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네트워크]

다시 4·3을 맞으며

박 찬 식

4월이 다가온다. 4월은 한 달 간 봄기운을 응축시킨 새 생명이 그 생기를 더

는 감출 수 없어 세상을 향해 싹을 터뜨리는 계절이다. 마음 급한 개나리, 진달

래는 벌써 노란색, 진홍색의 꽃망울까지 터뜨려 산하를 곱게 물들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이 용솟음치는 4월 초입에 우리는 너무나도 참혹한 죽음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자연의 계절과 역사의 계절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그

역사는 바로 「제주 4·3」이다.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4·3을 잊고 지내왔다. 역대 독재정권은 ‘4·3은 북한

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니 논의할 필요도 없고 입에 담아서도 안

된다’는 논리로 말문을 봉쇄해 왔다. 심지어 원통한 죽음을 놓고 목놓아 우는

것조차도 금지되었다. 운동세력조차도 4·3을 역사로서 공부하면서도 이날을 되

새기는 행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4·3의 진실은 철저히 파묻혀

왔던 것이다.

4·3이 북한의 사주나 남로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극우세력들의 주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것을 강력히 뒷받침했던 박갑동(당시 남로당 당수 박헌영

의 비서)이 “그 부분은 안기부에서 조작해낸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완전히 무

너졌다. 물론 당시 봉기를 일으켰던 무장대의 주축이 되었던 것은 남로당 세력

이었다. 그러나 4·3은 좌익세력이 어느날 갑자기 일으킨 봉기가 아니었다. 4·

3 봉기는 그 일년 전에 있었던 3·1절 시위에 대한 경찰의 발포, 이에 항의하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관·민 합동 전 도민 총파업, 그 이후 1년 동안 2,500여

명을 구금하고 3명을 고문치사하는 미군정 경찰의 가혹한 탄압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특히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육지에서 파견된 서북청년단

등 극우 깡패조직들의 무자비한 테러, 약탈, 겁간 등 눈뜨고 볼 수 없는 횡포는

4·3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4·3은 분단국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연장이었

으며, 그것은 제주도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된 투쟁의 한 정점이었다. 그

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특유의 공동체적 유대로 뭉쳐 있었던 제주도 민중들이 미

군정과 극우 깡패조직들의 무자비한 횡포에 맞서 생존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정

당방위적 항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폭동이니 항쟁이니 하는 이러한 논란조차도 4·3의 엄청난 참극 앞에

서는 차라리 무색해지고 만다. 당시 제주도 인구(27만으로 추정)의 1/10이 넘는

3만 명의 고귀한 인명이 비명에 죽어갔다. 제주도 전체의 70%가 넘는 130여 개

의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고 인구의 1/3이 넘는 10만여 명이 이재민이 되어야

했다.

특히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초토화작전은 제주섬을 온통 붉

은 피로 물들였다.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부락을 적성지역으로

선포하고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어 없애는 이른바 3진(三盡) 작전에 따

라 젖먹이부터 80 노인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제

주도 의회가 피해신고를 접수한 이래 확인된 사망자 15,000여 명 중에 11%는 10

세 이하 어린이거나 60세 이상의 노인이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불가항력의 상태에서 영문도 모른 채 무차별 학살되었던 것이다.

전쟁에서도 무기를 들지 않은 양민에 대한 학살은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다.

최근 미국과 나토(NATO)는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계 정부가 알바니아계 주민

들을 학살한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에까지 개입해 연일 폭격을 가해대고 있지 않

은가? 그런데 50년 전 제주도에서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주도한 것은 바로 미군

이었다. 당시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장군이 유고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규모 양

민학살을 초래한 초토화작전은 4·3발발 초기 미군이 제시하고 강요한 것이었

다.

그러면 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사태의 배경과 원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초

토화작전을 밀어붙여 수만 명의 고귀한 인명을 앗아가는 전대미문의 참극을 빚

어냈는가? 미국은 당시 미소냉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한반도에서 남쪽만이라도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이를 안정화시키고자 여기에 도전하는 세력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친일파에 기반한 단독정부로서 정통성이 취약한데다

국회에서도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은 반대파를 싹쓸이하고 권력기

반을 다지는 계기로 4·3을 이용했다. 결국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과 이승만의

권력욕이 맞아떨어지면서 고립무원의 섬 제주도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불과 100여 정의 소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500여 명의 무장대를

때려잡는다고 3만여 명을 학살한 이 엄청난 사태를 설명할 길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 수차례 4·3의 아픔을 치유할 것을 공약해 왔다. 지난

대선 때에는 국회특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 피해보상 등 구체적 해결방안을 약

속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유족과 도민들의 기대는 컸다. 특히

국민회의에서 ‘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제주도와 서울에서 공

청회를 개최하면서 이번에는 이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가시적인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진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국민회의는 수구세력의 공격과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우려된다며 지방자치단체에 위령공원 건립 예산을 지원

하는 정도로 비껴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을 덮어두고 위령사업이나 하는

것은 4·3의 진정한 해결을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억울하게 죽어간

4·3의 원혼들을 또한번 욕되게 하는 것이며, 살아남은 유족들을 우롱하는 것이

다. 더욱이 4·3은 지역문제가 아니라 이 민족의 진실과 양심을 가늠하는 민족

적 문제이다.

정부와 국회는 더 늦기 전에 공식적으로 4·3의 진실을 의 명예를 회복하며 피해를 보상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선거가 끝나면 정치권에서는 4·3을 외면할 것

이다. 더구나 총선이 끝나면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 김대중 정부가 4·3을 해결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고 만다. 그것은 4·3의 진상규명이 잠시 미루어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물건너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를 목

격했던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4·3의 진실을

규명하고 그 원통함을 풀 수 있는 최초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이다.

이제 4·3의 참극이 벌어진 지 반세기를 돌아 다시 1년이 더 지났다. 4·3 자

체도 엄청난 일이거니와 그 진실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묻혀져 왔다는 사실은 우

리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고서 어떻게 후손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며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 나라 정부와 국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잊혀진 4·3을 되살리는 일은 잃어버린

진실성을 되찾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라

면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이다. 4·3을 맞아 사회단체나 노조에서 특별한

행사를 갖지 못하더라도 분향소를 설치하거나 묵념이라도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

는 것은 어떨까? 나아가 회원이나 조합원들과 함께 <레드헌트>와 같은 비디오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집회나 농성에 함께 하

거나 성원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