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정태인씨가 컴퓨터 통신에 올린 강용주(35·12년째 복역

중) 씨의 답신에서 일부를 옮겼습니다.

겨울은 어느 새 생활 속으로 들어 왔네요. 옛사람은 ‘견병수지동 지

천하지한'(見甁水之凍, 知天下之寒)이라고 했지만 우린 얼어 있는 병

속의 물을 퉁해서가 아니라 움츠려드는 어깨, 성에낀 창문, 두툼한 솜

이불이 생활이 될 때 ‘우리들의 겨울’임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운동

장 한 켠에 만들어 놓은 텃밭에 잔반(殘飯; 먹고남은 밥)을 거름으로

묻는 중인데 삽같은 연장도 없이 플라스틱 밥주걱으로 하다 보니 짠밥

구덩이에 흙 덮는 일도 땅이 얼면 힘들게 됩니다. 얼마나 살려고 밭에

다 그렇게 거름을 하느냐는 농담을 들어가면서도 내년에 텃밭에 심어

먹을 상추, 쑥갓, 케일, 깻잎 따위를 생각하며 짠밥을 묻는데 벌써 땅

파기가 어려운 걸 보면 겨울은 진즉 왔나 봅니다. 이미 생활이 되어

버린 겨울을 봄의 희망으로 이겨냅니다. (중략) 봄을 기다리는 희망만

이 아니라 겨울 그것이 봄을 잉태하고 만드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으로

‘곱징역’ 겨울나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는지요.

보내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중략) 옛날엔 ‘자유주의’ 따위엔 알레

르기 반응이 있었는데 어느 새 실천적 휴머니스트 비슷하게 되어 버린

자신을 보고 어떨 땐 놀라기도 합니다만 세월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테지요. 그런데 이 ‘변화’엔 좀 우스

운 얘기가 숨어 있습니다. 헌법소원 등의 합법투쟁을 이용한 ‘양심 지

키기’라는 싸움을 할 땐 ‘그들의 논리로 그들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양심과 사상의 자유니 관용이니 인권이니를 들먹였을 뿐이었지요. 타

방(他方; 상대편)을 더욱 효과적으로 공격하려니까 자유나 인권에 대해

이것 저것 뒤적이고 인류보편적 가치로서 인권을 입에 올렸는데 언어

가 갖고 있는 주술적인 힘이 작용한 탓이었는지 몰라도 어느 새 그 개

념,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고 있지 뭡니까. 바로 이 변화의 지

점에서 내 감옥살이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양심지키기’라는

필부(匹夫)의 반항이 수호하려는 가치가 ‘개인적 가치’가 아니라 ‘보편

적 가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한 ‘만인 공통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개인을 일으켜 세우는’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요.(중략)

이처럼 반항은 처음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어쩔 도리없는 저항

이었던 것이 더 나아가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실천하고 그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선언하게 된다고 까

뮈가 말했듯이 나 또한 전향거부라는 반대, 소극적인 데서 양심의 자

유라는 인류보편적 가치의 실현, 적극적 의미로 발전하게 됩니다. 반항

하는 개인은 자신이 의미부여했던 것이 공동선과 닿아 있고 자신의 행

동은 만인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략) 존재하기 위

하여 인간은 반항해야 하고 그 반항이 연대성 위에 자리잡을 때, 우리

는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함께 존재하게 된다고 합니다.

안동에서 용주가

96년 12월 24일 (화요일) 인권하루소식 제7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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