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법에 징역살이했다니
죄명-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형무소行…”법적 대응할 것”
잠들지 않는 남도, 통곡의 섬, 한(恨)의 땅….
4월이 오면 제주도는 ‘4·3’의 중압감으로 온 섬이 가슴앓이를 한다. 제주4·3의 실체적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억울하게 죽임당한 원혼은 여전히 구천을 떠돌고 살아남은 자는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어 울화병이 도지기 때문이다.
‘제주4·3’에는 ‘5·18민주화항쟁’이나 ‘6·29항쟁’처럼 뒤에 따라붙는 ‘꼬리표’가 없다. 한때 공산폭동 사태 민중항쟁 민중운동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그냥 ‘제주4·3’이라고만 쓴다. 그동안 제주4·3의 성격 규명을 위한 논쟁이 지나치게 소모적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4·3은 특정 이념이나 시각으로 풀 수 없는 복합적인 양상인 것으로 잠정 정리돼 있다.
제주4·3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전개과정 동안 민간인을 포함해 3만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6·25’전쟁과 더불어)이다.
이 제주4·3의 역사적 성격, 발발원인, 사망자수, 미군정의 개입 및 계엄령의 불법성 여부 등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은 상태에서 최근 또 하나의 숙제가 더해졌다.
‘NEWS+’ 제175호(3월18일자) 국방경비법 관련 보도 이후, 4·3에 연루됐던 제주 민간인들이 자신들을 처벌했던 근거법이 바로 국방경비법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앞다투어 이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4·3과 관련된 법령으로는 계엄령만이 거론되었을 뿐이다.
법조계 등에서는 국방경비법이 ‘1948년 7월5일 공포, 8월4일 발효’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법령호수도 없고 공포된 적도 없는 ‘유령법’이라는 것이 ‘NEWS+’ 보도의 골자였다. 정부는 이에 대해 물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그저 ‘국방경비법이 미군정법령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입장만을 보이고 있다.
목숨 부지한 것만도 다행…총살도 수두룩
이처럼 실체가 애매하기 짝이 없는 국방경비법에 의해 제주사람들 상당수가 실제 징역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시엔 자신을 얽어맨 법령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한 채.
김상효씨(73·제주시 봉개동)는 비교적 자세히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군경토벌대에 ‘자수’한 것은 4·3 발발 이듬해인 49년 봄.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고향집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산사람’이라고 불리던 ‘무장대’의 일을 거들며 이리저리 도망다니다 힘에 부쳐 결국 하산을 결심했다.
집단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이리저리 이송되다가 일제시대 주정공장이던 군수용소(현재 제주시 건입동 천마주유소 부근)에서 생활하게 된다. “자수한 뒤 몇달이 지나 100명 단위로 재판이 열립디다. 군복차림의 판사 3명이 앉아 이름을 호명하며 혐의를 말하기는 했어요.” 재판장이 밝힌 것엔 도로차단 식량운반 식량조달 남로당가입 등 혐의내용만 있을 뿐 죄명은 없었다.
김씨가 자신의 죄명과 형량을 알게 된 것은 그해 가을 대구형무소에서. “감방문에 걸린 나무명찰을 보고서야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15년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감방에서 안 일이지만 15년형은 대구형무소, 10년형은 대전형무소, 5년미만은 목포형무소로 나누고 무기형은 마포형무소로 갔어요.”
그는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뒤 이곳에서 ‘6·25’를 맞아 또다시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이후 마산형무소로 옮겨졌다가 형집행정지로 3년여만에 풀려났다.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받았다는 증언은 또 있다. 부성방옹(84·제주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그는 난리통에 토벌대에 의해 조부모 부모뿐 아니라 자식 4남매 등 11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잃었다. 자식들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그냥 마음 속에 묻어두고 살아 왔다고 한다.
한동안 침묵에 잠겼던 그는 띄엄띄엄 기억을 더듬었다. 49년 봄 토벌대에 자수한 그는 제주농업학교(현재 한국통신 제주본부 북쪽)의 군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제주경찰서를 거쳐 대구형무소로 간 케이스.
“분명히 기억하지만 당시에는 재판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없었어요. 형무소에 들어가서야 형량과 죄명을 알았어요.”
형무소 생활은 지옥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식사배급에 등급이 매겨졌고 나중에는 이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운동을 금지시킨 탓인지 아랫배가 붓고 물이 차는 반면 다리는 뼈만 남아 변기통을 들 수 없을 정도였고 질병으로 하나둘씩 저세상으로 떠났어요.”
부옹은 기억 저편에 남겨뒀던 악몽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부옹은 부산형무소를 거쳐 마산형무소에서 7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마치고 가석방됐다.
‘빨갱이가족’으로 몰려 산기슭에 숨어살다 자수한 전기성씨(78·제주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리)는 형(행방불명)과 함께 무기형을 언도받아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경우. 전씨는 이 형무소(당시 제주사람 200여명이 무기형으로 수감)에서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 뒤 국군노무자 등으로 떠돌다 재수감돼 18년간 형살이를 했다.
이들 외에도 김정식씨(68·제주시 연동)는 7년형을 언도받아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고문 굶주림 질병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이 국방경비법의 적용을 받아 수감은 됐을지언정 제주도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받지 않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긴다. 당시 제주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거나 수장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
그러나 국방경비법의 적용을 받은 수형자들 중에는 ‘6·25’ 전쟁을 거치며 형무소에서 총살당하거나 여태까지 행방불명으로 남은 경우도 부지기수다. 김찬배씨(당시 21세·여)는 진주형무소에서 가족 앞으로 보낸 엽서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50년 5월25일 소인이 찍힌 이 엽서에서 김씨는 자신은 잘 있다며 어린 동생들을 잘 돌봐달라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제주도의회 ‘제주4·3피해신고실’에 접수된 형무소 행방불명자는 모두 958명. 제주의 4·3연구가 강덕환씨(38)는 “행불자를 포함해 어림잡아 1400여명이 당시 형무소에 수감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제주사람들에게 적용된 법조항은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죄)와 33조(간첩죄)가 대부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불자 등 1400여명 수감”
결국 법령호수도 없는 유령같은 국방경비법에 의해 수많은 제주사람들이 정당한 재판절차도 받지 못한 채 형무소에 무더기로 갇혔던 것이다.
제주4·3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를 제작해 화제를 모았던 조성봉씨(38)는 “요즘 실체가 불분명한 국방경비법 등으로 고통을 당한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면서 “법치국가임을 표방하는 나라에서 국가권력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무차별 행사됐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씨는 현재 제주에 상주하며 증언을 채록하고 있으며 5월18일 부산에서 완성된 작품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자신들의 죄명이 국방경비법이라는 기억을 되살린 증언자들도 기회가 닿으면 법적인 대응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에 묻는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힘겹게 건져올린 자신들의 몸뚱아리를 또다시 감옥에 집어넣은 법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4·3’ 반세기의 발자취
△47년 3월1일:제주읍 관덕정광장서 3·1절 시위군중에 발포, 6명 사상
△47년 3월10일:제주출신 경찰포함 민-관 총파업
△48년 4월3일:무장봉기대,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습격
△48월 4월28일:제주주둔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의 평화회담, 5월1일 오라리사건으로 결렬
△48년 10월∼49월 4월:군경토벌대,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을 적성지대로 간주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초토화작전을 전개. 최대의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추정
△54년 9월:한라산 금족지역 전면 개방
△57년 4월: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 생포
△78년:현기영씨, 소설 ‘순이삼촌’ 발표 후 구속
△87년:김대중대통령후보 진상규명 공약
△88년:4·3관련 서적 대거 출판
△89년:제주일보 ‘4·3의 증언’ 연재 시작(90년 6월 제민일보로 옮겨 재연재)
△91년:전대협 주도의 진상규명 시위
△92년 4월:다랑쉬굴에서 4·3피해 민간인 유해 11구 발견
△93년 3월: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출범
△94년 4월:합동위령제 첫 개최
△95년 5월:제주도의회 4·3피해조사 1차보고서 발표, 인명피해 1만4125명
△96년 12월:여야의원 154명 ‘진상규명 특위 구성결의안’ 발의
△97년 4월: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 발족
△97년 9월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 발족
△97년 9~10월:인권영화제 부산영화제 ‘레드 헌트’ 상영
△98년 4월:50주년 기념 합동위령제와 각종 행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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