.
사건의 발단은 물론 국회 529호실 사건이다. 야당의 주장대로 국민의 정부 들어서도 정치사찰이 계속됐다면 이는 DJ 정권에 치명상을 입힐 사안이다. 그만큼 중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진상이 철저하게 규명돼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현 정치권의 행태가 사건의 진상 규명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게다가 임시국회에서 다뤄진 법안들은 총풍·세풍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법안들. 그 속에서 IMF를 어렵게 견디고 있는 서민들을 위한 민생·개혁 입법은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못한 채 부실처리되고 있다.
지난 정기국회만해도 비리정치인 사정을 둘러싼 여야 공방으로 1달이상 늦게 열렸고, 회기중에도 여야가 대치하면서 국회에 제출된 총 6백34건의 법안 가운데 불과 1백여건만 처리됐다. 그럼에도 파국은 계속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해법은 없을까. 정개련·경실련·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7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해법을 제시했다. 여야와 시민단체 인사들이 공동으로‘합동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정치사찰 문제는 철저히 규명하되 국회 입법활동이 더 이상 방치돼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조사위원 2인을 선정해 파견할 계획이다.
시민단체들이 그간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특별검사제 도입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국회 529호실 사건을 비롯해 총풍·세풍 등 국회를 공백상태로 방치했던 요인들을 제거하려면 중립적인 조사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김영래 교수(아주대 사회과학대학장)는 “정치권을 뇌사상태에 빠지게 했던 편파 사정 시비를 비롯한 민감한 사안을 처리하려면 특검제가 도입돼야 한다”며 “IMF시대 정치권이 민생문제에 주력하지 않으면 정치불신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여연대 이태호 국장은“여당이 포용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책임져야할 것과 문제삼아야할 것을 구분못하는 야당이 더 큰 문제”라며“당리당략을 위해 국회 파행을 가져온 것은 국민을 볼모로한 권력 남용”이라고 비판했다.
/ 김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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