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1월24일 오전 10시. 세상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했다. 그러나 이날 택시 노동자 권오영(38)씨의 몸은 세상에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다. “완전월급제 시행하라. 부당노동행위 중단하라.” 29년 전 청계천에서 한 젊은 봉제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타올랐듯이.

분신 당시 그는 민주택시연맹 경기 이천지역 노조위원장이었다. 전날 밤 조합원들과 천막 단식농성에 들어갔지만, 회사쪽의 폭력으로 천막이 철거되고 조합원들도 쫓겨났다. 쇠사슬로 손목과 기둥을 이어 묶고 버티던 그는 회사쪽에서 쇠사슬을 끊으려 하자 시너를 몸에 뿌렸다. 그리고 난로에 종이를 갖다대는 순간 몸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꿈속을 헤맸다. 염라대왕 앞에 서는가 하면 하느님 앞에도 섰다. 달아나고 싶어 몸부림쳤다. 그렇게 지옥과 천당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끝내 꿈속에서 도망쳐 나와 눈을 떴다. 사람들은 그 사이 일주일이 지났다고 했다. 그리고 기적이라고도 했다.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도 그는 다시 살아났다.

농성에 들어가기 전부터 분신은 각오한 것이었다. 벼랑 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사용자들은 배차·징계 따위에서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며 노조의 목을 조여왔다. 몇년새 조직은 4개 사업장 180명 조합원에서 2개 사업장 11명 조합원으로 줄었다. 구제금융을 맞고부터는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사용자쪽의 거부로 단체교섭마저 계속 헛돌고 있었다.

한달 전에는 버스터미널 앞에서 부당노동행위를 알리는 거리방송을 벌이기도 했다. 경찰은 까닭없이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4일째 되던 날 경찰은 거리방송을 가로막으며, “그만두지 않으면 구속하겠다”고 했다. 구속되는 건 겁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구속된다면 조합은 곧 무너지고 말 운명이었다. 한없이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극단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달 내내 머리 속에서 `무서운 생각’을 수없이 그리고 지웠다. 결국 결심이 섰다. 설과 새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시점을 디데이로 잡았다. 세상의 관심을 끌기엔 이때가 가장 좋을 것 같았다. 22일 저녁 난생 처음 아내에게 나이만큼의 장미꽃을 선물했다. “신상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귀띔에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도 따라 밤새 울었다.

처음부터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 돌아왔다. 이번에는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 기대도 빗나갔다. 세상은 그의 분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완전월급제는커녕 단체교섭조차도 제자리걸음이었다. 달라진 건 흉하게 일그러진 그의 몸뚱이뿐이었다. 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처음부터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10달 가까이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머리는 늘 노조에 가 있었다. 지난해 6월부터는 걸을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몸에 붕대를 감은 채 이천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노조 항의집회에 참가했다. 그렇게 석 달을 싸우고서야 단협을 체결할 수 있었다.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는 지난해 11월 서둘러 퇴원했다.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그러진 얼굴로는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같은 경험을 겪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노동단체 등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분신해 숨진 `열사’에 대해서는 기념사업회까지 꾸려지고 있었으나, 자신처럼 살아남은 사람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잊혀진 존재였다.

어렵게 20명의 이름을 확보했다. 그렇다고 쉽게 소재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처음엔 다들 직장에 복귀했지만, 노조 집행부가 바뀌고 나면 그들의 보호막도 사라졌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그들은 일터를 빼앗기고 다들 세상 밖으로 숨어버렸다. 겨우 9명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칙사 대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잊혀지고 버려지는 존재여서는 안된다.’ 그는 스스로 뭉쳐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9명이 뜻을 모아 `분신노동자연합회(가칭)’를 만들기로 했다. 설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26~27일 일일주점을 열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들어서만 벌써 11명의 노동자가 분신했습니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더이상 없게 하기 위해 우리가 싸움의 맨앞에 서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안영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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